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4)

Que sais 2021. 1.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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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대화재>

도서관은 로마인이 점령했을 때에도 계속 그 영광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가 이집트에 상륙했을 때 도서관은 또 다시 철저하게 파괴된다고 알려진다. 그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할 때 부하들이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이 주제는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과연 시저가 정말로 당대 최고의 도서관을 파괴했느냐이다. 당대 세계 최고 문화재를 파괴한 장본인 즉 '고대 세계의 가장 큰 재앙'을 갖고 온 사람으로 시저를 거론하는 것이 껄끄럽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카이사르에게 원인이 있다.

기원전 48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시를 점령하는 동안 항구에서 엄청난 이집트 함대를 발견하고 그의 부하들에게 이집트 선박에 불을 지르도록 했다. 그런데 불이 번져 창고 및 일부 무기고가 포함된 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의 일부로 퍼졌고 이때 인근에 있던 도서관도 화재로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극작가인 세네카(Seneca)는 기원전 63년에서 14년 사이에 쓰여진 리비(Livy) 로마 역사를 인용하여 카이사르가 시작한 불로 40,000여 개의 두루마리가 파괴되었다고 적었다. 역사가 플루타르크 역시 화재로 '대 도서관'이 파괴되었다고 언급하여 이 문제는 시저의 귀책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로마 역사가 디오카시우스(165235 년경)는 화재로 인한 창고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소 다른 내용을 적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사라진 도서관(The Vanished Library),에서 거대한 도서관 자체가 아니라 수출을 기다리는 항구 근처 창고에 보관된 사본이 파괴되었다고 적었다.

금욕적인 철학자인 스트라보는 기원전 2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시저의 방화사건과는 단 2030년 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궁의 일부'라고 설명하는 박물관을 언급하지만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다는 도서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거론될 정도로 거대하고 유명한 도서관이 파괴되었음에도 스트라보가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학자들은 다소 타협한다. 도서관이 박물관의 부속이라면 스트라보가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박물관이라는 용어 자체가 도서관을 의미한다는 뜻으로 박물관이 건재한 것으로 보아 당시 파괴된 도서관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처럼 대형 사건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그야말로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현대 학자들은 후자의 견해에 손을 들어준다. 즉 도서관이 완전 파괴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당대 로마의 유명한 지식인 키케로시저를 방문했을 때 그에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가져온 몇 권의 책을 주었다. 그런데 만약에 당시에 도서관이 파괴되었다면 그 사실을 키케로가 자신의 글에 적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것은 키케로가 클레오파트라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글에서 도서관의 파괴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볼 때 당시에 시저가 도서관을 정략적인 면에서 태웠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불탄 것은 아니라 도서관의 상당부분이 건재했을 것임을 유추케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 후 거의 300여 년 후인 273년에 로마의 황제인 아우렐리아누스와 제노비아 여왕 즉 로마의 식민지였던 팔미라의 여왕과의 전쟁이 발발했는데 전투가 알렉산드리아의 궁정 부근에서 일어나 도서관은 또 한 번 철저하게 파괴된다.

그러나 도서관의 가장 큰 파괴 원인은 역시 로마시대에 도입된 기독교 때문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신들을 믿는 그리스인들의 사고 자체를 이단시하여 그리스 시대의 지식을 전파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특히 기독교가 국교로 되자 우선 도서관의 예산을 줄이고 학자들과 학생들을 축출했다. 도서관의 예산은 줄어들었지만 고집스러운 학자들에 의해 명목만은 유지되었는데 640아랍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주인이 바뀌고 만다.

이때 피라미드 안에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지도와 보물을 찾기 위해 피라미드 속을 뚫었던 칼리프 알 마문(812833 재위)은 누구보다 책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어 도서관에 보관된 엄청난 자료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학자들과 함께 바그다드로 보냈다. 이 당시에 도서관의 자료들이 바그다드로 이송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장서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유명한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알려 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덕택이다.

 

<고대 세계의 도서관>

고대 세계에서 도서관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여 알렉산드리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고 파피루스 수출을 봉쇄하자 오히려 도서관 건립이 활성화되었다고 했는데 고대 세계에서 통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도서관이다. 한마디로 당대의 최고 도시라 해도 도서관이 없다면 저명 도시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테네, 콘스탄티노플, 에페소스거대한 도서관이 있었고 수메르와 아시리아에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보다 년대가 훨씬 상회하는 중동에 대해 설명한다.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 있었던 아시리아 궁전 도서관, 일명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은 기원전 7세기에 건설되었는데 이곳에 무려 30,000개의 점토판이 보관되었다고 알려진다.

