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31) : 이집트의 영광(12)

Que sais 2021. 3. 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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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석되는 모세>

근래 성경을 비롯한 각종 자료와 현지 발굴들을 근거로 모세에 대한 재해석이 발표되었는데 이들의 결론은 성경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카나다왕립군사학교>리차드 A. 가브레엘 박사<출애굽기>의 기록으로 볼 때 이스라엘인들의 이집트 탈출은 평화로운 탈출이 아니라 매우 폭력적이었으며 모세는 이들을 이끌고 나선 군사지도자라고 설명했다.

이스라엘인들이 기원전 14세기 경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람세스 2세보다는 약 2세기 앞섬)의 국경지대로 비옥한 고센 땅에 정착하여 200년 간 이집트와 공존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이집트로 보아 이들이 가나안과 합류한다면 힘의 균형이 깨질 수 있으므로 이들을 추방하는 대신 요새나 성벽을 건설하는 노동에 동원했다. 이들 노동이 만만치 않은 일이므로 이스라엘인들이 모세의 지도하에 이집트를 자진하여 떠나려고 했고 파라오는 이를 허가했다.

그런데 실무적으로 25,000명이나 많은 인원들이 이집트를 떠나면서 매우 폭력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집트에서 200여년을 살았으므로 이들은 오합지졸 노동자가 아니었고 더구나 모세와 같은 군사지도자가 있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이스라엘인들이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각종 보급품을 요청했는데 이 요청은 말이 요청이지 강탈이나 마찬가지다. 히브리 자료에 의하면 이 당시 상황을 니차이엘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보급품을 무력으로 빼앗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이집트 도시들을 철저하게 파괴하면서 보급품을 약탈했다.

데이비드 죠지 교수는 성경에서 이 정황을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인들을 이끌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대규모 용병부대를 지휘한 지휘자로 인식하며 그가 이끈 군사는 약 1,000명으로 생각한다. 1,000명이라니 적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대에 모세가 이끈 이스라엘인들이 25,000명 정도인데 3,000년 전에 장정으로만 구성된 이들 숫자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 도시들을 공격하여 약탈하자 파라오는 그들을 추격하여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모세는 이집트의 막강한 전차부대가 출격하자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나 사막으로 이끌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런 처사는 자살이나 마찬가지지만 모세는 사막에서 산 경험이 있으므로 남다른 정보가 있었다. <출애굽기> 13장을 보자.

 

신은 이스라엘인들이 행진할 때 앞서갔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 주었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 위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이 내용은 신 자신이거나 신의 사자인 천사가 이스라엘인들을 도운 것으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이집트 군대진격 방법을 의미한다. 당시 이집트는 북쪽 메소포타미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낮에는 연기를 피워 전진했고 밤에는 각 대열 선두 병사가 불타는 횃불을 들어, 장병들은 그것을 보고 따라가도록 했다. 이 방법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할 때 사용한 방법이다.

그런데 모세는 이들 신호방법을 역이용했다. 이집트군이 놀란 것은 불의 위치다. 불을 보면 야영지와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데 불의 위치가 이집트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였다. 기본 행군 방식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은 불과 파라오 군대의 중간에 있어야 하는데 이집트인들이 볼 때 이스라엘인들은 이스라엘 쪽이 아니라 이집트 쪽을 향하는 것이다. 즉 홍해를 등진 것으로 이집트 군은 이스라엘인들이 길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이는 전적으로 모세가 이집트인을 속인 것이다. 모세는 불기둥을 전면이 아니라 후방에서 피우도록 했다. 사실 현대도 밤에 행군할 때 밝은 빛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밤에 밝은 빛을 응시하면 인간의 눈은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지나야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모세는 횃불 부대들을 후면에 배치하여 이집트군이 수백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이스라엘인을 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홍해를 건넜다는 문제도 학자들은 간단하게 설명한다. 모세는 이들 지역에서 오래 살았으므로 하루 중 특정시간, 특정장소에서 홍해를 건널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남동쪽 수단 사막에서 바람이 불면 조수가 빠지면서 북쪽으로 물을 당겨 짧은 시간동안 수백 미터의 길이 열린다. 성경의 이야기처럼 기적은 아니지만 이집트인들이 볼 때 깜쪽같이 홍해를 건너 사라진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 무려 25,000명이나 되는 인원이다. 당시에 25,000명은 매우 많은 인원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집트군이 홍해를 등졌으므로 완전히 포위되었다고 생각하며 다음날 아침 보니 25,000명이 깜쪽같이 사라졌다. 더욱 놀란 것은 홍해는 배가 없으면 건널 수 없이 바닷물이 꽉 차있었다. 더구나 이집트 전차는 부드러운 늪 바닥에 빠져 이동도 하기 어려웠다. 모세가 전투없이 이집트 군을 통쾌하게 물리친 것이다.

