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알렉산드리아를 세계적 위상으로 올려 놓은 것은 고대 세계를 아우르는 문화의 중심지라는 점이다. 로마 시대에 50에서 100여 만명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당대의 그리스와 이집트 문화를 융합시키는데다 경제적으로 당대의 윤활유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핵심 장소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보다 유명하여 파로스 등대를 제치고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로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자존심과도 같은 존재였다. 도서관이 대학교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여하튼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은 광대한 문화의 장소로 고대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의 창고로 인정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는 알렉산더 대왕의 소마를 알렉산드리아에 안치하자마자 알렉산드리아를 아테네와 같은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 새로운 세력들의 원래 출신지는 그리스 반도였다. 그리스는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명도 그리스에 못지 않았다. 단지 너무나 오래되어 구태의연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크기가 작은 그리스보다는 모든 면에서 이집트의 환경이 월등하게 좋다는 것을 알았다.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점령자인 그리스인들이 곧바로 이집트의 전통을 무시하거나 훼손한다면 결국 전례에 따라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집트인들을 장기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그리스인들이 선진 문명을 갖고 있는 문화 민족이며 함께 잘 살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그대로 인정하되 새로운 그리스 문명을 이집트인들에게 접목시키려고 시도했다. 건축가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네에 있는 뮤즈 신의 전당과 유사한 건물을 건설한다. 이 건물이 건설되자마자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얻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다. 일부 학자들이 도서관보다 박물관이라는 명칭이 보다 적합하다고 주장하지만 이곳에서는 보편적으로 불리는 도서관으로 설명한다.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는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걸으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도서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해 도서관은 연구원, 작가, 학생, 교수들의 전당이 되었고 도서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국가의 지원을 받고 연구와 공부에만 정진할 수 있었다.
4세기 말의 주교인 에피파니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지구 위의 모든 왕과 통치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고 적었다.
‘모든 저자들, 즉 시인과 산문 작가, 수사학자와 소피스트, 의사와 예언자, 역사학자와 기타 다른 모든 저자들의 작품을 나에게 보내주시오.’
기원전 240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소테르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도서관을 위해 구입이 가능한 자료는 그리스 본토에 있는 것을 포함하여 모두 구입하라고 지시했다. 갈리마크에 의하면 당시 도서관에 보관된 자료는 40만 권이 되며 종류로는 9만 종이 되는데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모든 자료가 색인되었다고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더욱 더 고서나 진귀한 책들을 구입하는데 자금을 아끼지 않았다. 주변국 왕들에게 책을 빌려 복사본을 만들었으며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학자들의 책 원본을 상당수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그리스 비극을 좋아하여 비극이 쓰여진 책들은 모두 알렉산드리아에서 보관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의지는 2세기의 의사이자 의학전문저술가인 갈레노스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항구에 들어오는 모든 배를 수색하고 이때 발견된 책들을 압류하여 그것을 베낀 뒤 주인에게는 원본 대신 복사본을 주도록 명령했다.’
이집트는 알렉산드리아 뿐만 아니라 각지에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들을 '책의 집, '서적의 집' 등으로 신성한 의미로 사용했다. 이집트는 역사가 오래되므로 다른 지역의 도서관과 다소 차별화되는데 이는 현대 기록 보관소와 유사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관하는 박물관의 역할도 함께 했다는 점이다.
고대 왕국부터의 자료들도 체계적으로 관리 보관했는데 여기에는 이집트의 전통적인 종교에 관한 각종 주문이나 마법이 포함되었고 특히 행정에 관한 문서들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정부와 파라오의 편지에 관한 새로운 자료는 정기적으로 추가되었다.
알려지기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보관한 두루마리가 50만에서 70만권이나 된다고 하는데 도서관에서는 누구나 들어와 자료를 보거나 복사할 수 있게 배려했다고 한다.
이들 자료는 지중해, 아테네, 로도스와 같은 도시에서 구입했고 공식적으로 각국 정부로부터 자료를 기탁받았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는 선박의 경우 휴대한 책들을 압수하여 도서관에 송부했다.
도서관은 수많은 두루마리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비극시, 코미디, 역사, 의학, 수사학, 법학 등의 장르 섹션으로 분류했다. 사서들은 단순히 텍스트를 분류하고 책, 장, 번호 매기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료에 변경사항이 생길 때마다 이들을 여백에 기록했다. 예를 들어 연극이 언제 어디서 공연되었는지 등의 정보다.
