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3) : 고대 이집트 들여다보기(3)

Que sais 2021. 2. 2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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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기 고왕국>

3왕조는 수도를 멤피스에 두었으므로 멤피스조라고도 부르는데 4대에 걸쳐 약 50년 계속되었다. 이집트 최초로 거대한 석조 건축인 사카라의 마스타파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설한 조세르가 창시자다.

4왕조와 대피라미드스네루프에 의해 시작되었다. 대피라미드들이 이 기간에 건설된 것을 보면 경제적 번영과 강대한 왕권이 유지되었다고 추정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3왕조에서 제6왕조까지를 이집트에서 가장 번성하였던 피라미드 혹은 파라오 시대라고도 부르는데 유명한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및 스핑크스도 이 시대에 건조되었다. 세계7대불가사의로 지목되는 쿠프의 대피라미드는 대체로 기원전 2550년경에 건설되었다고 추정한다. 이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아직 진정한 청동기시대에도 진입하지 못하였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4왕조에 특이한 것은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작은 멘카우레의 딸인 켄트카우스 여왕이다. 보통 여성은 신의 딸또는 왕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그녀의 경우는 상하 이집트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스스로 붙였다. 학자들은 그녀가 정통 파라오로서의 권위와 실권을 가진 것보다는 제5왕조와의 교량역할을 한 여왕으로 제5왕조의 초대 우세르카프 파라오 및 제2대 사후레 파라오의 어머니로 추정한다.

사후레 파라오의 시대에 이집트는 여러 외국과 접촉을 유지했다. 쿠프 파라오리비아의 왕녀와 결혼했고 4왕조에서 인근의 누비아, , 리비아와 빈번히 상업적 교류를 했고 사후레 왕 시대에는 트로이의 왕들과도 상거래를 했다. 이는 사후레 왕의 이름을 적은 황금의 단편이 트로이 인근의 도라쿠에서 발견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시기에 중요한 변화가 보이는데 피라미드와 병행해서 새로운 건축물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태양신 를 모신 신전이 그것으로 중앙에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이는 를 왕조의 시조와 파라오의 아버지라 생각하는 종교관에 입각한 것으로 실제로 제5왕조의 파라오들은 자신의 이름를 붙였다.

이 새로운 신앙과 과거 델타 지방에 있었던 오시리스 신이 병행하여 세계는 이 두 신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이원론적인 개념이 확립되었다. 그들은 이 신앙의 중심지를 헬리오폴리스로 삼았고 세계는 이곳으로부터 방사상으로 전개되었다고 생각했다. 태양신을 섬기는 헬리오폴리스의 신관들이 매우 중요시되어 이집트의 정치를 움직이는 주축이 될 정도의 큰 영향력을 미쳤다.

6왕조 시기에 이집트는 페피 1세와 페피 2세를 거쳐 후계구도와 왕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 지방의 총독들이 내전을 벌이는 등 급격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하튼 지방권력이 강성하여 독립성을 강화하면서 왕권에 도전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6왕조 말기에 이집트는 중앙의 지배가 쇠퇴하여 각 지역으로 분리된 잡다한 나라로 변모한다. 이 시기를 1중간기라고 부르는데 마네토에 의하면 제7왕조는 멤페스에서 시작되었는데 70일간 70명의 파라오가 교체되었고 제8왕조는 146년간 27명의 파라오가 등장했다고 한다.

다소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여하튼 이런 변혁으로 9, 10왕조는 파이움에 가까운 헤라클레오폴리스가 중심이 되었다. 이들 왕조의 지배는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과거처럼 상하이집트를 통치한 것은 아니다. 상이집트는 아비도스가 한계였고 하이집트는 빈번한 아시아 여러 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당시는 변변한 건축물도 남아있지 않지만 파라오의 체계는 계속 유지되어 종교와 도덕 면에서 새로운 바람들이 일어났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되어 파라오의 중계가 필요치 않게 된 것이다.

이런 믿음은 내면으로 깊어져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을 따지는 사고 방식이 발전했다. 이 변화의 중요성은 현세의 행위가 내세로 연장되는데 그들의 생전 행위가 ()으로 인정될 때 일반 사람들도 신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이집트의 특별한 미라 개념으로 발전하여 모든 이집트인들이 사망한 후 미라가 되려고 노력한 요인이다.

 

<년대기 중왕국>

140년간 제1중간기의 혼란은 제11왕조 때 수습되어 다시 통일국가로 등장하며 4멘투호테프 파라오 때인 기원 전 2052년 상하이집트는 재통일되며 이를 중왕국으로 분류한다. 중왕국 시기의 수도는 멤피스보다 상당히 상류에 있는 테베 오늘날 룩소르(Luxor), 이 시기에는 파라오는 아멘호테프 1세 이후 세소스트리스 또는 세누스레트(Senusret)라는 이름을 물려 사용했다. 이후 1, 2, 3세로 파라오의 이름이 등장하는 계기라는 뜻이다.