이집트를 무사히 탈출하자 모세군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 동안 완전한 약탈군으로 변한다. 이당시 모세는 군사령관으로 높은 곳에서 전투를 지휘했고 공격군을 실제로 이끈 사람은 여호수아.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남쪽의 시나이산으로 간 것은 전략적인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가 지휘하는 1,000명 정도의 군사로는 가나안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훈련된 대규모 군사와 질 좋은 무기가 필요했다. 시나이에는 구리와 주석 등 청동무기 재료가 있었고 인근에 그니스란 부족이 살았는데 그들은 금속을 잘 다루었다.

모세의 의도를 모르는 이스라엘인들이 모래, 늪지대는 물론 생각하지 못한 산과 그들과 적대적인 부락만 조우하는 것을 보고 모세에게 불평불만하면서 반란을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모세는 남다른 정치 감각으로 선수를 친다. 시나이 산으로 올라가 반란자들을 처형할 구실 즉 신의 뜻을 거역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십계명이란 아이디어를 도출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세가 40일간의 시나이산에서 머문 이유.

모세가 시내산을 내려오자 그의 반대 세력을 제거할 명분을 확보한다. 이스라엘인들이 금도금한 소를 제작한 것이다. 그는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부순 후 반대자의 처형을 레위족모세의 근위병에게 명령한다. 이들은 막사를 돌아가면서 반란 주도자와 일가족을 모두 살해하는데 이때 희생된 사람의 숫자를 약 3,500명으로 추산한다. 모세가 특별히 이런 일을 레위족에게 시킨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티븐 웨인가트너 박사레위족이 이스라엘인들 중에서 절대적인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추정했다.

이를 보면 모세가 매우 지독한 독재자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이스라엘 부족 구조는 매우 민주적인데 모세는 자신이 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절대 복종을 강요했다. 레위족의 소위 만행은 모세에게 절대 권력을 쥐어 주었는데 모세는 이를 기회로 병사를 1,000명에서 5,000명으로 증가시켰다. 5,000명 정도는 전차부대와 조우하지 않는다면 당대의 어느 부족과도 전투해서 승리할 수 있는 숫자다. 이들 숫자가 갑자기 늘어날 수 없으므로 모세가 40년을 광야에서 묵었다는 것은 인구가 증가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당대에 한 세대를 20년에서 30년으로 보면 충분한 시간이 된다.

 

모세 홍해 탈출

모세는 이들을 이집트 군대체제로 편성했다. 당시 이집트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므로 남다른 전투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적지를 탐색하는 정찰대, 선두에서 전투를 벌이는 중무장보병부대, 검과 방패로 무장하면서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는 경보병부대, 적을 후면에서 공격할 투석수와 궁수, 그리고 최후방에 또 다른 중무장 보병부대를 배치하는 편제다.

장병들을 충분히 훈련시킨 모세는 드디어 가나안을 향해 진군한다. 가나안은 남다른 비옥한 지역이므로 이스라엘인들의 새 고향으로는 완벽했다. 그러나 가나안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가나안은 성곽도시인데다 군대 역시 이집트군의 체제를 갖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장병의 숫자는 최소한 1만 여명이 필요했다. 이는 시간이 해결할 문제였다.

