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29) : 이집트의 영광(10)

Que sais 2021. 3. 3. 09:28

youtu.be/OAQ7p7-Hp8o

<흉상은 가짜?>

네페르티티가 워낙 큰 명성을 갖고 있는데 또 다른 강타가 튀어나왔다.

스위스 미술사학자 앙리 스티얼린 박사네페르티티의 흉상, 이집트학의 사기?라는 책에서 놀라운 내용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그동안 세계를 즐겁게 한 네페르티티 왕비의 상이 실은 가짜라는 폭탄선언이다. 스티얼린 박사는 이 흉상이 3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912년에 만들어진 최신작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스티얼린 박사는 이 조각이 가짜라는 근거로 왼쪽 눈이 처음부터 아예 제작되지 않았는데 이는 조각을 사람과 동일시한 이집트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이 문제는 그동안 큰 의문의 대상이었다.

191212, 아케나톤이 건설한 텔엘아마르타에서 독일의 루트비히 보르하르트 박사가 아름다운 여인의 흉상을 발견한 후 이집트 관리들의 눈을 피해 독일로 밀반출한다. 이때 발각에 대비하여 흉상에 석고를 발라 몰라보게 했다고 알려진다.

독일로 밀반출된 이 조각상은 1923년 원래 상태로 복원되어 독일 베를린 <알테즈박물관>에 전시된다. 기원전 1360년쯤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왼쪽 눈동자가 없는 미완성 상태였지만 매우 섬세하고 정밀하게 조각되어 현대의 미인상에 견주어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밝은 갈색 피부, 갸름한 얼굴, 커다란 눈,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가늘고 긴목의 형태로 현재까지도 이집트 예술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데, 이 흉상이 바로 네페르티티의 조각상이다.

네페르티티의 기록이 기원전 1367년 이후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도 의문이다. 무덤은 물론 그녀에 관련된 유물, 유적 그리고 기록이 사라졌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기록 실종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었다.

첫째는 아케나톤 재위 14, 이집트에 전염병이 유행했는데 이때 네페르티티가 사망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아케나톤이 사망하고 다음 파라오인 투탕카멘이 즉위하기 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세멘크카레가 등장하는데 이 세멘크카레가 실제로는 네페르티티라는 설이다.

 

네페르티티

셋째는 기원전 1367 네페르티티가 아케나톤의 사랑을 잃고 왕비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설이며 네 번째는 아케나톤의 태양신을 도입하는 이단행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녀도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설이다.

그런 와중에 네테프티티의 조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조상은 기이하게도 왼쪽 눈동자가 없는 모습이다. 이 결과 네페르티티 조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소녀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 또는 추한 여인으로 보이기도 하는 등 여러 얼굴로 보인다. 한마디로 정말로 네페르티티 왕비를 조각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대한 설명도 여러 가지로 제시되었다.

첫째는 고대 이집트 궁중 조각가였던 투트모스 네페르티티를 사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원한을 담아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이미지를 섞어 만들었다는 설이다. 둘째는 조각가가 실물보다 자신의 조각상이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조각을 미완성인 상태로 남겨놓았다는 설이며 세 번째는 네페르티티 조각상을 밀반출했던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밀반출 과정 중 훼손시켰다는 설이다.

그런데 스티얼린 박사는 이들 모두를 부정한다.

이 흉상은 보르하르트 박사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의 요청에 따라 한 조각가가 만든 것으로, 원래 목적은 고대 이집트의 안료를 입혀 그 빛깔을 테스트하고 왕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걸이를 걸어 놓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공작이 이 작품을 보고 진품으로 여겨 감탄을 연발하자 보르하르트 박사는 그에게 무안을 줄 수 없어 사실을 숨긴 것이 결국 오늘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스티얼린 박사는 이 조각이 가짜라는 근거로 왼쪽 눈이 처음부터 아예 제작되지 않았는데 이는 조각을 사람과 동일시한 이집트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어깨를 수직으로 잘랐는데 이는 유럽 스타일, 고대 이집트에서는 수평으로 잘랐다고 밝힌다. 이런 주장에 대해 베를린이집트박물관에서는 발끈했다.

