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아르테미스 신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8)

Que sais 2021. 1. 2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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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의 중요 전시물>

대영박물관에서 자랑하는 간판 유물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이집트 관의 로제타석과 람세스 2세의 조각상, 파르테논 전시관, 마우솔레움 특별전시관 등이다.

그러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가장 돋보이게 만들어 준 높이 182센티미터의 신전 기둥의 하부 조각은 만인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스코파스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36개 기둥의 하나인데 크기에 비해 정교한 조각은 비록 재질은 다르지만 우리나라 석굴암의 조각상들을 연상케 한다. 비극적으로 죽은 남자인 타나토스 옆에 슬퍼하는 여자가 서 있으며 전령인 헤르메스가 보이는데 전시실의 중요성을 모르는 관객들도 거대한 조각상에 놀라 반드시 멈췄다가 지나가곤 하는데 끄새의 생각으로는 이 기둥 하나만으로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와 질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발굴 현장 사진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물들은 대영박물관의 복도에도 특별전시대를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데 이유는 유물의 양이 너무 적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구하기 어려운 우드 발굴 현장 사진도 전시돼 있다.

찰스 뉴턴 경이 1857년 마우솔레움의 발굴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한 이후 대형 발굴 현장에는 반드시 사진기가 첨단 장비로 등장하여 현장을 촬영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므로 에페소스의 발굴 현장에도 사진기가 동원되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끄새가 대영박물관 안내원에게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물들이 이것뿐이냐고 질문하니 지하창고에 많은 유물들이 있으므로 언론사 등에서 특별허가를 받으면 볼 수 있다고 하므로 이에 참조하기 바란다.

 

전설의 확인

1874년에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그는 런던으로 돌아왔고 에페소스의 발굴자로 인정되어 1874<영국왕립건축가협회>의 연구원으로 선출되었고, 1875년에는 <골동품협회>의 연구원으로 선출되었다이후에도 계속 발굴에 관여했지만 1890년 3, 69세의 나이로 서섹스에 있는 그의 집에서 사망했다.

우드가 사망한 후에도 발굴은 멈춰지지 않고 대영박물관에서 제2차 발굴에 착수했다. 19041905년에 추진된 대영박물관의 아르테미스 신전 발굴에 있어서의 특이성은 커다란 양수기를 동원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전 하부를 구성하는 원형 기초 부분이 물로 차여 있었는데 우드는 이곳에 크로이소스 왕의 시대로 보이는 유물들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우드가 직접 발굴하지 못했지만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곳에서 발굴팀 모두를 놀라게 하는 많은 양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작지만 정교하게 조각된 상아, 많은 항아리, 값비싼 보석과 금으로 된 작은 조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고대 동전들로서 고대 의식을 치를 때 사용된 물건들이었다.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에페소스인들이 그들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를 찾아냈다. 1960년의 고고학 발굴팀은 2개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발견했다. 조각상이 발견된 곳은 놀랍게도 에페소스가 기독교도의 마을로 변한 후 기독위원회가 열리던 커다란 방의 지하실이었다. 그 조각상들은 붉은 모래 속에 정성스럽게 보관되어 있었다.

발굴은 1980년에도 계속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고고학자들은 이번에 더욱 야심에 찬 발굴을 계획했다. 그것은 신전의 건립 연대보다 더 오랜 시대의 유물들을 찾는 것이다.

고대의 에페소스인들의 전설에는 그들이 신전을 건설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의뢰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신탁은 물고기가 보이고 멧돼지가 길을 알려주는 곳에 건설하라고 말했다.

전설은 계속된다. 어떤 어부가 외떨어진 해변에서 숯불로 물고기를 구으며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숯불의 불똥이 튀어 숲이 타기 시작하자 한 마리의 멧돼지가 튀어 나왔다. 멧돼지가 산으로 도망가자 긴 투창으로 멧돼지를 쓰러트렸다. 그곳에 아르테미스 신전을 세웠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고고학 팀은 이러한 신화가 사실임을 증명했다. 신전으로부터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제단의 기초 옆에서, 고대의 해변을 발견했고 작은 샘물도 발견했다. 이 샘물 옆에서 정박소와 희생용 작은 제단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즉 해변의 바로 윗 층에서 두터운 숯의 층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플리니우스가 기초를 만들 때 사용했다고 적은 바로 그 숯의 층이었다.