설형 문자로 된 점토판에 신들을 찬양하는 내용은 물론 신화와 판결, 일상 내역들도 적혀있는데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복사하거나 기부, 또는 정복으로 획득한 것 등이다. 이들은 체계적으로 관리 색인이 붙었고 봉인되었다.

도서관은 니네베뿐만 아니라 바빌론, 칼후, 시파, 우루크에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각 도서관에서 사본 만드는 것을 장려했다는 점이다. 도서관에서는 현대의 도서관이나 연구소의 기능처럼 텍스트를 참조하고 복사하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현대와 마찬가지로 전문 내역을 연구하는 전문 학자들을 초청하여 강의를 했고 도서관은 지식인들이 모여 동료나 방문객들과 여러 가지 문제들을 논의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당시 국내외의 학자들이 텍스트의 사본을 만들어 각지에 전파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는 이들의 텍스트가 되도록 널리 전달되어야만 당대에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식 즉 주문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도할 수 있으며 더불어 수학 및 천문학 분야의 학술적 발견, 의학 및 예언 등을 올바르게 읽어야만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도서관은 일반인들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 학자들의 전용이었다. 대부분의 도서관은 신성한 사원과 결합되거나 행정부 또는 왕실 기록 보관소의 일부였다. 그러나 도서관이라는 특성 즉 자료를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는 목적을 갖고 있으므로 오늘날 도서관 기능처럼 자료를 외부로 가져갈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당대의 자료는 기본적으로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파피루스, 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 밀랍 또는 점토판이다.

파피루스 두루마리68미터 길이가 표준이며 때로는 양면으로 글을 적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열로 작성하는데 추후에 여러 내용을 삽입하기 위해 넓은 여백을 비워 두었다파피루스를 보다 오래 보존하기 위해 삼나무 기름을 발라 벌레를 막았고 나무막대기로 감싼 형태로 보관했다.

가죽 두루마리는 재료를 무두질하여 만들거나 양피지의 경우 슬레이크 슬라임에 담근 다음 경석을 사용하여 긁어내고 다듬었다로마 시대에는 양피지를 가죽 끈이나 스티칭으로 묶어 코덱스 책을 만들었으며 때로는 가죽이나 나무로 된 덮개를 사용했다.

코덱스(codex)란 현대의 책과 비슷한 형태로 낱장을 묶어서 표지로 싼 것을 의미하며 인쇄되지 않고 사람 손으로 씌여진 옛날 책들을 가리킨다. 대체로 로마의 발명품으로 인식하며 두루마리를 대체했는데 유라시아 문화에서 책의 형태로 등장했다. 기술적으로 보면 오늘날의 거의 모든 책이 코덱스다.

코덱스가 고대 시대에 많이 활용되고 더 많은 자료를 삽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특정 구절을 보다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선반 공간을 덜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도 마찬가지다.

다소 놀라운 것은 로마시대. 로마시대에는 각지에 있는 공공도서관에서 모든 로마인들이 원하는 대로 방문하여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도서관마다 보관된 자료에 대한 색인도 마련되어 있으므로 이를 찾아 읽는데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스 도서관은 이집트와 연계되므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당시 그리스 도서관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대변되는데 자료에 의하면 이들을 기원전 5세기경부터 아테네의 시장에서 자유롭게 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유명한 수집가 중에는 사모스의 폭군 폴리크라테스(재위 기원전 538522 년경)가 알려지는데 그는 기원전 6세기 경의 사람이다. 또한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네의 도서관에 크게 기여했으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알렉산더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당대 아테네에서 가장 저명한 수집가였다고 하는데 사실 그의 방대한 저술은 이들 자료에 의했음은 물론이다.

그리스의 헬레니즘 지도자들이 도서관을 중요하게 인식한 것은 도서관을 자신들의 통치 방법의 일환으로 보고 도서관 활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도서관을 다니는 것이 명성을 올리는데 도움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작품을 도서관에 제출하거나 특정 작가를 공개적으로 후원하여 그리스인들로부터 눈도장을 받았다. 물론 그리스 즉 헬레니즘 권의 도서관은 아테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펠라안티오크, 또한 아탈리드가 만든 페르가몬도 일익을 담당했는데 페르가몬 도서관에는 무려 200,000여개의 두루마리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