 

미녀와 스캔들은 항상 잘 팔리는 소재로 상업적 선정주의이다.’

 

여하튼 네페르티티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학자들의 관심거리인데 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기우리는 것은 네페르티티의 미라.

네페르티티의 무덤에 매장된 보물은 물론 유물, 기록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미라를 약탈하리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3대 미인으로 꼽는 네페르티티의 미라가 어디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실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2015 그녀의 미라가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사실 네페르티티의 흔적을 찾았다는 주장은 오랜 세월 동안 수 차례 나왔다.

2003년 영국 요크대학의 조앤 플레처 박사1898년 프랑스의 이집트 고고학자 빅터 로렉이 발견한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던 '젊은 여인'이라는 이름의 미라가 네페르티티의 미라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미라의 훼손 상태가 심해서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이 미라가 네페르티티의 흉상과 유사하다고 느껴 12년간 미라의 가발 조각들과 뼈의 형태 등을 분석한 결과 미라를 싼 천이 당시 왕족들만이 사용한 고급 천이었다는 것과 최상의 약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왕이나 왕비의 미라를 만들 때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팔이 꺽여져 있다는 점 그리고 미라의 양쪽 귀에 귀걸이 구멍이 있다는 점 등이 네페르티티의 흉상 모습과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카이로유물관리위원회>이 미라가 15세 소년의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선 플레처 교수가 지목한 양쪽 귀에 귀걸이 구멍은 당시 고대 이집트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했던 풍습이지만 왕비들의 경우 귀를 뚫지 않고 가발을 이용해서 귀걸이를 착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6번이나 출산을 했다고 알려진 네페르티티 왕비라기에는 이 미라의 골반이 너무 작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네페르티티의 미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에 진짜 네페르티티의 미라를 찾기 위한 수색 작업이 본격화되었는데 애리조나 대학의 니콜라스 리브스 박사는 이집트 투탕카문 파라오의 무덤에 네페르티티의 미라가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투탕카문이 죽자 그녀가 단기간 이집트를 다스렸다고 알려지는데 2014년 투탕카멘의 무덤 속에 다른 벽으로 이어지는 벽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벽 안에 네페르티티의 미라가 있다는 것이다. 벽에 균열이 발견됐는데, 이는 벽 뒤에 비밀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리브스 박사는 현재 투탕카멘의 무덤이 본래 네페르티티를 위해 축조되었는데 투탕카문이 갑자기 사망하자 네페르티티를 위해 만든 무덤에 투탕카문을 매장했다는 것이다. 즉 파라오가 아닌 왕비의 무덤으로 건설했는데 이를 확장하여 투탕카문의 무덤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가설을 감안한다면 이 무덤의 주인이 될 만한 여왕은 네페르티티뿐이다.

한마디로 네페르티티도 투탕카문과 함께 같은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투탕카멘의 무덤이 다른 이집트 파라오들의 무덤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토비 윌킨슨 박사X선을 이용해 벽 뒤에 실제로 그럴 만한 공간이 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는데 정말로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기존 무덤에 손상을 입히지 않은 채 새 무덤을 발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결론이 먼저 나와야한다고 주장했다. 근간 네페르티티 무덤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다.

여하튼 아케나톤이 이집트에서는 유일신 개념을 도입하는데 실패했지만 그의 유일신 개념은 사라지지 않았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오늘날 서양 문명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데, 유일신의 개념은 유대교로부터 파생되었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 있을 때만 해도 유일신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다신교였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에게 유일신 개념을 심어준 것은 모세. 대체로 모세는 제19왕조에 살았던 사람으로 추정되며, 18왕조에 살았던 아케나톤의 믿음을 알고 히브리인들을 결속시키기 위해 유일신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말은 아케나톤이 서양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