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스 신전의 웅장함에 감탄한 알렉산더는 자신의 이름으로 신전을 세운다면 모든 비용을 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에페소스인들은 신전에서 두 명의 신에게 봉헌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일부 학자들은 신전이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거절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신전의 상당 부분이 알렉산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알렉산더의 건축가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디노크라테스가 신전의 작업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디노크라테스는 ‘알렉산더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들 위에 아르테미스 여신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이것은 역으로 보면 신전의 건축에 알렉산더 대왕의 입김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알렉산더가 에페소스에 도착하기 전 에페소스의 건축가 패오니오스와 데메트리오스가 신전 제1차 복원 계획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건설하지 않고 알렉산더의 건축가인 디노크라테스가 뒤를 이어 건축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디노크라테스가 알렉산더의 취향에 맞게 설계 변경을 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새로운 신전이 이전에 파괴된 신전보다 웅장하고 더 좋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이러한 관례와는 달리 새로운 것이 거의 없었다. 재건된 신전은 첫 번째 신전과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규모로 재건축되었다.
크로이소스에 의해 착공된 신전에 대한 설계도가 모두 보존되어 있었으므로 완벽하게 복원될 수 있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들이 건설한 신전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에페소스인들은 새로운 신전을 위한 어떠한 변경에도 반대했다. 크로이소스 왕의 시대와 알렉산더 시대에 사용된 이오니아식의 기둥 형태도 거의 변경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로마의 공공 건축물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조차 그리스인들이 감히 따라가기 힘든 모범을 제시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건물의 배율이 완벽하고 웅장하여 그리스와 로마 전 시대를 걸쳐 이오니아식의 모델이 되었다.
플리니우스는 적었다.
‘네 가지 종류의 기둥이 있다. 높이가 기초 지름의 여섯 배가 되는 것을 ‘도리아’라고 부르며, 같은 배율이지만 새로운 것을 ‘이오니아’라고 하고 배율이 7배인 것을 ‘토스칸느’라고 명명한다. ‘코린트’식의 기둥은 이오니아와 같은 배율을 갖고 있지만 주두의 높이가 다른데 코린트의 주두는 기둥의 기초의 지름과 같으며, 보다 화려한 장식이 있었다. 반면에 이오니아 식의 주두는 기둥 기초의 지름의 1/3의 높이를 갖는다.
고대의 이론에는 신전의 폭은 기둥 높이의 3배라고 한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의 경우 기초는 기둥 아래에 위치했고 처음으로 주두를 설치했다. 기둥 기초의 지름은 높이의 1/8이었고 기초 높이는 기둥 기초의 반지름과 같았다.‘
단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새로운 신전은 거의 2.7미터에 달하는 높이의 기단 위에 건축되었다는 것이다. 높은 기단 위에 설치된 두 번째 신전은 먼저의 신전보다 방문자들에게 더 큰 경외심을 일으켰다. 또한 세 개의 커다란 창이 지붕에 있었는데 그것은 제단으로 들어와 참배하는 경배자들이 태양의 빛으로 아르테미스 여신을 볼 수 있게 배려한 장치였다.
여타 신전과 다른 아르테미스 신전의 특징은 신전의 전면에 있는 36개의 기둥 하단부에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졌다는 점이다. 이런 형식은 다른 그리스 신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도 에페소스를 방문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을 돌아보고는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에 뒤지지 않는 걸작으로 묘사하며 찬탄했다. 신전은 그야말로 기둥의 숲을 이루었으므로 건설되기 전부터 불가사의로 불리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수난〉
에페소스에도 기독교의 영향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우상 숭배를 부정하는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아르테미스 신전 주변에서 일어나는 행진과 의식이야말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유산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던 에페소스 사람들은 기독교도들과 충돌하면서도 신전을 고수했다.
이후로도 신전은 계속 수난을 당했다. 262년 동고트 족이 쳐들어와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태우고 에페소스를 약탈하였다. 이 당시의 일을 유명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은 『로마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 동고트 족에 의해 아르테미스 신전이 파괴된 것을 애석해 하는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아르테미스 신전에 관해 쓴 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다.
