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모신 성스러운 공간>
올림피아가 고대 그리스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지만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제우스 신상을 제우스신전에 모셔졌기 때문이다.
서북쪽에 프리타니온이라는 제우스 대제(大祭) 때 영빈관으로 사용되던 곳이 있는데 이곳은 평소에는 신관이나 관리인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는데 북쪽에 식당 및 조리장이었다. 올림픽 경기에서의 우승자들이 초대되어 식사를 하던 곳이다.
입구 오른쪽으로는 체육관의 기둥 자리와 팔레스트라가 있다.
팔레스트라는 사방 66미터의 커다란 건물로 레슬링이나 복싱 등 스포츠 운동 연습장이었다. 팔레스트라의 남쪽으로는 신관의 숙소로 사용되던 테오클레온, 서쪽 옆으로는 이로온이라는 영웅을 제사지냈던 신전터가 있다. 이곳에 인접해 있는 것이 ‘피디아스의 작업장’으로 조각가 피디아스가 작업하던 곳이다. 그의 걸작품 제우스 상이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그 앞의 레오니데온이 올림피아에서 가장 큰 건물인 숙박시설이다.
제우스 신전의 남쪽 벽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블레테리온(평의회장) 터가 보인다. 이곳은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선서하던 곳이다. 제우스 신전은 유적지 중앙 부분에 있는데 기원전 47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456년에 완성된 도리아 양식의 신전이다. 길이 64미터, 폭 27미터로 도리아 양식에 기둥 높이는 10미터이며 신전의 높이는 20미터다. 지붕을 받치는 아래쪽 기둥의 지름은 자그마치 2.23m로 어느 신전에 세워진 기둥보다 웅장했다. 처음 완성될 당시에는 거대한 기둥들이 웅장하게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몇 개의 기둥과 기둥이 무너진 흔적만 남아 있다. 제우스신상이 세계7대 불가사의에 포함된 것은 신상 자체가 거대했음은 물론 유명한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황금과 상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신상은 훗날 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로 옮겨졌는데 475년에 일어난 화재로 사라졌다.
제우스 신전 북쪽에 위치한 헤라 신전은 기원전 6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올림피아에 있는 신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제우스 신전보다 130년이나 앞선 기원전 600년경에 세워졌다. 그리스 신전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특히 목조에서 석조로 변혁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원래 기단부만 돌로 되어 있고 벽은 점토 기와, 기둥과 들보는 목재로 지었는데 몇 백 년을 거치면서 목제 기둥들은 석재 기둥으로 교체되었다. 특히 도시국가를 포함한 기부자들의 시대가 각기 다름으로써 건축 양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모는 작지만 헤라 신전은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한국에서 열린 88올림픽도 헤라 신전에서 채화된 성화가 한국에 도착하여 올림픽 기간 내내 불을 밝혔다.
제우스 신전과 헤라 신전 사이에 펠로피온이라는 5각형 건물 터가 있다. 이 펠로프스는 신화에서 미케네 왕 아가멤논의 선조로 올림픽 경기의 창시자로 알려진다. 펠로프스의 묘 위에 이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그의 상과 제단을 놓았다.
“프리타니온‘의 터는 헤라 신전 서쪽에 있는데 지금 그곳은 몇몇 기둥 잔해들만 흩어져 있다. 프리타니온은 기원 전 336년 필립포스 2세가 그리스를 통일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헤라 신전은 그리스에 남아 있는 신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기원전 7세기)로 제우스의 아내 헤라를 제사지내는 곳으로 그 이전에는 제우스신을 제사지냈다고 한다. 헤라신전 뒤로 올림픽 경기장(스타디온)이 나온다. 우측으로 제우스의 제단 터가 보인다. 올림피아에는 70개 이상의 제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 이렇게 많은 제단이 필요한 것은 고대 올림픽 제전의 시작을 희생물을 바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물로는 소나 돼지가 주를 이루었는데 제사 후에는 신관이나 참여자들이 이 제단에 바쳐진 제물의 고기를 먹으며 술을 마셨다. 이 날은 일반인들에게도 고기가 분배되었으므로 제전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때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제단들이 설치된 것이다.
크로노스 언덕 아래로 보물을 보관하는 건물이 나온다. 폴리스나 식민지에서 제우스 신에게 바친 봉납품들을 보관하던 곳인데 제우스 제전에 참가한 각국 사절단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이곳에서 스타디온으로 들어간다.
올림픽 경기장은 올림피아 유적지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경기장으로 들어가려면 조그마한 아치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 아치는 그리스 시대 때 만든 것이 아니라 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했던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것이다. 당시에는 선수와 심판만 아치를 통해서 경기장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경기장은 각 도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경기를 펼쳤던 경기장과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람석, 그리고 심판석으로 되어 있다. 선수들이 경기를 펼쳤던 경기장은 오늘날의 육상 경기장과 비슷한데 바닥에 흙과 작은 모래가 깔려 있다. 달리기 출발 지점에는 선수들이 발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땅을 파 놓은 작은 도랑이 있는데, 오늘날 단거리 육상 경기에서 출발선에 한쪽 발을 받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발판과 같은 기능을 했다. 그리고 달리는 거리는 100미터, 200미터가 아니라 당대의 척도인 1스타디온인 192.3m였다.
