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제국의 부활」이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실제 벌였던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하므로 영화라 하여 모든 면을 포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대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인 「300: 제국의 부활」에 등장하는 진실 6가지를 네티즌 블루팩(BluePack)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① 레오니다스 왕의 시신 훼손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는 레오니다스의 주검을 찾아 참수하고, 몸은 십자가에 매달 것을 명한다. 이는 고대 시대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당시 페르시아는 대체로 전투 중에 죽은 사자에 관대했다. 그런데도 크세르크세스가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의 시신을 훼손한 것은 당시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인들에 대한 적의가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페르시아군의 아테네 방화
그리스와 다리우스의 1차 원정과는 달리, 2차 원정에서는 페르시아군이 아테네에 입성한다.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를 불태우는데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은 소개되어, 그리스 함대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③ 크세르크세스의 부교 진실
바다를 건너 상륙할 때 가장 큰 문제점은 항구에 정박하는 일이다. 이때 장병들과 군수품들이 무사하게 건널 수 있는 방법이 부교인데 이는 그야말로 고대 공학이 듬뿍 들어가야한다.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트 해협에 다리를 놓아 군대를 행진시키고자 명령했다.
다리우스 1세도 보스포러스 해협에 부교를 건설했는데 크세르크세스의 부교는 규모가 훨씬 컸다. 이 부교를 이용하여, 사람뿐 아니라 말과 마차까지 지나갈 수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완성된 부교가 강한 폭풍에 의해 파괴되자, 화가난 크세르크세스가 바다와 기술자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는 바다를 300대 채찍질하게 하고, 부교 건설 감독자들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④ 아테네의 함대 건설
페르시아와의 전쟁 전에 아테네는 함대가 미비했다. 그런데 아테네는 도시의 온 역량을 집중하여, 짧은 시간 안에 함대를 만들었는데 이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으로 함대를 건설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페르시아군 장교가 아테네 함대를 급조된 함대라고 폄하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사실 맞는 말이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비해 노잡이들의 역량, 경험 등 페르시아군에 비해 열세였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아테네군이 페르시아군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학자들은 아테네가 막강한 페르시아군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하게 크세르크세스의 독단에 의한 것이지 결코 아테네 함대가 전술적으로 우위에 있어서가 아니라고 평가한다.
⑤ 실존인물 아르테미시아
역사물 속의 영화에 나오는 사람 상당 부분이 가공인물이지만 아르테미시아1세는 실존인물이다. 고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중 한 명으로 아르테미스1세는 페르시아의 사트라프 즉 태수다. 에페소스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스의 아버지는 할리카르나소스의 사트라프인 리그다미스 1세, 어머니는 크레타 출신의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 어머니가 살해되고, 자신은 그리스 노예선에서 성노예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창작이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로 살라미스 해전의 유일한 여성 페르시아군 지휘관이였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아르테미시아는 살라미스 해전 이후에도 살았고 계속 크세크르세스의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⑥ 아테네의 여성
영화에서, 중요한 아테네 여성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스파르타에는 영화 「300」의 주인공 고르고 즉 레오니다스의 부인이 등장하고 페르시아에는 아르테미시아1세가 상당히 비중있게 나오지만, 아테네에는 그런 인물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당시 아테네 여성들은 아버지, 남편의 소유물이나 다름 없었으며 본인 소유의 재산을 가질 수도 없었다. 15세만 되도, 결혼을 해야 했고, 외출은 통제되었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다보니, 출산이 매우 위험한 일로 상당수 아테네 여성들이 출산 중 사망했다. 물론 이런 출산의 위험은 고대에 보편적인 일이었음은 물론이지만 여하튼 평균 수명도 남성에 비해 낮았다. 반면에 스파르타의 경우 여자도 본인 소유의 재산을 가질 수 있고 19세가 넘어서 결혼을 했다.
한 편의 영화로 당대의 세계사를 확인할 수 없지만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결정적인 두 개의 전투 즉 마라톤과 살라미스 해전은 당대 세계의 판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전투다.
