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가 비바람은 물론 천둥과 벼락을 만드는 신이라고 믿었다. 벼락은 하늘에서 내린 신의 징벌로 생각했으므로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도시마다 제우스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들라면 고대 올림픽 경기의 온상지인 올림피아로 세계 7대 불가사의인 거대한 제우스 신상이 있던 곳이다.
올림피아에서 제우스 신상을 건립하게 된 이유는 올림피아가 고대 올림픽이 열린 장소이기 때문이다. 먼저 고대 올림픽에 대해 설명한다.
<전쟁도 중지시킨 올림픽>
고대 올림픽은 각 도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펼쳤던 스포츠 제전이지만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 행사로 그리스 특유의 도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기량을 펼쳐 자신과 도시 국가의 명예를 높인 것은 물론, 시와 음악까지 겨루었던 종합 문화 행사였다. 특히 올림픽 기간에는 전쟁도 중지하여 평화와 정의를 추구했던 유일한 행사였다.
제우스신에게 바쳐진 알티스 지역에서 사람들이 살던 시기는 무려 기원전 3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올림피아 사람들이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했지만 기원전 1000년경부터 제우스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보다 보다 유명한 신 즉 신 중에서 신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의 주된 성역으로 알페이오스(Alpheios) 강과 클라데오스(Kladeos) 강이 만나는 합류점에는 삼각형 모양의 충적지가 펼쳐져 있다. 올림피아 는 이 충적지 위로 뻗은 크로니온 산(Kronion Hill)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이 지역에는 헬라스 시대에 크로노스(Kronos)·갈라(Gala), 그 밖의 여러 크토니아(Chthonia)의 신들에 대한 숭배 장소와 펠로폰네소스라는 이름을 남겨준 영웅 펠롭스(Pelops)에 대한 숭배 장소, 그리고 펠롭스가 오이노마오스(Oenomaus)와의 전차 경주에서 승리하여 차지한 그의 딸 히포다메이아(Hippodamia)의 숭배 장소들이 차례로 세워졌다. 기원전 10세기에 올림피아는 제우스신을 숭배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올림피아’라는 이름은 본래 숲이 우거진 이곳의 계곡을 일컫는 말에서 유래하고 제우스가 살고 있는 신성한 산 올림포스를 가리키며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도시 국가 피사(Pisa)와 그 후 엘리스의 보호를 받은 올림피아의 성역은 4년마다 한 번씩 이곳에서 열리던 고대 그리스 세계의 경기로 기원전 8세기에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통상적으로 학계에서는 엘리스 출신의 요리사 ‘코로에부스’가 200야드 경주에서 우승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기원전 776년을 올림픽 경기가 열린 최초의 기념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로 그리스 신화의 전쟁 영웅 아킬레스가 기원전 1250년에 트로이 전투에서 개선한 파트로클로스 장군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올림픽을 열었다는 것이다.
초기에 고대올림픽의 경기 종목은 경기장 끝에서 끝까지 달리는 단거리 경주 뿐이었다. 이때 선수들이 달린 거리를 1스타디(유적을 발굴한 후 실측에 의하면 192.27미터로 스타디움의 어원이 되었음)라고 한다. 기원전 724년 제 14회부터 경기장을 1왕복하는 경주, 기원전 708년 제18회부터 레슬링과 5종경기(멀리뛰기, 창던지기, 단거리경주, 원반던지기, 레슬링) 등 점차 경기 종목이 늘어나 전성기에는 13종목까지 늘어났다. 기원전 632년 제37회부터는 소년 경기가 추가되었으며 기간도 5일로 늘어났다.
여기에서 가장 인기를 끈 경기는 달리기와 전차 경주였다.
영화 「벤허」에서도 주인공 벤허와 메살라가 운명을 걸고 전차경주를 하는 장면이 압권이었는데 그리스 시대에도 말 네필이 끄는 전차경기가 올림픽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40여 대의 전차가 삼각형의 뱃머리처럼 생긴 출발 게이트에 세워진 후 지면에 묻은 2대의 기둥 사이를 12번씩 왕복했는데 달리는 거리는 약 14킬로미터였다. 네 마리의 질주하는 말이 끄는 전차였으므로 돌기둥을 돌 때 가장 위험하였고 서로 충돌하거나 전복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끝까지 사고를 내지 않고 경주하는 전차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흥미있는 것은 전쟁과 관련이 있는 나팔수와 전령들을 위한 경기도 열렸다. 올림픽 경기는 4년마다 정기적으로 개최되었으며, 경기와 경기 사이의 4년 동안을 의미하는 올림피아드는 그리스 세계에서 사용되는 연대 표시 단위와 체계가 되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선수들과 관람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대회 기간을 중심으로 앞뒤 3개월 동안에는 전쟁을 중지했다. 도시 국가마다 각각의 신을 섬기던 그리스인들은 올림픽이 개최될 때면 각지에서 몰려들어 신전에 참배하고 제사를 지냈다. 일반적으로 이런 종교의식 못지 않게 예술문화행사도 병행하여 열렸다. 올림픽이 열리기 3개월 전에는 그리스 전역에 휴전이 선포되었고 이를 어긴 도시국가엔 벌금을 물렸다.