올림피아 경기장은 모양과 크기는 물론이고 전체적인 분위기까지도 오늘날의 경기장과 아주 비슷하여 기원전에 만들어진 경기장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레슬링과 복싱같은 투기 종목이 열렸던 곳도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도리아식 기둥 19개가 남아 있는 투기 경기장과 연습장은 달리기 경기가 열렸던 곳과 다르게 실내 경기장이었다.
신전들 주변에는 그 밖에도 다양한 유적지들이 있는데 잘 알려진 곳이 제우스 신전 앞에 있는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작업실이다. 페이디아스는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도 건설한 건축가이자 조각가다. 그리고 페이디아스 작업실 남쪽에 기원전 4세기경에 건설한 숙박 시설인 레오니다이움이 있다. 오늘날 올림픽 경기장 주변에 선수촌이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경기에 참여한 선수와 손님을 위한 숙박 시설이다. 북쪽에는 레슬링과 복싱 같은 투기 경기를 했던 경기장과 각종 스포츠를 가르쳤던 김나지움 유적지가 남아있다.
<신화의 나라 그리스>
인류는 농업 혁명을 무기로 고대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관개시설을 구축했고 새로운 철기 기술로 무장한 도시국가들은 정복전쟁을 통해 제국을 넓혀갔다. 그런데 그 이면에 전쟁과 폭력, 파괴와 건설, 승자독식의 악순환이 멈추질 않았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자연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철학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그리스의 철학은 다른 어떤 문명보다 서양인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인들의 출현은 사실 서양인들이 다른 문명에 대항하여 서양의 정체성을 찾고 문화적 자부심을 갖게 하는 핵심 요소다. 특히 서양 과학사는 그리스의 철학에서 과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1500년경에 걸쳐서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한 크레타문명이 꽃을 피웠다. 기원전 1500년경 크레타 문명이 멸망한 후 해양 민족인 페니키아 인이 기원전 800년경에 아프리카 북안에 카르타고 식민지를 세웠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페니키아 문자에서 그리스인은 알파벳을 만들었다.
그리스 문명은 다른 고대 문명과 같이 중앙집권적인 왕국이 아니라 분산된 도시국가의 집단 형태로 발전했고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이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를 통일할 때까지 느슨한 구조를 유지했다. 그리스의 역사를 둘 로 나누어 알렉산더 전을 헬레나 시대(Hellenic era, 기원전 600~기원전 300년)라 부르며 이후의 시기를 헬레니즘 시대(Hellenistic era)라 부른다.
큰 틀에서 현대 문명의 상당 부분이 그리스로부터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는 헬레나 시대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헬레나는 다른 고대 문명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과학적 이론 즉 ‘자연철학’의 발명이다. 우주에 관한 초기 그리스인들의 생각과 헬레나 시대의 다소 비실용적이라고도 보일 수 있는 추상적인 지식 탐구에서 그리스인들의 과학의 정의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요소를 추가했다. 사실상 자연철학이라는 자체야말로 인류가 현재 누리고 있는 과학 문명시대로 진입하는 계기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 지식인들의 제도적인 지위에 관한 것이다.
헬레나 시대에는 그리스 지식인들에 대한 어떤 국가적인 지원이 없었으며 지식인들을 위한 제도적인 기관도 없었다. 몇몇 중요한 학파들이 그리스 문화에서 출현했지만 그것들은 교육기관보다는 사적인 모임이나 동아리에 가까웠다. 고등교육이나 도서관, 혹은 관측소를 위한 공적인 지원이나 자금은 없었고 당대의 지식인들이 공직에 고용되는 일도 없었다.
헬레나 시대에 그리스 지식인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어느 기관에서 지원을 받지 않은 자연인이므로 자연세계에 관한 일련의 추상적 사변을 발전시키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더구나 이들이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유재산을 소유했거나 개인교사나 의사 또는 기술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그리스의 특성을 공고히 해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의 신화다.
그리스 신화의 기본은 그 이전, 흑해 인근 쿠르간 지역에 살면서 원시 인도유럽어를 사용했던 유목민족의 종교와 신화다. 그네들이 사용했던 언어와 믿었던 신앙은 그리스어와 그리스 신화에도 조금씩 바뀐 채로 이어졌다. 언어학자와 종교학자들은 오랫동안 연구하여 원시 인도유럽어를 사용했던 쿠르간 지역 유목민족의 언어와 기본적인 신화의 뼈대를 어느 정도 알아내었다.
물론 학자들은 그리스 신화가 이집트 신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의 중요성은 주로 '세상은 왜 이런가'를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유명한 영웅 신화 등을 빼면 신들에 의해 바다가 생겼으며, 어떤 동물은 어떻게 생겨났는냐 하는 이야기가 많다. 일종의 현대의 과학과 같이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 어둠, 사랑과 같은 추상적 개념이 신으로 의인화된 경우가 많다. 특히 다른 문명과는 달리 주신들에 의하여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점은 대부분의 고대 신화에서 공통되는 요소다.
그러므로 그리스 신화는 다른 신화에 비해 인간의 행동과 모습을 대변하는 면이 강하다. 제물 바치는 것을 까먹었다고 저주를 내리고 재앙을 내리는 것은 물론 자신의 일을 방해했다고 저승으로 보내기도 한다.
물론 그리스 신화의 면면을 보면 당대의 '상식'이 현대와는 완전히 다르므로 이를 현대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대의 최고 문명이 그리스 신화를 토대로 성장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이를 이해하는 것은 올림픽 등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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