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33) : 이집트의 영광(14)

Que sais 2021. 3. 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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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시 전투는 무려 3300년 전에 벌어졌음에도 양측에서 가장 많은 장병들이 참전한 대규모 전투로서 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집트는 전차병을 포함하여 20,000명의 장병을 동원했고 히타이트도 35,000명이나 동원했다.

람세스 2는 직접 5,000명의 장병으로 구성된 아몬 사단을 지휘하고 역시 각각 5,000명으로 구성된 , 프타, 세트로 이름 지은 세 개의 사단이 뒤따르도록 했다. 각 사단은 250명으로 구성된 20개의 중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파라오는 카데시 남쪽에 있는 산악지대에서 멈추었다가 북쪽에 있는 샤브투나라는 도시로 진행했다. 그 도시의 남쪽에는 오론테스 강의 여울목에 통로가 있었다.

이 때 두 명의 베두인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투항했다. 그들은 히타이트 군대가 북쪽의 거의 180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알레포 부근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 때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은 카데시를 통과한 상태였고 나머지 세 개의 사단은 아몬 사단보다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투항한 베두인의 정보를 통해 적이 매우 멀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전투태세를 갖추지 않고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두인은 무와탈리시가 보낸 첩자였다. 히타이트 군대는 실제로 파라오와 지척인 카데시 북동쪽 성채 안에 집결하여 숨어 있었다. 그들은 우선 람세스 2세와 후발 사단을 분리시킬 계획으로 2,500대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전차병을 투입하여 아몬 사단을 뒤따르던 사단을 급습하였다. ‘사단이 히타이트 군의 공격으로 궤멸되자 무와탈리시는 곧바로 람세스 2세가 지휘하는 아몬 사단을 공격했다. 이 급작스러운 공격으로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 역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신인 아몬을 의지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전투에 참가하여 직접 장병들을 독려했다. 이때 히타이트 공격에 대해 다소 놀라운 기록이 남아있다.

 

모든 나라가 나에게 대항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 있었다. 반면 나는 철저히 혼자였고 내 곁에 아무도 없었다. 나의 대군들도 나를 떠났다. 전차부대 병사 중 어느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들에게 소리쳤을 때도 그랬다. 전차부대여. 그대들은 얼마나 비겁했는가?’

 

다행하게도 지원군인 나아룬 군과 사단이 도착하여 꼼짝없이 사로잡히기 직전의 람세스 2세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나아룬 군은 가나안인 외인부대 병사들로 구성된 특공대라 할 수 있었다. 이들의 도착은 람세스2세가 미리 계획해 둔 작전이었는데 절묘하게 그 시기가 맞아 들어간 것이다. 포위망에서 구출된 람세스는 모든 장병들을 지휘하면서 오히려 반격에 나서 히타이트 전차병들을 카데시 남쪽으로 몰아냈다.

여하튼 부조의 설명을 융통성있게 해석한다면 그는 죽음을 초월한 군인다운 강인함을 지녔으며 결국 승리를 차지할 정도의 자질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람세스 2가 스스로를 파라오들 중 가장 위대한 전쟁영웅으로 만들었는데 학자들의 엄중한 검증에 의하면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시는 자신의 군대가 쫒기고 있음에도 18,000명에 달하는 주력부대를 투입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부에서는 이미 이집트 군의 일부가 궤멸되었기 때문에 협약으로 끝날 외교를 예상하고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무와탈리시는 양국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히타이트가 이집트를 점령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선 현 터키 지역에서 이집트까지를 일사불란하게 통치한다는 것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히타이트의 동쪽에는 아시리아가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에 아시리아가 공격해 오면 전선이 길어져 양 지역을 방어하기에 힘들므로 차라리 이집트와 협정을 맺어 아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전투 기록이 남아있는 세계 최초의 군사보고서

카데시 전투에 대해 현대인들이 잘 알 수 있는 것은 3,3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대한 수많은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람세스 2는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건축물을 카데시 전투 후에 건조했는데 그는 자신이 세운 건물 거의 모두에 카데시 전투에 대해 기록했다. 이 벽화들은 보고서라 부르는 간략한 내용으로 상황을 설명한 후, 전투에 임하는 람세스 2세와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하부의 부조벽화는 전투의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하나하나 정교한 기록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투에 대한 독창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글도 첨가되어 있다. 내용은 당연하지만 람세스 2세가 이 전투에서 철저하게 적을 패배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했다는 것으로 추후에 어느 국가에서나 있었던 개선장군의 기록과 같다.