실제로 스파르타는 제 90회 올림픽 직전에 전투를 벌였다가 주최 도시 엘리스로부터 벌금을 부과 받았으며 벌금 납부를 거부하다가 제명까지 당했다. 다시 말해 고대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하나의 평화 행사였다. 초기에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 출신만 경기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기원전 146년 이후부터는 로마와 주변 국가의 선수들도 경기에 참가했다.
페르시아 전쟁 중에도 올림픽이 열렸고 그리스 내전이라고 볼 수 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도 올림픽 경기는 열렸다.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도시국가 안에서 어떤 논쟁이나 충돌도 금지되었고 재판도 중지되었으며 사형도 연기되었다. 단 그리스의 어느 도시든 참가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리스인이어야 했으며 외국인은 참가할 수 없었다.
고대 올림픽은 로마 시대 때도 계속 열렸다. 로마 시대 때는 경기의 종류가 더 늘어나 달리기와 레슬링 같은 스포츠 외에도 음악과 문장을 창작하는 종목까지 추가되었다. 잘 알려진 로마 황제 네로는 스포츠와 음악 등에서 7개 종목을 휩쓰는 실력을 발휘했다고 하는데 황제가 아니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실 그는 마차 경주에서 넘어졌는데도 우승했다. 그의 마차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우승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이유다.
서기 400년경까지 계속되던 고대 올림픽은 언제부터인가 개최되지 않았는데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올림피아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이 원인이라고 추정한다.
개최시기는 7월부터 9월 사이에 5일 동안 계속되었다. 첫 째 날에 근대 올림픽처럼 개막식을 거행하고 2일째부터 4일째까지 모든 경기를 마치며 마지막 5일째 되는 날에 우승한 선수들을 모아 시상식을 한 다음 축제를 열었다. 제전이 계속되는 5일 동안 제우스의 제단에는 100여 마리의 황소가 바쳐진다. 고대 올림픽은 남자들만의 축제로 여자는 참가가 금지되었고 기혼여성은 관람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나체로 경기를 가졌으며 신발도 신지 않았다.
선수들이 나체로 경기하는 관행은 매우 일찍부터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720년 제15회 올림픽 때 달리기에 출전한 메가라의 오립포스가 옷을 벗고 알몸으로 달려 우승을 했는데 심판관들이 이에 대해 별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학자들은 선수들이 알몸으로 출전하는 관행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경기자들이 옷을 벗는 이유는 알몸이 경기하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들이 알몸으로 운동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 배경에는 강한 육체를 자랑으로 여기고 허약한 체격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현대나 과거나 경기에 참가하는 운동선수들의 체격이 남달리 좋았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승자에게 주는 우승에 대한 보상은 제우스 신전 근처에서 자라는 올리브나무의 가지로 만든 월계관이다. 신화에서도 올리브 나무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식용유·등유·화장품 등을 만드는 귀중한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므로 올리브 가지를 함부로 꺾거나 부러뜨리는 행위는 죽을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기 우승자들에게 주는 상금은 별도로 없었지만 여러 가지 특전을 받았다.
우승자의 출신 도시에서는 기념으로 조각상을 세워 주었고 때로는 경기에서 우승한 영웅을 맞아들이기 위해 일부러 성벽에 구멍을 뚫고 그 속으로 들어오게 했다. 특히 일부 도시에서는 우승자를 공적인 행사 때 최상석에 앉게 하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으며 식사도 무료로 제공했고 신처럼 받들어지기도 했으며 명예시민으로 일생 동안 국비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리스 반도의 젊은이들이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승자에게 상금을 주어 승리를 치하하는 관행이 자리를 잡았다. 또한 각 도시에서 참가 예정자들은 훈련을 시작할 때부터 특별보조금을 기부 형식으로 지원받았다. 경기장, 코치, 마사지사, 의사, 요리사 심지어는 훈련 파트너 등도 이 기금에서 충당할 수 있었고 승리자가 되면 승리보상금이 지급되었다.
4년마다 올림픽이 열린 올림피아를 주관하는 엘리스는 고대 그리스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는 아니었다. 다른 도시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알려졌고 또 그 역할을 충실히 했지만 엘리스는 올림픽을 치르는 것이 주임무였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고대 올림픽은 처음 피사탄이라는 도시국가에서 주관하다가 엘리스와 스파르타가 공동으로 주관했으며 나중에는 엘리스 단독으로 주최했다. 피사탄은 올림픽 개최권을 빼앗기자 이를 되찾기 위해 엘리스와 전쟁을 벌였다가 도리어 패해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는 비운을 맛보았다.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 때문에 전쟁을 벌인 결과가 된 것이다.
올림픽은 범헬레네적으로 열려 그리스의 모든 곳에서 선수를 파견했는데 올림피아 이외에도 3곳의 도시에서 제전경기가 열렸다. 아폴로 신전이 있는 델피에서 기원전 586년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4년마다 열렸고, 코린트 근처의 이스트미아에서 포세이돈을 기리는 제전경기가 2년마다 개최되었다. 네미아에서도 기원전 573년부터 4년마다 제우스신을 받들기 위해 제전경기가 열리곤 했다.
당시 막강한 아테네가 올림픽을 주최하지 못한 것은 올림픽까지 아테네가 열 경우 그리스의 도시들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권리를 독점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테네는 매년마다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디오니시 축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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