‘인류의 대 재해를 이야기할 때는 아무리 고귀하고 유명한 존재라도 개인의 사망이나 건축물의 파괴 같은 것은 무심히 넘겨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에페소스에 있던 디아나(아르테미스) 신전을 잊을 수가 없다. 일곱 차례의 거듭된 재난을 겪으면서도 더욱 화려하게 복구되곤 했던 이 신전이 마침내 동고트 족의 제3차 원정 때 불타 버리고 말았다.
이 성스럽고 훌륭한 건축물은 그리스의 예술과 아시아의 부가 합작하여 세운 것이다. (중략) 제단은 프락시텔레스의 걸작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조각의 내용은 그 지역에서 사랑받는 신화에서 고른 것으로서 아마도 라토나신의 출산, 외눈박이 거인 키클로프스를 죽인 뒤의 아폴로신의 은둔, 정복당한 아마존 족에 대한 바쿠스 신의 관용 같은 내용이었을 것이다.
에페소스의 이 디아나 신전의 세계의 불가사의의 하나로 감탄의 배상이었다.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등 여러 제국은 이 성소를 존중하고 그 장려함을 찬양했다. 그러나 발트해에서 온 이 막된 야만인들은 우아한 예술을 감상할 줄 몰랐고 이국의 미신이 주는 관념적 공포심을 경멸했던 것이다.’
에페소스인들은 곧바로 파괴된 신전을 재건했는데 이는 경제적인 번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0년 후에 동고트족이 또 다시 침공하여 로마군을 격파했는데 이때에도 신전은 재건축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은 천장을 다시 올리고 야만인에 의해 파손된 조각상들을 보수했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지진에 의해 강타당한 신전은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종말을 가져왔다. 401년에 그리스 교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설교자로 꼽히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잔 크리소스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명령으로 신전 안에 석회를 만드는 용광로를 설치하고 차례로 신전의 대리석을 모르타르로 만들었고 건물 석재를 조각조각 뜯어내 교회와 도로, 요새를 짓는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6세기까지만 해도 콘스탄티노플로 조각상들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유물들이 현장에 남아 있었다. 에페소스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를 거부하면서 신전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에페소스인들은 어떠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볼 때 우상으로 여겨지는 신상의 파괴에 동조하지 않았다.
에페소스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한 이유는 자신들의 정신적인 문명이 기독교리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페소스인의 반항과 고집이 워낙 강하자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완고한 고집을 꺾을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의 대안은 교묘했다. 우선 에페소스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라고 선전했다. 사실 에페소스는 초창기 기독교와 상당히 많은 관련이 있다.
사도 바울이 65년부터 68년까지 번성하는 도시였던 에페소스로 와서 기독교리를 전파했다는 것은 『신약성경』 〈사도행전〉 19장에도 나와 있다.
‘바로 그 무렵 에베소(에페소스)에서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 소동은 데메드리오라는 은세공업자가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많은 직공을 두고 에페소스의 여신 아데미(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만들어 큰 장사를 벌여 온 인물이었다. 그가 자기 직공과 동업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말하였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미 듣고 본 바와 같이 저 바울이라는 작자가 손으로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니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통에 우리의 장사는 이제 말이 아닙니다. 여기 에베소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가 이런 실정입니다. 물론 나는 이런 형편에서 우리 사업에 대한 전망이나 수입이 줄어든다는 것만을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위대한 여신 아데미 신전이 그 영향력을 잃게 되고, 이 아시아 지방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모든 사람들이 장엄한 여신 아데미를 잊어버리게 될 겁니다.‘
이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는 위대하다’하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신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집이 필요하지 않으며 신은 항상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지적은 에페소스가 워낙 유명하므로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에페소스의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의 소형모조품을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팔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의 말은 금과 은으로 아르테미스 신상을 만들고 소위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한 에페소스인들을 분노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바울과 그의 제자들은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우상 배격을 외쳤던 회당은 구아르테미스 신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세워진 신전을 의미한다. 서기 1세기경 에페소스를 방문했던 또 다른 성인인 요한 역시 여신상에 대해 생생한 기록을 남겼는데 요한은 사도 바울과는 달리 에페소스 인들과 비교적 잘 어울려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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