 

꼼꼼하게 기록된 날짜들을 계산해 보면, 이집트 원정군이 카데시 근처에 도달하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람세스 2세는 피람세스를 출발하기 전에 이미 여러 곳으로부터 전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으므로 히타이트 군에 언제든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람세스 2는 카데시 전투에서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기록이 역사적으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쟁이지만 전쟁의 결과는 그가 설명한 것과는 반대라고 인정한다. 카데시 전투는 승리자라고 적은 이집트의 기록뿐만이 아니라 패배자라고 적힌 히타이트 측의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양 측의 자료를 철저히 분석한 결과 정황상 카데시 전투는 람세스 2세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완패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카데시 전투이후 시리아의 중부와 북부가 히타이트의 지배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당시 역사상 최대의 전투였던 역사의 현장에서 이집트가 승리했다면 그 지역을 히타이트에게 내어주었을 리가 없다. 또한 람세스 2세가 이집트로 돌아갈 때 전리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전리품도 주로 적의 시체에서 걷어낸 무기와 말 따위가 전부로 실제로 그가 승리 없이 곧바로 후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투 장비를 보아도 당시의 자료를 보면 히타이트가 이집트보다 월등하였다.

히타이트는 당시 철로 된 무기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집트는 이와 반대로 청동제의 무기를 사용했다. 히타이트 제국 안에 있는 하튜샤의 제철소에서는 상질의 철제 무기, 갑옷, 철제 기구 등을 생산했다. 철제무기가 청동제 무기를 가진 이집트군을 괴롭혔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다.

특히 히타이트의 가장 큰 무기는 전차로, 일반적으로 마부 1, 사수 1, 전투병 1명이 타고 전광석화와 같이 적군을 공격했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에 히타이트는 항상 30,000여명의 군인을 상시로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반면에 이집트 군은 한 전차에 두 사람씩 탔다. 대부분이 장교인 전차 주인 한 사람과 마부 한 사람이었다.

 

현대와 유사한 국제조약

카데시 전투의 진상이 제대로 알려진 것은 이집트의 기록과 똑같은 히타이트의 기록 역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고학 사상 가장 믿기 어려운 우연과 행운이 겹친 것으로 간주한다. 1906년 독일의 베르린대학에서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설형문자를 연구하는 휴고 빈클러는 터키의 보가즈쾨이(Bogazköy)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오토만 박물관과 함께 공동으로 히타이트(Hittite)의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바빌로니아 설형문자로 적힌 판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빈클러 판(tablet Winckler)이다. 이 판은 기원전 1270, 람세스 2와 히타이트의 하투시리스 3(Hattushili III)간에 맺어진 평화협정이다. 동 협정에 대한 내용이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벽에 새겨져 있다.

 

람세스2세 세계최초의 평화협정문

여기에서 유명한 외교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히타이트 왕 하투시리스 3세가 람세스 2세와 교환한 동맹 조약의 정본이었다. 현재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에 사본이 전시되고 있는데 이를 특별히 교환된 것이라는 것은 이집트에서도 이 때 교환한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육로로 2,000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장소에서 교환된 동일 문서가 3000년 이상이나 지나서 발견된 것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이다.

협정이 생기게 된 원인은 물론 카데시 전투 때문이다. 전투의 결과 이집트가 패배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나 결론적으로 이집트가 점령되거나 합병된 것은 아니므로 일부 학자들은 무승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므로 카데시 전쟁으로부터 15년이 경과한 후 두 나라는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

놀랍게도 그 조문은 현대의 국제 간에 체결되는 조약과 완전히 같은 체계였다.

표제는 위대한 왕, 이집트 국왕이며 용자인 람세스와 히타이트 국의 위대한 왕 하투시리스와의 사이에, 평화와, 위대한 왕자에 적합한 우호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조약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히타이트 국에 외적이 들어오고 위대한 왕, 히타이트 왕 하투시리스가 람세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적에 대해서, 나를 도우라라고 말씀한다면, 위대한 왕, 이집트의 국왕 람세스는 그 보병대와 전차대를 파견하여 적을 살육하고 히타이트 족을 위하여 복수할 것이다.

 

물론 동일한 문구로 이집트가 공격당했을 때 히타이트 군이 원조한다는 조항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두 나라의 왕권 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적혀 있다. 불가침 조약도 체결되었다.

 

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지 않는다.

 

이 조약을 보증하기 위해 양국 간에 체결된 조약은 은으로 된 탁자에 기록하며 1,000명의 하티 신과 여신, 1,000명의 이집트의 신과 여신이 증인으로 기록되었다. 만약에 누구든지 조약을 어기는 자는 저주받아 그 나라와 신하들이 멸망하며 조약을 지키는 자는 축복을 받으라고 적혀 있다.

이후 양국은 자신들의 조약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협정의 방법인 히타이트의 마토르네페투라(사우스카누) 공주가 이집트로 출가하여 람세스 2세와 결혼했다. 또한 왕후들인 네페르타리와 히타이트의 왕비인 푸두케파소식을 서로 교환했고 서로 교환 방문도 했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유적에는 카데시 전투의 기록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세계 최초의 전투보고서를 보는 것 만으로도 흥미있는 일이므로 이집트를 방문할 때 주의하여 살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