발굴팀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도자기는 미케네인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무려 기원전 2000년 경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것은 이 작은 제단과 샘물의 옆에 있는 해변에서 에페소스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세월이 흐르자 초기에 에페소스인들이 살았던 항구는 전쟁과 홍수에 의해 폐허가 되고 다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위치가 에페소스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아르테미스 신전 배치도

일반적으로 전설은 전설로서 끝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전설은 대부분 실화와 일치한다. 트로이의 전설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인들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그저 전설로 생각하여 흘려 버리지 않고 기록하려는 노력, 즉 문화적인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의 발굴팀에 의해 에페소스가 고대 문화의 중심지였음이 다시 확인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성소 주변에서 발굴팀은 고대 각지역에서 생산되는 물건들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상아제품은 시리아에서 온 것이다. 이집트 문화를 대표하는 푸른색 도자기인 화이앙스로 된 난쟁이신 베스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대 이집트와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긴 옷을 입은 남자 승려나 여승들의 조각도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상아로 된 그리폰날개가 있거나 또는 없는 사자의 몸에 새머리가 달린 신화적 동물 조각도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무려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에페소스의 여신에게 공여 된 이 모든 보물들은 당시 세계 각지에서 왔다는 것을 뜻한다.

에페소스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에페소스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문명이 기독교리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페소스인들의 고집

아르테미스 신전의 중앙 부분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발굴 팀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이 유물들은 크로이소스 왕보다도 훨씬 오래된 시대의 층에서 발견되었다. 진흙 속에서 금을 정련하던 장소도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의 수많은 보석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진주, 화려한 장식이 있는 목걸이, 팔찌, 여신의 옷에 달려있던 금장식과 청동으로 된 커다란 혁대 등도 있었다. 이러한 보석들이 한꺼번에 발굴된 것은 정말로 고고학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경이로운 일이었다.

학자들은 이 보물들이 발견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홍수나 또는 유사한 천재지변에 의해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진흙 속에 파묻혔다. 이때 제작된 여신상은 목재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진흙 속에서 목재는 썪고 여신을 치장하던 보물들만 발견됐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은 성스러운 곳이므로 후대의 건축가들이 이 지역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도 유물이 보존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들의 발굴로 이제까지 아르테미스 신전에 관한 모든 기록을 다시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에페소스에서 건립된 첫 번째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85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됐다. 이 건물은 홍수와 화재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크로이소스 왕이 파괴된 신전의 자리에 두 번 째 신전을 세웠고 이 신전도 파괴되자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세 번 째 신전이 같은 장소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신전 건설의 총 책임자는 세르시프론이었다. 학자들은 그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나일강 연변에 있는 수많은 기둥을 갖고 있는 신전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플리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신전의 길이는 425피에이고 폭은 225피에이다. 건축가 세르시프론이 이 작업을 맡았다. 이 작업 중에 가장 놀라운 부분은 기둥에 있는 원주 머리가 꽃송이처럼 둘레가 큰 대륜(臺輪) 부분이다. 그는 모래가 채워진 주머니로 이런 작업을 완성했다. 제일 먼저 기둥의 꼭대기까지 완만한 경사를 만든 다음 모래를 점진적으로 바닥까지 비워나갔다. 그러나 건설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문 위의 공간을 덮는 상인방(기둥과 기둥 사이의 벽 윗부분에 가로지른 나무)이다. 이 당시에도 기중기가 있었지만 아르테미스 신전에 사용된 돌들은 너무나 무거우므로 정확한 자리에 그것을 올려놓고 똑바르게 맞춘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세르시프론은 몇날 며칠을 이 문제 때문에 너무나 고민을 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꿈에 여신이 나타나 그 해결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침에 보니 놀랍게도 상인방이 제자리에 놓여져 있었다.’

 

이 전설은 에페소스인들이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생을 했는가를 알려준다. 신전에 사용되는 대리석은 12킬로미터나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40톤이나 되는 돌들도 있으므로 이것들을 운반하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아르테미스 거석 이동방법

단순한 마차로는 이와 같이 무거운 돌을 운반할 수 없자 세르시프론의 아들인 메타지네스가 대안을 제시했다. 돌의 형태에 따라 두 가지의 이동 방법이 고안되었는데 장방형의 돌을 운반하는 경우에는 돌의 양 끝에 커다란 원형 바퀴를 설치했다. 원형의 돌을 운반하는 경우에는 돌에 황소가 끌기에 편한 사각대를 설치하였다. 마치 거대한 롤러가 굴러가게 한 것이다. 고대나 현대나 필요발명의 어머니임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