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32) : 이집트의 영광(13)

Que sais 2021. 3. 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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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1303?1213?)

이집트를 방문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집트 공항부터 카이로로 들어갈 때까지 곳곳에 있는 람세스 2세의 유물들이다. 거의 20미터나 되는 대형 조상들인데 근래에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거의 전부 진품이라는데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놀란다.

기자에 있는 쿠프의 대피라미드의 경우 기원전 2500여 년 전, 4500년 전에 건설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2000년 전의 삼국시대 초기의 유물이 많지 않은 것에 비하면 이집트의 유물들이 왜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는 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람세스 2의 엄청난 숫자와 각 유물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집트의 영광을 대변하는 람세스 2세는 제18왕조의 말기인 기원전 1,303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지지만 기원전 1290년이라는 설도 있다. 여하튼 그가 태어날 때는 파라오 가문이 아니라 이집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프라메스는 원래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호르엠하브의 재상이었는데 1,295년경 호르렘하브가 후손 없이 사망하자 파라오가 되면서 람세스 1로 개칭하고 새로운 왕조인 제19왕조를 세웠다.

람세스 1세는 14개월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였고 이어서 그의 아들 세티 1가 파라오가 되었다. 아버지 세티가 즉위할 때 여덟 살이었던 람세스 2는 열 살 때 이미 국방의 책임자 지위에 오르게 된다. 기원전 1279년 세티 1세가 50세의 나이로 죽자 람세스 2세는 우세르-마아트-라는 이름으로 스물넷의 나이에 파라오가 되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람세스 2세의 아버지에 대해 적은 기록을 보면 그가 왕자라는 언급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처음부터 후계자로 예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파라오가 된 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장남으로 또 태자로 대지의 신인 게브의 왕자에 올랐다. 나는 보병과 전차부대의 총사령관으로 두 나라의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내 아버지는 젖먹이인 나를 두 팔에 안고 백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그에게 왕관을 씌우도록 하라. 그래서 나 또한 장수를 누리리라.’‘

 

람세스 2세는 우와디 에세부아(Ouadi es-Seboua)의 신전에서 발견되는 기다란 리스트에 의할 경우 67년을 통치하면서, 최소한 6명의 정부인과 여러 명의 후처와 후궁들이 있으며 55명의 왕자와 55명의 공주가 있다. 그가 워낙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많은 자식들이 일찍 죽었는데 그가 88살 또는 90살에 죽었을 때 13째 아들인 미네프타가 왕위를 계승했을 정도였다.

 

카르낙신전의 람세스2세

람세스 2는 왕위에 오른 통치 초기 과감하게 아케나톤과 네페르티티의 기록을 지웠다.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비문에서 그들의 이름을 쪼아내고 신전을 해체하고 조상들을 파괴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목적은 그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던 아몬 사제들에게 다시 권력을 쥐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라오가 되자마자 아비도스에 있는 오시리스 신전의 사제장 네프웨네프를 아몬 신전의 새로운 사제장으로 앉혔다. 그의 이러한 조치가 국내의 많은 적들을 제거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대 아름다운 투사여. 용기를 주시고 병사들을 구하시도다. 그대는 담대한 마음을 갖고 있으며 싸움터에서는 단연 최고이시다. 모든 나라가 그대에게 저항할 수 없으며 그대는 승승장구하는 천하무적이로다. 그대는 이집트인들의 수호자이시며 다른 나라를 길들이는 사육사이시다.’

 

국내를 완벽하게 장악한 람세스2는 광대한 건축 설계에 몰두했다.

그가 이집트의 국력을 건설에 쏟은 것은 돌로 만든 수천 개의 부조가 피안의 세계에서 이름과 업적이 계속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람세스2세는 북쪽의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타니스로부터 남쪽 누비아 지방의 아부심벨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방대한 도시들과 기념물들을 건설하여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람세스 2세는 영화 십계에서 모세(찰턴 헤스턴)의 상대역인 파라오(율 부리너)로도 나와 우리들에게 간접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모세 시기의 이집트 파라오는 람세스 2세보다 약 100년 전 파라오인 투모세스 3세를 거론하기도 하지만 상당수 많은 자료에서 이들이 동시대에 살았다고 설명한다.

국내를 평정했다고 하지만 그의 집권에 방해되는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히타이트. 그가 파라오가 되자마자 히타이트가 국경에서 준동했고 북방 국경을 넘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람세스 2세가 기원전 1290년경 또는 기원전 1286년 경 즉 재위 5년에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왕과 세계 전쟁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인 카데시전투를 벌려야하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기원전 127924살에 파라오가 되었으므로 기원전 1290년이라면 그의 나이 11, 1286년이라면 그의 나이 7살이고 파라오가 아닌 것은 물론 년대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겠지만 이 정도는 눈감아주기 바란다.

람세스 2세의 신전 건설 등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이곳에서는 람세스 2세의 람세스의 치적 중 치적으로 설명되는 카데시 전투와 네페르타리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카데시 전투>

람세스 2세는 이집트의 3000여 년에 걸친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런 이집트 제19왕조를 건설한 사람으로 당시 이집트의 명성을 국내외적으로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업적 중에 하나가 카데시 전투.

람세스 2는 자신이 직접 지휘했던 카데시 전투를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자신이 세운 건물 거의 모두에 카데시 전투에 대해 기록했다. 아비도스, 카르나크, 룩소르, 라메세움과 같은 여러 대신전과 두 군데의 누비아에 있는 성소들, 아부심멜 대신전과 데르 대신전의 벽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 벽화들은 기본적으로 파일론즉 탑문으로 불리는 성벽에 그려져 있다. ‘보고서라 부르는 간략한 내용으로 상황을 설명한 후, 전투에 임하는 람세스 2세와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람세스의 공적과 전사들의 전투 장면을 활기가 넘치도록 그린 벽면 구성은 고대의 상투적인 전쟁 기록화와 비교해 볼 때 정말로 혁신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부의 부조벽화는 전투의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하나하나 정교한 기록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투에 대한 독창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글도 첨가되어 있다. 내용은 당연하지만 람세스 2세가 이 전투에서 철저하게 적을 패배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했다는 것으로 추후에 어느 국가에서나 있었던 개선장군의 기록과 같다.

카데시 전투는 양쪽 군대의 전략과 배치 상황을 알 수 있는 역사상 최초의 전투였다. 전투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는 이 군사보고서는 직접 전투에 참전한 병사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도 최초다.

여하튼 람세스 2세는 카데시 전투를 벌이기 위해 람세스 재위 5년 여름, 아버지 세티 1세가 델타 동부에 세운 도시인 피람세스를 출발하여 가나안으로 향했다.

그로서는 이집트와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히타이트가 어떠한 경우라도 이집트를 침략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목적으로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시왕에게 이집트가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자랑스럽게 조각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대왕은 이미 보병들과 전차부대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완전무장했으며 왕으로부터 전쟁에 대한 훈시를 받았다. 대왕은 북쪽으로 이동했고 시기적절하게 부대를 이동시켰는데 그때가 바로 재위 5년 여름 중에서도 두 번째 달 9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