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2)

Que sais 2021. 1. 2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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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되었지만 그가 갑자기 사망하여 그의 휘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를 통치하기 시작하여 약 300년 후 클레오파트라 7 일명 클레오파트라 때 로마에 의해 이집트가 멸망한다. 기본적으로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하는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시작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끝을 맺는다.

알렉산드리아의 간판 파로스등대도 이들의 작품이므로 프틀레마이오스에 대해 설명한다.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매우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300여년이나 이집트를 통치했음에도 놀라운 것은 그들이 결코 이집트인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집트의 파라오로 행세하면서도 결코 이집트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들이 이집트 파라오이면서도 마케토니아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집트 파라오로 이집트에서 생활했지만 마케도니아의 풍습과 전통도 버리지 않았다그러므로 이집트에 와 있는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과의 결혼도 없었다.

그런데 이집트 파라오의 기본은 근친결혼이다. 그들은 형제자매와 결혼했고 삼촌이 조카와 결혼하는 것은 기본이었다이는 이집트의 신화로도 정당화되었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는 그녀의 형제 오시리스와 결혼했다. 그리스 신화도 이에 버금간다. 크로누스는 누이 레아와 결혼했고 제우스 헤라 와 결혼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를 통치할 때인 약 300년 동안에 걸친 15건의 프톨레마이오스 결혼 중 10건은 남매 사이였고 2건은 조카, 사촌과의 결혼이었다. 그러므로 잘 알려진 클레오파트라 7도 근본은 이집트인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인이라는 것을 뜻한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그녀는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되는 그리스 여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근친결혼의 장점으로 이집트의 피가 아닌 그리스의 혈통을 보존할 수 있지만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질투는 물론 음모가 끊이지 않아, 프톨레마이오스 4는 그의 삼촌, , 어머니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하며 프톨레마이오스 814세 된 아들을 죽이고 그를 토막내었다고 한다.

여하튼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에 후계자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제국에 혼란을 갖고 왔다. 그의 부하들이 거대한 알렉산더 제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는데 알렉산더의 핵심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게 돌아갔다.

프톨레마이오스 1소테르(기원전 366282)는 마케도니아 귀족으로 라고스와 아르시노에의 아들이지만 그가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립 2세의 사생아라는 말도 전해진다. 여하튼 그는 알렉산더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보디 가드였는데 그가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집트는 당대 누구도 탐을 내는 지역으로 이는 이집트가 자원이 풍부한 이상적인 땅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국경으로 리비아는 서쪽아라비아가 동쪽에 배치되어 방어하기도 수월했다.

사실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정복했는데 그들은 이집트의 관습과 종교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알렉산더가 들어오자 이집트인들은 해방자로 그를 환대했다. 특히 알렉산더는 이집트 신들도 부정하지 않았고 사원도 방문했다. 특히 이집트의 근본 여신인 이시스를 기리는 사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집트를 분할받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재빠르게 이집트에 정착하여 이집트를 안정시키는데 몰두했고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필라델푸스가 이었다. 그는 남다른 능력으로 정복전쟁에 몰두하여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킨 도시들을 되찾고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점령하여 이집트를 거대제국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그가 학자들로부터 큰 점수를 받는 것은 이집트의 유명한 도서관을 거대 시설로 확장했으며 홍해를 따라 교역소를 세워 이집트를 탄탄한 토대 위에 올렸다는 점이다. 특히 그가 세계7대 불가사의인 파로스 등대를 건설하여 학자들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2를 이집트의 마지막 위대한 파라오 중 한 명으로 지목한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사망한  기원전 246년에 프톨레마이오스 3(기원전 284 221)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 중 특이한 것은 일 년을 365일로 하되 4년에 1일을 추가한다는 새로운 달력을 제안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즉각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4 필로파토르(기원전 244205)는 기원전 221년에 이집트 왕위에 올라 전통대로 여동생 아르시노에 3세와 결혼했다. 대외 전쟁에서도 약간의 성공을 얻었으며 알렉산더와 프톨레마이오스를 기리는 무덤인 세마(Sema)를 건설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5 에피파네스(기원전 210180)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어린 시절 왕좌를 물려받았는데 마케도니아 왕들의 전쟁과 반란이 이어져 이집트는 에게 해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소아시아에서 많은 영토를 잃었다. 또한 기원전 206년에 이집트의 도시 테베에서 반란이 일어나 20년 동안 프톨레마이오스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했다.

그의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6도 아버지처럼 어린 시절에 왕위에 올랐는데 주변의 외침으로 심지어는 알렉산드리아까지 위협에 처하기도 했다. 이때 로마의 도움으로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기원전 145년 시리아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남동생이 프톨레마이오스 8가 되었는데 계속되는 내전으로 이집트는 엉망이 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며 알렉산드리아 역시 황폐화시켰다. 