고왕국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간에 밀접해지면서 아몬과 라가 합해지는 아몬라 신앙을 바탕으로 사제 계급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도 누비아, 시리아리비아 등에 대한 군사원정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아시아와의 교류도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때 이집트 정치계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는 파라오가 공동 통치제 즉 이원집정제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두 명의 파라오가 이집트를 이끄는데 대체로 장자 즉 후계자도 파라오로 승격시켜 아버지는 대외업무, 후계자는 국내문제를 담당하여 한 파라오가 급작스럽게 사망할 경우 국정의 동요없이 대처할 수 있었다.

 

중왕국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아메헴네트의 가르침이 있다. 아메헴네트는 아들인 세소스트리스1세와 공동통치를 했는데 아들에 의해 암살되자 아메헴네트 영혼이 아들 세소스트리스1세에게 인간에 대한 불신과 견제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주제다. 인간의 문제점과 실상을 정확히 보여주는 문학작품으로 거의 4천 년 전의 작품이라는데 놀랄 것이다.

이들 왕조는 테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파라오들의 이름은 대체로 테베의 신에서 유래한다. ‘아메헴네트아멘혹은 아몬에서 온 이름이다. 아멘이란 테베의 지방신인데 제12왕조의 파라오들이 이를 신과 결부시켰다. 이것이 아멘라신으로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신으로 부상한다.

 

이집트의 대외 정책은 대체로 소극적이었지만 예외적으로 시리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근동과의 무역은 보다 활성화되었다. 키프로스와 근동에서 막대한 양의 청동제 기물과 보석류가 들어오고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섬 등의 특산물 등이 들어왔다. 이러한 상업 활동에 힘입어 이집트의 금속 공예는 크게 진보하여 정교한 왕관, 목걸이는 물론 각종 금은세공이 꽃을 피운다.

이집트에서 중요한 곳은 누비아. 누비아는 아프리카 산물 즉 금, 목재, 상아, 모피 등을 입수하는 루트이므로 이들을 장악하는 것이 이집트의 기본 정책이다. 그러므로 나일강 제1폭포 하류에 있는 엘레판틴에 관리를 두고 남쪽 변경을 지키게 했다. 세누스레트 3세는 제1폭포 상류까지 배가 갈 수 있도록 운하를 팠으며 이어서 제2폭포까지 주둔군을 파견하여 누비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물품을 거래하는 상업중심지는 제3폭포 인근의 케르마로 옮겨졌다.

이러한 위업에 의해 세누스레트 3세는 누비아에서 신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선대인 아멘호테프, 멘투호테프 파라오 등과 함께 문학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 신화 속에서 그를 모델로 한 영웅적인 용병대장은 멀리 갠지스 강까지 진군한다. 그 당시에 인도가 알려졌다는 뜻이다.

12왕조 시대부터 말과 철기를 사용하는 기마군단 힉소스가 수시로 침략하더니 기원전 18세기 말경에 전통의 이집트는 외국인에게 점령당한다. 이 시기를 2중간기라고 부른다.

힉소스의 등장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부분이다. 이들의 기원과 이집트 침입에 대해 아직도 이론이 많은데 대체로 기원전 18세기가 끝날 무렵 카파도키아로부터 북시리아까지 확대된 히타이트 제국의 압박을 받은 인도유럽인과 토착인으로 유대인 선조로 알려지는 인이 이집트로 피하여 힉소스의 기원이 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처음 이집트의 델타지역에서 평화롭게 정착했으나 이집트의 감독이 소홀해짐에 따라 이들 지역을 무력으로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때 셈인도 참가한 것으로 추정한다.

 

아흐모세1세의 힉소스 제압

이집트가 다소 혼란 상태에 있다하더라도 당대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는데 힉소스에게 패배한 것은 힉소스가 기마군단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당대까지 이집트는 기마전이나 전차를 사용하는 전투를 몰랐으므로 전격적으로 제압당한 것이다.

힉소스의 등장으로 새로운 귀족계급이 대두하고 각종 장인 계급이 등장한다. 목재, 금속, 과학 및 가축 사육에 보다 진보된 기술이 도입되면서 점점 다른 민족에 대항하는 국가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마네토갑자기 야만스러운 약탈자인 힉소스가 등장했다라 적었는데 이것은 이집트인들의 국가 의식을 의미한다.

여하튼 기원전 1700년경 대힉소스라 불리는 제15왕조가 100여 년 간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 정복자 힉소스인들이 파라오를 자칭하였다는 것은 힉소스인들이 이집트에 동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시 파라오의 이름은 셈어이지만 이집트식 이름을 붙인 파라오도 등장한다.

15왕조는 테베에 있던 16왕조에 이어 17왕조와 혼인을 맺기도 하였으므로 크게 15왕조부터 17왕조까지 힉소스계열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때 아시아에서 수레, 청동기 등의 다양한 문물이 이집트로 들어와 정착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의 특성상 나일강 하류의 델타 삼각주가 정복되었지만 각 지역의 실력자들은 건재하여 이들이 힉소스와 협조하고 때로는 저항을 했다. 여하튼 상이집트의 맹주로 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테베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인와 전쟁을 벌여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를 함락시키고 마침내 힉소스를 축출하여 신왕국인 18왕조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