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4) : 고대 이집트 들여다보기(4)

Que sais 2021. 2. 2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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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기 신왕국>

기원전 1550년부터 기원전 1070년까지를 신왕조라고 부른다. 신왕국은 이집트의 전성기로 기원전 15세기경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남쪽으로는 하르툼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했다.

17왕조의 대를 이은 제18왕조의 아흐모세는 약 20년 동안 정복전쟁을 벌여 이집트를 세계의 강자로 부상시킨다. 그를 이은 투트모세 1는 이집트 최초의 위대한 정복자로 누비아의 제4폭포까지 진입하여 완전히 복속시켰다. 근동에서는 미탄니 왕국을 제압하고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를 거쳐 유프라테스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하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이 당시 이집트 역사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동안 견지되던 피라미드를 건설하여 파라오를 매장하는 관습을 폐지하고 암석을 이용한 묘실을 테베 좌측에 건조하였다. ‘왕가의 계곡으로 이곳에 20왕조까지의 파라오들이 매장되었다.

18왕조에서 유명한 사람이 여성으로 진실한 파라오가 된 하셉수트 여왕이다. 그녀는 남자만 파라오가 되는 이집트에서 최초로 실권을 가진 파라오로 소말리아와의 무역로를 열었다. 하셉수트는 거대한 장제전으로도 유명하지만 예루살렘의 솔로몬과 만난 시바여왕으로도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투트모세 3메기도 전투에서 아시아 각국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아시아 현 중동인 시리아레바논 지역 등을 점령하여 신왕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18왕조는 270년을 존속했는데 특히 말기의 아멘호테프 4아케나톤은 이집트 역사에서 유일하게 태양신이자 유일신아톤을 믿는 종교개혁을 시도했으나 이집트를 지탱한 전통 세력에 의해 실패했다. 그러나 이때 이집트에 와있던 이스라엘인들이 그의 유일신 개념을 차용하여 기독 믿음을 창안했다고 설명된다.

파라오의 저주로 유명한 투탕카멘이 아케나톤의 후계자이며 이후 110년간 이어진 제19왕조에서 이집트 영광람세스 2가 등장한다. 그는 오리엔트의 강자인 히타이트와 카데시전투를 벌리고 역사상 최초로 외교 협정을 맺기도 했다. 이집트의 영광으로 불리는 람세스 2세는 할리우드 영화 모세에서 이집트의 파라오로 소개되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집트는 제2122왕조의 하 이집트, 23왕조의 상 이집트로 분열되었다.

이 혼란기에는 바다 민족리비아와 누비아이민족 왕조가 들어섰다. 리비아 출신의 소센크 122왕조, 누비아 출신의 피예25왕조의 파라오가 된다. 이 시기는 오리엔트 지역에서 후기 청동기 문명이 붕괴한 시기로서, 이집트 역시 상당한 시간 동안 국력의 쇠퇴를 겪는다.

누비아 흑인 출신의 쿠시왕조 아시리아와 유대 지역의 패권 다툼에 나섰으나, 아시리아의 에사르핫돈 왕의 침공으로 수도 멤피스와 하이집트 전역이 점령된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이집트와 원거리에 위치한 국가이므로 완전 합병하지 않고 조공을 조건으로 이집트를 인정하여 계속 왕조는 이어갈 수 있었다.

기원전 7세기(664)부터 말기왕조인 제26왕조가 등장하여 약 140년간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아시리아가 완전히 사라진 직후 기원전 525년부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에 완전히 복속된다. 즉 합병되어 직할 통치가 되지만 대체로 이집트의 영토와 종교는 존중받았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제27왕조와 31왕조는 아케메네스 왕조.

