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6) : 상형문자 해득하기(1)

Que sais 2021. 2. 2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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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역사>

이집트의 놀라움은 그리스나 로마가 아직 암흑시대에 있을 때, 나일 강 주변에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문명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집트인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경법률을 갖고 있었고 정치도 알았다.

이집트를 방문하거나 세계의 유수 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더욱 놀라는 것은 돌이나 나무, 헝겊, 파피루스 등에 수많은 글자가 기록된 자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 자료들이 길고 긴 이집트 역사 전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위대한 고대 문명이 후대에 의해 망가지고 소실된 예는 무수히 많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자료들이 파괴된 것은 643년이다. 당시 이슬람의 군주인 오마르는 수많은 이집트 기록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16세기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로마 광장 주변의 고대 건물들을 파괴했다. 교황들이 분수를 장식할 대리석을 고대 건조물에서 구했을 정도였다.

이집트의 놀라운 점은 가장 오래된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후대의 어떤 나라들보다 더 많은 고대의 자료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집트의 왕성한 기록문화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당대 세계 최고의 문명을 가졌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그들이 겪은 수많은 사건들을 기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 문자는 상형문자로 된 신성문자히에로글리프. 신관문자인 히에라틱. 민중문자인 데모틱 세 가지다. 주로 상형문자로 불리는 히에로글리프는 수메르 문자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로 인정하는데, 이집트가 공식적으로 왕조시대로 들어가는 제1왕조부터 고안되어 왕의 이름이나 업적 등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문자의 수는 약 700여 개로 각 문자는 본래의 소재 자체를 나타내는 표의문자였으나 음의 전용에 의해 표음문자의 구실도 한다. 특히 두음(頭音)의 활용으로 24개의 알파벳이 정해졌으므로, 이는 오늘날 세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각종 알파벳의 가장 오래된 선조로 인식한다.

표음문자가 첨부되자 상형문자는 더욱 확대되어 가로와 세로, 좌우로 자유롭게 방향을 달리하여 쓸 수 있다. 그러나 표음문자 첨부로 피할 수 없는 결함도 생겨났는데 그것은 동음이의어 때문이다. 특히 상형문자는 자음만 나타내기 때문에 아직 문자로 기록된 말의 발음을 완전히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신관문자(神官文字)는 파피루스와 점토에 쓰기 쉽도록 더욱 단순화된 서체로 상형문자가 발명된 후 곧바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집트 제1왕조 때부터 등장하는데 기원전 660 민중 문자에 밀려났으나, 신관들 사이에서 수세기 동안 더 사용되었다. 그리고 민중문자는 대체로 기원전 664년인 제26왕조부터 민간인들에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글쓰기는 신관이 도맡았다. 상류층 자제들은 신관이 운용하는 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는데 공부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에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었다고 보인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서기가 되면 다른 일에 비해 명예와 재산을 얻기가 더 수월했다. 물론 글쓰기가 쉬운 일은 아니. 제대로 글을 숙지하지 않으면 문책을 받았다. 다음은 한 서기가 동료에게 잘못된 글쓰기에 대해 핀잔을 주는 내용이다.

 

너의 글은 그럴듯한 문장도 있지만 지나치게 꾸밈이 많아. 모든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못된 표현에 가둬두고 있어 모두 변변치 못한 것뿐이야. 너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해석해서 왜곡하고 있어. 더구나 네가 쓰는 말은 하 이집트에서 사용하는 거야.’

 

오토 노이바트 박사는 이 글이 쓰였던 시기에 이집트는 외국어가 많이 유입되어 이집트어를 왜곡시키고 있었다고 말한다. 파피루스에는 외국어를 배척해서 이집트 언어의 순수성을 지키라는 포고도 적혀 있다.

이와 같이 이집트인들이 상형문자를 고수하려고 한 것은 신의 말씀은 상형문자로 적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백 년만 흘러도 특별한 지식 없이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변화하고 마는 언어의 특징을 생각해볼 때, 이집트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상형문자가 사용돼왔고 후대에까지 전해져왔다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상형문자에게도 종말은 찾아왔다.

이집트인들이 상형문자 쓰기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던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565)신전폐쇄령을 내리면서 이집트어 사용을 금지한 것이다. 때문에 상형문자를 알던 사제들마저 사라지게 되었고, 이집트 상형문자는 19세기 초 샹폴레옹이 해득에 성공할 때까지 거의 1300년 이상 망각의 글이 되고 말았다.

 

<이집트 역사를 찾아 준 나폴레옹>

이집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다.

이집트를 재발견하고 이집트학이 자리매김하는 데 나폴레옹의 공헌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길에 나선 것은 그가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자 당시 프랑스의 권력 기구인 총재 정부(Diredtoire)탈레랑 수상그를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명한 것이었다.

 

낙타타고 이집트로 진군하는 나폴레옹

원정의 명분은 프랑스가 1797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와 강화를 맺은 후 영국의 인도 통상로를 끊기 위해서였다. 이집트는 영국의 인도 교역로로서 지중해와 인도양을 있는 길목이므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나폴레옹1798513척의 전함, 6척의 프리기트함 등 350척의 프랑스 함선에 38000명의 장병을 싣고 지중해 남부의 툴롱 항구를 출발했다. 함대는 이탈리아에 들러 증원군을 태웠고, 두 달 후 코르시카 북쪽에 있는 말타를 점령했고 179871일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다.

이 당시 이집트는 맘루크 왕조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이집트인들에게 자신들은 침입자가 아니라 이집트를 해방시키러 왔다고 선전했다. 그리고 721일에 맘루크군을 피라미드의 싸움에서 격파하고 이집트를 점령한다. 이 당시 나폴레옹 전투에 참가하기 전에 병사들이여, 4000년의 역사가 피라미드 위에서 적군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영국의 넬슨 제독과의 해전에서 패배하여 이집트에 고립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이집트를 적극적으로 통치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기자, 블라크, 구 카이로, 신 카이로 등 네 곳에 야전 병원을 건설하고 행정 구조도 획기적으로 정비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국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가 하면 인구 조사도 실시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 통치의 틀을 잡았다. 그리고 이집트 학사원을 설치하여 학자들에게 고대 문화를 조사 연구하게 하였다.

나폴레옹을 특출한 사람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는 한 가지는 이집트 원정이 결정되자 원정군에 군인뿐 아니라 학자도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38.000명의 장병 외에도 과학자 300, 수학자 20, 천문학자 3, 토목기사 17, 자연과학자와 광산기사 13, 건축가 4, 화가 8, 인문학자 10, 라틴어그리스어아랍어 등을 인쇄할 수 있는 인쇄기술자 22명을 원정군에 포함시켰다.

이들 중에는 당대에 대단히 뛰어난 학자와 예술가가 상당수 포함되었다.

기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몽주, 화학자로 프랑스 혁명 공포의 대명사 로스피에르에 당당히 맞섰던 베르톨레, 과학자 조프루아 생틸레르, 고고학자 조마르, 동방학자 도미니크 비방 드농, 크레용 그림으로 유명한 콩테, 시인으로 유명한 파르스발 그랑메종 등이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은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학자들을 우대하였으며 전쟁만을 일삼는 전쟁광이 아니라고 선전되었다. ,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의 지적은 날카롭다.

나폴레옹이 학자들을 데리고 이집트에 원정을 간 것은 이집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들의 재산을 손쉽게 약탈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였다는 지적도 음미할 만하다. 당시 어느 나라 지휘자들이든지 간에 외국을 침략할 때면 나폴레옹과 같이 학자들을 대동하는 것이 관례였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