세계 7대 불가사의/아르테미스 신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7)

Que sais 2021. 1. 21. 16:00

youtu.be/Hi4TLmtw9UQ

<기독교 성지로 부상>

초기 기독교에 큰 역할을 한 요한과 바울이 에페소스를 거론했다는 것 자체가 기독교와 큰 연관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에페소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사망했다는 사실도 에페소스 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에페소스가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교황을 선출하는 회의를 에페소스에서 소집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얻었다.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에페소스의 인근은 기독교 성지로 다시 태어났고 주민들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기독교인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앙 즉 이교도인들이 믿었던 악마 아르테미스를 이 지상에서 영원히 쫓아낼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조상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하여 이교도들의 우상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아르테미스 이름은 모든 공개적인 건물에서 망치로 쪼아졌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적들 중에서 파괴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가장 중요한 곳에 커다란 십자가와 기독교의 문양들을 새겼다.

 

아르테미아신전 기둥(대영박물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에페소스 인들이 그들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를 찾아냈다. 1960년의 고고학 발굴 팀은 2개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발견했다. 조각상이 발견된 곳은 놀랍게도 에페소스가 기독교도의 마을로 변한 후 기독위원회가 열리던 커다란 방의 지하실이었다. 그 조각상들은 붉은 모래 속에 정성스럽게 보관되어 있었다.

 

614년에 지진이 일어나 마을의 절반이 파괴되고 해적들이 에페소스를 점령한 후 언덕 위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아르테미스 신전에 남아있던 돌들이 또 다시 사용되었다. 해적의 침입은 에페소스를 원천적으로 변모시켰다. 에페소스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주민들이 에페소스를 떠났고 결국 신전 주위는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건축가 우드의 발굴>

중세시대만 해도 아르테미스 신전은 에덴의 동산에 세워졌다고 알려지기도 한 전설의 신전이었다. 그러므로 세계7대불가사의이지만 망각 속으로 떨어졌던 에페소스 신전은 유럽인들이 고대의 유적에 관심을 가지면서 제일 먼저 발굴하려 생각한 기념물이다.

그러나 아르테미스 신전의 발굴에 착수한 사람은 고고학 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 열성자인 영국의 건축가인 존 터틀 우드(John Turtle Wood, 18211890)였다.

 

터틀 우드

그는 런던에 존 우드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의 아들로 태어나 로살 스쿨, 프리트우드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나중에 캠브리지와 베니스, 런던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1853년 그의 사촌인 헨리에타 엘리자베스 우드와 결혼했다.

1858년 우드는 터키의 스미르나 현재의 이즈미르 등의 기차역 설계 의뢰를 받았는데 성경에 바울이 에페소스인들이 위대한 에베소스의 다이애나라고 외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스미르나는 에페소스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는 고고학자도 아니고 유물에 대한 전문가도 아닌 건축가에 불과했지만 자신에게 아르테미스 신전을 발굴할 사명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우드는 뉴턴 경이 세계7대 불가사의인 모솔레움을 발굴하기 위해 대영박물관과 자신이 발견하는 유물들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발굴을 허가한다는 승낙을 받아 발굴했다는 것을 알고, 역시 박물관과 담판하여 1863년에 대영박물관으로부터 뉴턴경과 같은 조건의 발굴허가를 승낙받았다. 물론 발굴에 필요한 모든 자금은 우드가 부담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우드의 발굴은 순탄하지 않았다. 발굴 지역의 교통이 불편한 것은 물론 말라리아가 번성하여 인부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더욱이 돈 많은 영국인이 발굴에 착수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산적들이 출몰하여 작업을 방해하기도 했다.

더구나 그가 갖고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에 대한 자료는 너무나 적어서 엉뚱한 장소를 시추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우드는 이러한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발굴 현장에서 발견되는 작은 파편이라도 세심하게 조사했고, 18662, 그리스 비문을 발견했는데 이 비석에는 정기적으로 사원에서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극장으로 운반되는 다양한 금과 은 조각상을 언급하는 글이 적혀있었다. 그는 마그네시아 문에서 성전으로 이어지는 포장 도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아 1867년에 그는 길을 발견했고 그 길을 따라 성전 벽을 발견했다.