이집트는 그리스의 성장과 페르시아의 쇠퇴에 따라 기원전 404~344년까지 제28~30왕조가 짧은 독립기를 누리긴 했지만, 넥타네보 2를 마지막으로 페르시아에 재병합된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하자 이집트는 마케토니아에 점령된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급사하자 그의 방대한 영토는 4명의 부하들에게 분할되는데, 우여곡절을 거쳐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게로 돌아간다. 그가 이집트 최후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조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존 이집트와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32왕조라고 부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인들이 통치했으므로 정통 이집트 국가와는 전혀 다른 국가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스 로마시대>

이집트의 걸친 장구한 역사의 마지막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32왕조는 당대의 지리정치적인 역학상 중요도를 인정받아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알렉산드리아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분명 마케도니아인의 외부 왕조이지만 이집트 토착종교를 존중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이집트가 급속하게 그리스화가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이 시기의 이집트는 상업이 활발하고, 파로스의 등대와 세계 최고의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이 건설되었고 헤론의 초보적 증기기관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명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 시대에는 거대한 함선인 포티를 건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어디까지나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한 외국인 왕조였고, 그들의 통치력의 근간은 강력한 군사력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집트를 탐내는 외부세력과 부단히 전쟁을 반복했는데 결국 기원전 2세기경 군사력 유지에 한계가 찾아오자 당대의 패자인 로마에 의존한다. 로마의 협조로 연명하던 제3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는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기원전, 51~30).

기원전 31년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연합하여 로마의 옥타비우스로마의 초대황제인 옥타비우스에게 대항했지만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자 옥타비우스는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이집트를 로마의 한 주로 편입한다. 이로써 3200년간 32왕조에 이르는 고대 이집트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

이집트를 방문하여 피라미드나 거대한 기념물을 보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압제에 억눌린 사람들이었다고 상상하기 쉽다. 죽음의 관념에 항상 사로잡혀 있고, 감독자의 난폭하고 잔인한 채찍 밑에서 평생 거대한 돌덩어리를 끌면서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전혀 터무니없는 그릇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집트인들은 인생을 즐긴 낙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하고 죽음 또한 행복한 인생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또 수많은 고대 민족 중에서도 가장 근면한 사람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이자 지배자인 파라오의 지배 하에서 이집트인들의 생활은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나쁜 생활이 아니었다. 3200년 역사 동안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기근 등으로 불안한 기간도 있었으나 평소 생활은 대체로 평온했다. 지리적 조건상 정치적으로 침입자에게 짓밟히고 약탈당하는 다른 고대 민족들에 비해 이집트인의 생활은 훨씬 평안하고 근심도 적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의 계급이 세대를 내려가도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라오의 가계에서 파라오가 나오고, 재상의 가문에서 재상이 나오며, 장군의 가문에서 장군이 나온다. 벽돌공이나 상형문자를 새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직업이 세습되었다.

파라오 가문에서 파라오가 세습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파라오가 임명하는 재상이나 장군도 한 가문에서 계속 이어받는다는 것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파라오는 언제든지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을 재상이나 장군으로 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러한 파격적인 행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 앞에 정해진 벽을 깨뜨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순종하려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파라오는 파라오며, 재상은 재상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놀이도 한다.

그들이 먹을 식량도 재배하여야 하고 물고기나 가축도 길러야 한다. 죽어서 신하나 하인들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면 살아서 대우를 잘해주어야 한다. 공연히 제도적인 틀을 바꿈으로써 잡음을 내어 신하들을 화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파라오의 선조가 어떻게 해서 왕이 되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더구나 관례적인 모순점을 타파하여 파라오나 고관이 되려고 더더욱 하지 않았다. 쿠데타나 세습 제도의 변경은 중요 사항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면 죽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세계의 중심이 그들에게 있으므로 그들의 생각이 바로 세계인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문명을 본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이집트를 따르려고 노력하였으므로 그들이 야만인으로 생각하는 다른 문명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집트의 찬란했던 고대 문명이 과거만을 되씹는 문명으로 자리 잡게 되자 더 이상의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들 스스로 자신 앞의 높은 벽을 깨뜨리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