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5)

Que sais 2021. 1. 2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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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스 등대의 건설

알렉산드리아의 쌍벽인 도서관을 지나 세계 7대 불가사의인 파로스 등대에 대해 설명한다.

예로부터 지중해 사람들은 선원들을 인도할 수 있는 거대한 기념물을 항구에 세웠다. 주로 엄청난 규모의 거상이나 먼 곳에서도 보이는 신전 건물로 또 다른 세계7대 불가사의인 로도스의 거상도 엄밀한 의미에서 파로스 등대와 거의 같은 의미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러한 건물이나 거상이 항해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배들이 낮에만 도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밤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선박들의 선원이 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280년경에 파로스 섬에 고대 역사상 가장 높은 등대를 건설하게 된 이유이며 필론의 세계7대 불가사의 중에서 유일하게 실용적인 기능을 갖게되는 이유다.

당시 이집트는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하고 그의 부하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통치하기 시작한 지 5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집트를 직접 통치하고 있던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에게 자신들의 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 어떤 거대한 기념물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파로스 등대다. 로마의 한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2, 즉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의 아들은 이집트에 자리를 잡은 후 전 세계를 밝히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의도로 로마의 정복자들도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와 같은 큰 등대를 오스티 항구의 근처에 세웠다. 이 건물들은 당시의 건축 기술을 모두 동원한 걸작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항구 앞에 건설된 파로스 등대의 높이가 100미터나 되는 거대한 건물이 된 것은 신생국가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굳건하게 만들려는 의도에 상선들의 통행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실용적인 면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거대한 등대가 수많은 배가 통행하는 알렉산드리아항에 절대적이었다는 뜻이다.

파로스 등대는 디노크라테스의 프로젝트로 알려지는데 건설에 착수한 것은 기원전 290년경이며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의 건축가인 소스트라토스가 지휘했다고 알려진다. 건축가이자 기술자로 재능이 있는 소스트라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통치하는 기원전 280년에서 279년 사이에 파로스 등대를 완공시켰다.

파로스 등대가 세워진 파로스 섬은 바위가 돌출되어 모든 곳에서 잘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섬이라고는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파로스 섬은 등대가 건설될 때 이미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는 1킬로미터의 방파제가 연결되어 있어 육지나 마찬가지였다. 이 방파제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와 파로스 섬은 두 개의 천연적인 항구로 변모했다. 좌측의 위노스토스 항구는 접근이 비교적 어려워 정박지로 사용되었고 주요 통상로는 오른쪽의 마구누스 항구였다. 이 항구의 끝에 파로스 등대가 건축된 것이다.

그러나 근래의 자료에는 소스트라테스는 건축가가 아니라 등대 건축을 의뢰하고 그 비용을 지불했던 외교관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건물에 통치자인 왕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에 건축가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데 이에 대해 학자들은 소스트라토스가 파라오급으로 파로스 등대 전체를 책임졌지만 그를 건축가로 소위 강등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파로스 등대를 건설한 건축가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다는 뜻이다.

당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파로스 등대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가장 분주하고 부유한 알렉산드리아 항을 육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계획도시이므로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으로 세심하게 설계되었으므로 무역항으로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집트의 고대 도시들을 등진 채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는 알렉산드리아는 상인들을 후원해 아일랜드에서 인도까지 아우르는 교역 활동을 펼쳤으므로 항구에는 투자가, 모험가, 철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알렉산드리아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국제적인 도시가 된 것은 파로스 등대의 역할이 작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로스 등대의 위치

거대한 파로스 등대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는데 막상 등대가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일반적으로 등대는 마구누스 항구의 끝에 세워졌다고 알려졌지만 고고학자들은 이 주변에서 어떠한 등대의 잔해도 찾지 못했다.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파로스 섬의 등대에 대한 잔해가 전혀 없는 이유를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측하고 있다. 파로스 등대의 흔적을 현재도 세워져 있는 카이트 베이 성이 삼켰다는 것이다.

이 성은 1477술탄 카이트 베이가 파로스 섬의 북동쪽에 세웠다. 학자들은 카이트 베이 성 중에서도 소탑을 파로스 등대의 기초 위에 세웠다고 추정한다. 소탑은 사각형인데 한 변의 길이가 거의 31미터(100피에)로 파로스 등대의 한 변의 길이와 거의 같은 값이다.

카이트 베이가 요새를 건설하라고 명령한 지 2년 후에 현장을 들렸던 독일의 여행가인 투처의 여행기를 근거로 1909년에 독일의 고고학자 레르만 티에르쉬가 파로스 등대를 모형으로 복원했다. 가장 잘 알려진 파로스 등대의 모습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수중 발굴팀에 의하면 파로스 등대는 독일인 티에르쉬의 복원도와는 다소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파로스 등대가 전적으로 그리스 스타일을 답습한 것은 아니라 이집트의 전통도 도입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이집트에 많은 신전을 건설했으므로 이집트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파로스 등대는 석회석과 대리석뿐만 아니라 아스완에서 화강석을 운반하여 시공할 만큼 시공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건축 기술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석조기술도 여러 곳에서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프랑스 수중 발굴팀의 조사에 따라 새로운 모습의 등대를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파로스의 등대가 바빌론의 성벽을 밀어내고 세계의 7대 불가사의로 뽑힌 것은 기원전 3세기에 30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가 고층 건물을 본격적으로 세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부터다. 르네상스 시대를 걸쳐 과학기술이 발전하자 고대에서 가장 높다는 건물을 어떻게 건설했을까하는 호기심이 절로 일어났고 파로스 등대에 대한 전설은 더욱 높아졌다. 결론을 말하면 파로스 등대를 건설할 때 100미터나 되는 건물을 건설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다.