더구나 모세는 후방에서 뒤통수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모세로서는 가나안에서 평화롭게 정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완벽하게 점령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5,000명의 장병을 희생시키지 않고 즉 전투 없이 가나안까지 도착시켜야 했다. 모세가 가나안까지 2년이 걸렸는데 이는 모세가 후방의 우려 즉 불씨가 되는 부족들을 공격하여 격멸시켰기 때문이다. 모세는 우선 군대를 요르단 강 동쪽으로 우회하여 암몬 부족을 철저하게 말살시켰다. 이어서 에돔, 모아브, 길르앗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멸시켰다. 가장 놀라운 것은 모세의 오랜 동맹이자 모세의 탈출을 도운 장인과 부인이 태어난 미디안족도 전멸시켰다는 점이다. 이때 모세는 피니아스에게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잘 수 있는 여자를 모두 살해토록 명령했다고 한다. 모세가 이렇게 잔인했던 것은 요르단 계곡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가나안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후방의 부족들을 완전히 몰살시켜야만 가나안과의 전투에서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방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후 모세는 가나안 공격에 들어간다. 그는 가나안 공격 사전단계로 정화의식을 치루면서 사람을 죽인 사람은 7일간 야영지 밖에서 지내도록 했다. 모세는 가능한 한 장병들이 남다른 전투능력과 잔인성을 갖아야 한다고 믿었다. 즉 보다 강한 정신력과 신체를 갖고 있어야만 당대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는 가나안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결국 이스라엘인의 가나안 정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학자들이 가장 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왜 모세가 가나안 공격을 앞두고 갑자기 사망했느냐이다.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모세가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여년 간 이스라엘인들을 이끌면서 많은 고통과 실수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부인과 장인의 부족인 미디안부족도 몰살시킬 정도로 냉혹한이므로 내부에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물론 40여년 간 모세를 따라온 이스라엘인들이 굳이 마지막 단계에서 모세를 제거할 이유가 없다는 설명도 있지만 여하튼 가나안의 정복은 모세가 아니라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로 넘어간다. 결론적으로 모세의 목표는 그의 손이 아니지만 성공한다. 그것은 모세라는 강한 지도자 아래 단결한 가공할 전사들의 덕으로 볼 수 있다. 아크 슈왈츠 박사는 모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군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인들의 핵심을 군대로 조직하고 양성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종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위대한 지도자임이 틀림없다.’

 

학자들은 이스라엘인들이 모세에 의해 이집트로부터 이주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모세가 이집트 탈출에 성공하여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유일신을 믿도록 만든 매개자라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 모압의 느보 산에 묻혔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세계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것으로 알려진 여리고 성을 공략한다. 여리고 성은 일 년 내내 물이 나오는 오아시스 도시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여호수아가 싸움을 일으키니 여리고의 담들이 무너져 내렸다. 백성은 성벽이 무너지자 성안으로 쳐들어가 여자건 남자건 어린 아이건 나이 먹은 노인이건 모조리 칼로 쳐죽였다. 또 소든 양이든 염소든 나귀든 모조리 칼로 쳐죽였다.’

 

한마디로 성경에 나오는 가장 잔인한 장면 중의 하나인데 고고학자들은 이 유명한 학살이 기원전 1550년경 청동기시대 중기 말엽에 실제로 발생했다고 추정 하지만 여호수아와 여리고의 점령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본다. 모세의 시대 즉 여호수아가 찾아왔을 때 여리고는 이미 폐허였다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했든 안하든 이스라엘인들이 점령했다는 여리고는 매우 오래된 도시다. 학자들은 여리고가 약 1만 년 전에 건설되었다고 생각한다. 여리고의 인구는 3,0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수메르의 도시보다 약 5500년이나 앞지른 것이다. 이후 여리고는 수없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는데 매번 재건되었다.

이스라엘인들의 여리고 점령은 가나안 지역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여건이 되었다. 여리고가 중요한 것은 나일강 유역, 지중해 동부해안,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강 분지를 끼고 있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으로 신석기 사람들은 아직 철이나 청동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나 여리고가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도시를 지키기 위해 도시 주위에 거대한 돌담과 석탑을 쌓아 올렸는데 이스라엘을 탈출한 이스라엘인으로서는 여리고 확보가 관건이었다. 여하튼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했지만 오래 계속되지 못했으며 그 후 도시의 정확한 위치도 여러 번 바뀌었다. 현재의 여리고는 성경에 기록된 지점으로부터 약 1.6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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