그가 발굴한 지역은 엄청났다. 발굴지 면적은 거의 200미터 각으로 거의 12,000평이나 되며 깊이도 6미터에서 9미터나 되었다. 신전의 돌들로 석회를 만들었던 용광로의 자리도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발견된 조각상들과 동전들은 모두 영국으로 보냈다.

우드의 발굴은 유럽에 그야말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 놀라운 신전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을 정도였다. 우드의 발굴 현장은 갑자기 전 세계의 왕이나 유명인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문지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방문객들이 있었는지 우드는 귀빈들의 안내 때문에 발굴을 중단해야 할 정도라고 적었다.

1871년 겨울에 슐리만이 그곳 현장을 찾았다. 슐리만은 당시 트로이를 발굴하고 있었는데 터키 정부가 그의 발굴에 대한 중단 명령을 내리자 우드의 발굴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슐리만은 터키 정부가 발굴 중지를 명령했는데 그들의 명령대로 발굴 현장에서 철수를 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으면 발굴을 계속하기 위해 터키 정부의 허가장을 청원해야 하는가를 우드에게 상의했다.

 

우드 : 터키 정부가 트로이의 발굴을 원치 않는다는 뜻은 아닐까요?

슐리만 : 그래서 걱정입니다.

우드 : 제 생각은 터키 정부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트로이의 발굴을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슐리만 : 저는 트로이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밝히는데 제 평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터키 정부도 제 진심을 이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슐리만은 우드의 조언에 의해 터키 정부로부터 발굴 허가장을 받고 2년 후 1873년에 트로이를 발굴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다.

 

<뉴턴 경과의 에피소드>

슐리만이 방문한 20일 후에 15년 전에 세계7대불가사의인 마우솔레움을 발굴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대영박물관의 뉴턴 경이 방문했다. 바로 그가 발굴의 모델로 삼은 당사자다.

뉴턴 경은 우드를 격려하면서 대영박물관측에서 발굴에 필요한 보조금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고고학계가 드디어 아마추어 발굴가 우드를 인정한 것이었다.

대영박물관의 지원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발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발굴지를 구입하여 대대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이 때 스코파스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조각이 있는 36개의 기둥 중에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 기둥은 현재 대영박물관의 특별 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는데 대영박물관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여기에서 뉴턴 경과 재미난 일화가 있다. 뉴턴 경이 에페소스를 방문하여 우드를 격려하고 많은 자금을 지원하자 에페소스의 발굴은 궤도에 오르고 수많은 실적을 올린다. 이것은 우드의 명성이 마우솔레움을 발굴한 뉴턴 경보다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전 발굴 모습

우드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질 때인 1874년 공교롭게도 뉴턴 경이 대영박물관의 감독관이 된다. 그러자 뉴턴 경은 에페소스의 발굴 작업을 지원하던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대신에 아이아솔뤼크에 있는 이사베이 모스크를 발굴한다면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통보한다.

발굴 자금에 부족을 느낀 우드는 뉴턴 경의 제안을 받아드리고 이사베이 모스크의 발굴에 착수하지만 회교도인 촌장이 발굴 허가를 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뉴턴 경의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을 알아차린 우드는 반격에 나섰다. 뉴턴 경의 잔꾀로 중단된 아르테미스 신전의 발굴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발굴에 들어가는 자금이 엄청나므로 우드는 수시로 영국을 방문하여 각지에서 강연회를 하면서 아르테미스 신전의 발굴을 위한 자금을 모집했다. 1877년에는 대신전의 장소와 유물을 포함한 에페소스의 발견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는 1884년까지 20여 년 동안 아르테미스 신전 발굴에 헌신했으며 자신의 발굴을 토대로 아르테미스 신전의 복원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우드는 70살에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없지만 로마시대의 동전에 신전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 단편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금의 터키 밀레토스 남쪽에 위치한 디디마의 고대 성소이자 아폴론 신전의 유적으로도 아르테미스 신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디디마 신전은 아르테미스 신전과 길이에서 2미터가 작을 정도로 규모가 거의 같은데다 현재도 비교적 온전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설한 많은 건축가들이 디디마 신전의 건설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평면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은 있지만 두 신전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특히 디디마 신전의 정교하고 세심한 조각은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이다.

디디마 신전은 아르테미스 여신의 오빠인 아폴론에 봉헌되었으므로 아폴론의 신전이 동생인 아르테미스 신전의 혈통을 이어 받은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