그의 뒤를 이어 프톨레마이오스 9 소테르II가 등장하며 가족간의 내분으로 파라오 지위를 빼앗긴 적도 있지만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공동 통치하면서 정권을 되찾기도 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다소의 어지러움이 있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행보를 이어갔는데 클레오파트라7 즉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올레테스는 로마와 밀착하여 그가 죽으면서 클레오파트라와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로 하여금 이집트를 통치하라고 하면서 로마에 이들을 보호해달라고 의뢰했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에 엄청난 자금을 약속했는데 그것이 결국 이집트가 멸망하는 단초가 된다.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는 22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지중해 동부의 대부분을 지배했다그녀는 그리스의 상류층 여성들처럼 전통적인 그리스 즉 헬레니즘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 7(기원전 69-30)가 이집트에서 큰 인기를 끈 것은 기본적으로 마케도니아인이지만 이집트어도 구사하여 백성들과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이는 유일한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였다고 한다. 특히 이집트 파라오로 많은 이집트 축제와 의식에 참여했

그녀의 문제는 왕좌를 확보하기 위해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한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점이다. 쥴리어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통해 절묘한 줄다리기를 했으나 결국 악티움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결국 자살로 그녀의 생명과 이집트를 잃어버린다.

 

<그리스와 이집트의 융합>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그리스어와 문화를 이집트의 일상 생활에 통합시키는 소헬레니제이션(Helenization) 정책이다그러므로 그들을 이집트의 파라오로 군림했지만 결코 이집트 문명에 동화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프톨레마이오스 1 세 소테르가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취한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종교적 중심지인 멤피스에서 정부의 중심을 새로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로 이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략적인 면도 고려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지중해와 그리스에 훨씬 더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도시가 아닌 그리스 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들은 알렉산드리아를 거의 떠나지 않고 이집트를 통치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정부기관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어가 사용되었고 상업에서도 그리스어가 우선이었다.

그 중에서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알렉산드리아를 지중해의 지적 중심지로 세웠으며 그곳에 거대한 도서관을 건설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부여받는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프로젝트 고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데메트리우스였다는 점이다.

도서관에 수집된 수많은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결국 지중해 전역의 철학, 역사문학과학 분야에서 세계를 주름잡는 중앙지로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안에 있지만 이집트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 바로 파로스 등대. 거대한 등대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에 건설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한정이 없어 이집트를 확보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도 나름대로 야심을 갖고 알렉산드리아 상부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했다. 알렉산더의 후계자로 자신도 알렉산더와 같은 역작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프톨레마이스로 그리스에서 도착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알렉산드리아에 비할바는 아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를 또 다른 그리스로 바꾸려는 의도로 보였지만 그는 페르시아처럼 우악스럽게 이집트를 변모시키려하지는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그리스에 못지않은 문화를 갖고 있는 이집트 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종교와 전통을 인정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그와 같은 생각을 견지하였다.

이집트인들도 자신들의 전통을 존중해주므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크게 반발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이집트 신들을 화나게 하지 않기 때문으로 이집트인들은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에 두 신을 추가했다. 하나는 알렉산더이며 다른 하나는 오시리스와 아피스의 합성신(合成神)세라피스(Serapis). 우신(牛神), 명부(冥府)의 왕 또는 의술의 신이라고도 생각되었는데 세라피스는 이집트에서 전통적으로 멤피스에서 숭배되었다고 알려진다. 그곳에는 세라피움이라는 신전(神殿)이 있었다고 하는데 프톨레마이오스 1 자신의 왕조의 시초를 특징짓기 위해 세라피스 숭배를 차용하여 이를 범용적으로 활용하자 이집트인들이 이를 받아드린 것으로 추정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세라피스 신의 중심지로 정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세라피스를 그리스식으로 제사지냈는데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도 숭배했다고 한다.

풍양신(豊穰神)으로서 디오니소스와 동일시되기도 하고 태양신에 비교되기도 하여 지중해 지방에까지 퍼졌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리스와 이집트를 모두 통치하였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이집트의 전통을 규제하지 않았지만 관공서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학자들은 300년이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탱했는데도 이집트의 기본적인 행정구조는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고 설명한다.

이집트는 상당 부분에서 통제된 경제를 갖고 있었다. 이집트 땅의 대부분은 왕의 소속이었으므로 나무를 사용하거나 돼지를 키우려면 허가가 필요했다그러므로 기록이 중요해 모든 토지를 조사하고 가축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이는 세금을 받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