때때로 간단한 비평도 추가되었으며 저자와 주요 작품에 대한 간략한 안내를 담은 미니 백과 사전도 작성되었다. 특히 텍스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전문 학자들도 자리잡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재난을 받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텍스트들은 어떤 연유로든 상당수가 살아남아 후세에 전해졌다. 특히 많은 자료가 콘스탄티노플의 도서관에 전달되었고 이들이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가 각종 자료로 사용되었음은 인류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이집트를 장악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부터 후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진 업적은 대단한데 이 중 현대인들이 당시 연구원들의 과학적 연구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원추곡선론』을 쓴 아폴로니오스, 처음으로 성좌도와 목록을 만든 히파르코스, 최초의 증기기관을 연구한 헤론 같은 사람들이 이곳 출신이었다. 아르키메데스도 시라쿠사로부터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공부했으며, 자주 박물관과 서신으로 왕래했다. 헤로필로스는 가장 위대한 그리스 해부학자의 한 사람이었는데, 직접 생체해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하나는 에라토스테네스다.
원래 지구의 크기를 측정하려는 시도는 에라토스테네스보다 먼저 디카이아르코스(Dikaiarchos)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나 그의 지구 둘레 측정결과는 상당한 오차가 있었는데 그는 실제보다 1만 킬로미터나 차이가 나는 약 5만 킬로미터다.
대략 기원전 280년에서 196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에라스토테네스는 아테네에서 공부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알렉산드리아로 초빙했다.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원전 234년에서 죽을 때까지 도서관의 관장으로 봉직했는데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지구 둘레를 측정하는 것이다. 그가 그전의 사람들과 다른 것은 실제 측정을 통해 지구의 크기를 산정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의 노력에 의해 정확한 경도가 확정됐고 제도법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는 상이집트의 시에네에서 수직 분수 안의 물이 하지나 동지 정오때 태양 광선이 완전히 비춘다는 것을 알았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더 나아가 시에네가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경도 위에 위치한다고 가정했다. 실제로 두 도시의 경도는 2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그는 왕실 소속의 측정사들로 하여금 시에네에서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는 거리를 걸어서 측정하여 두 도시의 간격이 5천 스타디온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에서 안에 수직 지침이 고정된 속이 빈 금속 공을 세우게 한 후 태양 광선의 각도를 읽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하지의 정오에 90도 각도와 7.2도 차이가 남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그는 7.2도가 공의 각도의 50분의 1이고 두 도시 사이의 간격이 5,000이므로 지구의 직경은 25만2,000스타디온이라고 추정했다. 이것은 실제의 직경과 50마일 이내 오차로 정확함에 놀랄 것이다.
에라스토테네스보다 약간 선배인 유클리드야말로 알렉산드리아를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 중에 한 명이다. 그는 『기하학 원론』을 써서 오늘까지도 모든 민족과 세대의 수학교사라 일컬어진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 수학자에게 기하학을 이해하는데 『기하학 원론』보다 좀 더 간단한 길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유클리드의 대답은 간명했다.
‘기하학에 왕도는 없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영광인 도서관은 부침이 심했다.
재정문제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박물관은 소위 왕립 시설이므로 이집트 왕이 모든 교수와 연구원을 임명하고 봉급을 지급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화되면서 이의 유지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특히 이집트의 신관과 종교의 발전이 학자들의 연구 정신을 사라지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 한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들이 최소한의 재정지원을 계속했으므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7세(기원전 144~116 재위)때에 위기를 맞이한다.
프톨레마이오스 7세는 아들과 불화가 일자 그를 살해한 후 시체를 잘게 잘라 자신의 며느리에게 보냈다. 그의 잔인한 행동에 분개한 아들의 측근들이 반란을 일으켜 도서관으로 몰리자 프톨레마이오스 7세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을 불지르라고 명령한다. 포위된 반란군이 불 속에서 튀어나오자 그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살해했다.
이 사건은 엉뚱한 일로 비화한다.
프톨레마이오스 7세의 방화로 수많은 자료들이 분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각국에서는 자신들의 국가에 있는 도서관이 세계 최고의 명성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곤 확장 공사를 벌이기 시작한다.
특히 에게 해에서 25.6킬로미터 떨어진 미시아 지방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 도시인 페르가몬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보다 더 거창한 도서관 건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수많은 자료가 파손된 알렉산드리아로선 다른 지역의 열정적인 도서관을 단기간에 따라 잡기는 다소 버거운 일이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관리들은 페르가몬 도서관을 비롯하여 각국의 도서관 확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묘안을 찾아냈다. 당시에 사용되던 책은 이집트가 독점적으로 생산하고 있던 파피루스로 만들었는데 바로 이 파피루스의 수출을 전면 금지한 것이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책을 만드는 파피루스의 공급을 중단하면 외국인들이 더 이상 책을 만들 수 없을 것으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의 이러한 계교는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간다. 각 국에서 책을 만들던 파피루스의 구입이 불가능하자 대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책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책이 파피루스보다 더 질기고 사용하기도 편리하다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페르가몬을 뜻하는 파르슈멩이라는 이름의 양피지는 곧바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집트의 수출 제1호였던 파피루스는 그때부터 큰 타격을 입고 판로를 잃어버린다. 세계인들이 공유해야 할 지식 정보를 얕은 꾀로 봉쇄하려던 시도가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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