마라톤 전투로 알려지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투는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아테네와 플라타이아 연합군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과의 맞대결이다. 다리우스는 아테네 인들이 페르시아인에 대한 반란을 부추키자 다리우스는 이오니아에 지원을 보낸 후 그리스를 공격했다. 다리우스는 먼저 에레트리아를 점령 한 다음 마라톤으로 항했지만 결론적으로 그리스군이 불과 5일 만에 경무장한 페르시아 군을 격파했다.
다리우스는 그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 재건에 총력을 기우렸지만 결국 그의 재침은 사망으로 좌절되고 아들인 크세르크세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고대사에서 마라톤 전투가 중요한 것은 당대 최강의 페르시아가 패배할 수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이후 480년에 바톤을 터치한 크세르크세스와 아테네의 살라미스전투로 이어지고 이 전투 역시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난다. 한마디로 당대에 상상할 수 없는 대군을 동원하고도 그리스 정복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 측은 페르시아를 완전 궤멸시켜 더 이상 자신들을 넘보지 못했다고 기술하며 대부분의 서양 역사는 이를 그대로 인용한다. 그러나 꼼꼼한 학자들은 당대 최강의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완강한 저항에 물러나기는 했지만 페르시아 측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사실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지만 큰 타격없이 철수했다는 것은 그후 크세르크세스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490년과 기원전 480년에 벌어진 두 번의 전투가 고대 역사는 물론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아테네의 승리가 아테네 민주주의의 성장과 보존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결국 자유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서구 문명의 핵심 아이디어를 지속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에페소스인들의 자부심>
고대 문명세계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엉뚱한 일로 수난을 당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난 바로 기원전 356년에 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사람이 ‘어차피 나쁜 일을 하려면 후세까지 알려질 수 있는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며 신전에 계획적으로 불을 질렀다. 그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같이 유명한 것을 파괴하는데 성공하면 더욱 유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로 놀라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이 화재는 학자들로 하여금 한 가지 추측을 하도록 유도했다. 화재로 인해 건물이 파괴되었다면 신전의 지붕은 목재로 건설되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신전 안에 충분한 목재가 없다면 그렇게 많은 양의 대리석을 태워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일부 학자는 목조 지붕에 술 장식 같은 천들이 늘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 화재가 일어났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의 학자들은 거대한 불로 신전이 모두 파괴되었다는 헤로도투스의 이야기를 부정한다. 이 전설은 당시에 에페소스가 이웃에 있는 카리아 인들과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전투하던 실제 상황을 근거로 해서 지어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여하튼 헤로스트라투스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했다. ‘헤로스트라톤’이라는 말은 악명이 높다는 뜻으로 변했고 ‘미친’, 또는 ‘저주받은’ 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며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방화범이 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이 소실된 당일 즉 기원전 356년 7월 1일, 알렉산더 대왕이 타어나자 플루타르크는 아르테미스가 출산의 여신임을 기억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마그네시아의 헤 게시 아스가 불을 끌 정도로 평평하게 농담을하도록 영감을 준 것은 바로이 우연이었다. 그는 여신이 알렉산더 의 탄생에 바쁘기 때문에 아르테미스 신전이 파괴 된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에페소스소에 있던 동방 박사들은 성전의 파괴를 훨씬 더 큰 재앙의 전조로 해석하고 얼굴을 때리며 그날이 아시아에 큰 재앙을 가져 왔다고 외쳤다.’
신전이 파괴되자 에페소스인들은 곧바로 신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에페소스의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을 팔았고 인근 도시국가의 왕들은 기둥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 때 22살의 젊은 알렉산더가 이 신전의 건설 현장을 방문한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와의 첫 번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지 겨우 몇 달 후의 일이었다.
알렉산더는 신전의 건축 현장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막강한 도시 바빌론 안에서 마차들이 달렸던 성벽도 보았고, 제우스 신상, 공중정원, 피라미드, 마우솔로스 왕의 무덤도 보았다. 그러나 내가 아르테미스 궁전을 보았을 때는 해가 구름 속으로 거의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스스로 말했다. ‘올림피아를 제외하고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서 알렉산더가 언급한 것 모두가 세계 7대 불가사의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세계 7대 불가사의가 알렉산더와 가장 큰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가 언급한 바빌론의 성벽은 그의 사후에 지어진 파로스 섬의 등대로 바뀌어 졌고 로도스 섬의 거상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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