 

봉화대의 위치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는 등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봉화대의 위치가 과연 어디인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을 것이며 연료는 나선식 램프로 꼭대기까지 올려졌을 것은 틀림없다.

이와 같은 문제가 제기된 것은 최정상에 포세이돈의 대형 조각상이 설치되었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했기 때문이다. 전설처럼 원형 돔 위에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었다면 밑에서 불을 지필 때 조각상들이 불에 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원형 돔이 기둥으로 지지되어 있다면 바다에서 불이 기둥에 가려지는 단점도 있다.

파로스 등대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전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발견되었다.

원형 돔 위의 조각상은 오랜 기간 동안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일부 학자들이 제우스신이라고 주장했다. 곧바로 조각상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지금까지의 정설은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대형 조상이 원형 돔 안에 있었고 그 주위로 조그마한 조각상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원형 돔의 지붕 즉 등대의 최상부에 봉화대가 있고 그 하부의 주위로 조각상들이 설치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등대의 최옥상에 횃불이 있다는 것도 지적감이다.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머리 위에 횃불을 놓는다는 것은 당시의 믿음을 감안할 때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횃불은 옥상 아래의 적절한 장소에 작은 기둥으로 지지되는 봉화대와 같은 형태로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파로스 등대의 수난

등대는 피라미드를 제외한 다른 불가사의와는 달리 비교적 후대까지 잘 운영됐다. 796년에 3층 부분이 파괴되자 술탄 이븐 툴런(868884 재위)돔식의 모스크를 세웠다. 956년의 지진으로 높이가 22미터 정도 줄어들었고 1100년에 또 다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 많은 부분이 손실됐다. 1166년에 아불 아가그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유적을 보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등대는 도시의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섬에 세워진 것이다. 거대한 등대를 건설하기 위해 견고한 방파제가 건설되었다. 이 방파제는 600피크(324미터)길이와 20피크(10.80미터)의 폭, 바다 수면으로부터 3피크(1.62미터)의 높이를 갖고 있다. 바다는 잔잔하지만 약간이라도 파도가 높아지면 방파제를 덮어버린다. 그러나 겨우 발목 정도까지만 잠기므로 물 속으로 걸어서 등대까지 도착할 수 있다.

등대는 섬의 끝에 세워졌는데 건물은 45브라스(1브라스는 1.83미터) 각으로 되었다. 등대의 문은 열려져 있었다. 비탈길이 그곳으로 연결되었는데 길이는 100브라스 정도였으며 궁륭으로 된 장소까지 이어진다. 한 기사가 이 궁륭의 밑으로 들어갔지만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어 우리들은 문을 통하여 40브라스를 걸어갔다. 여기에서 왼쪽에 닫혀진 문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무엇에 사용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60브라스를 더 걸어갔더니 열려진 문이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갔더니 한 방이 있었고 또 다른 방이 계속되었는데 방의 숫자가 무려 18개나 되었다. 우리들은 복도를 계속 걸었으며 드디어 등대의 첫 번째 층의 마지막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계단이 없었고 낮은 경사의 경사로가 있었으며 주위에는 많은 조각들이 있었다. 1층의 플랫폼 위로 건물이 계속되었는데 형태는 8각형으로 각 변은 10브라스였다.’

 

등대가 파괴된 이유에 대해서는 지진뿐만 아니라 다소 황당한 전설도 있다. 알렉산드리아가 아랍인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다.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이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려고 하자 문제점이 생겼다. 파로스 등대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함선으로 접근할 때 발각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파로스 등대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 바로 파로스 등대를 없애는 것이다.

묘안을 생각해 낸 기독교인들은 아라비아의 칼리프에게 친선 사자를 보냈다. 친선 사자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등대 밑에 이집트의 금은 보화가 가득 차 있다고 거짓소문을 낸다. 이 말을 들은 칼리프는 등대를 철거하고 보물을 찾아내라고 명령한다. 그의 명령으로 등대는 철저하게 파괴되기 시작했는데 절반 정도 파괴되었을 때 칼리프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중지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때가 너무 늦었음은 물론이다.

이 때 파로스 등대의 유명한 반사경이 파괴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에 아랍인들의 과학 기술은 매우 발달하여 이 등대에 설치한 반사경에 비친 불길은 50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였으며 맑은 날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애석하게도 어떤 원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하튼 파로스 등대는 계속 수난을 당한다. 1261년에는 다시 지진이 강타하여 거의 모든 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72년 유명한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이 재건을 명령하여 등대로서의 임무는 계속되는 듯했다. 그러나 130388일에 일어난 강력한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이 지진은 그리스는 물론 전 이집트의 델타 지역을 강타했다.

그 후 등대의 운명은 급격히 추락한다. 마그레브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1326년 이곳을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등대를 보기 위해 그곳에 갔다. 그리고 946년과 1306년에 일어난 강력한 지진으로 파괴된 폐허 속에서 등대의 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것은 매오 높은 사각형 건물로 문이 땅 위로 올라와 있었다. (중략) 문 안쪽에는 등대지기의 숙소가 있었고 등대 내부에는 방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이븐 바투타1329년에는 등대의 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1346년 두 번 째 방문했을 때는 파로스 등대가 완전한 폐허로 변해 그 안으로 들어간다거나 문에 오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한 이집트 기록에 의하면 1375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남아 있는 등대의 외벽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등대가 건설된 지 1650년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