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35) : 이집트의 영광(16)

Que sais 2021. 3. 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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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와 네페르타리의 사랑>

람세스290여살 까지 살아있는 동안 수많은 왕비가 있었음은 수많은 자식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애처가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녀와 같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한 명의 연인이다. 보라. 그녀는 마치 아름다운 한 해를 시작하기 직전에 빛나는 새해 첫날의 별과 같다. 순결한 그녀, 피부가 빛을 발하는 그녀. 영롱하게 쳐다보는 눈, 달콤하게 이야기하는 입술, 가늘고 긴 목과 부드러운 윤곽이 드러나는 가슴, 잘록한 허리, 황금보다 더 찬란한 팔, 연꽃의 꽃받침 같은 손가락, 땅에 발을 디디는 고귀한 걸음걸이. 내게 인사하면 그대에게 내 마음 송두리째 빼앗기도다.’

 

세상에 이런 찬사를 받은 사람은 바로 람세스 2세의 첫 번째 부인인 네페르타리. 네페르타리에 대한 이런 찬사는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 보관된 옴린 파피루스에 적혀 있는 글이다.

 

아부심멜 네페르타리하토르소신전

네페르타리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뜻인데 사실 그녀의 생애는 명성과는 달리 그녀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많이 있지 않다. 네페르타리가 13살 때, 15살의 람세스 2와 결혼했고 람세스가 파라오에 오르자 이시노프레와 함께 왕비에 책봉된다. 람세스 2세가 왕위에 오르고 초기 20년간 네페르타리는 왕비로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다. 아부심멜에 네페르타리의 소신전을 세워줄 정도다.

람세스 2세가 파라오에 오른 지 25년째 되던 해에 사망하였으며 슬하에 아들인 왕세자 아문-헤르-케페셰프와 딸 메리타멘(Meritamen)을 두었다. 네페르타리가 죽자 메리타멘은 아버지 람세스 2세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람세스 2세가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을 세워주었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다. 람세스2세에게 단 한 명의 부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의 후계자인 13째 이들 미네프타의 어머니 이시노프레가 있는데 그들 두 명 모두 왕족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 이시노프레는 람세스2세가 파라오가 되기 전에 그와 결혼했는데 그는 이시노프레를 위한 신전을 지어주지 않았다. 또한 그녀가 남편 람세스2세와 함께 있는 입상도 발견되지 않는데다 그녀에 대한 기록도 없다.

한마디로 이시노프레는 일생동안 네페르타리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녀는 궁극적으로 네페르타리에 강타를 던졌다. 람세스2세의 4번째 아들 케무아세프타 신전의 최고 사제가 되었고 멤피스에 자신의 어머니인 이시노프레의 기념비를 건설했다. 더구나 그의 아들인 미네프타는 람세스 2세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시노프레가 전에는 결코 체험하지 못한 승리로 볼 수 있다. 당시 미네프타는 파라오가 될 때 60살이 훨씬 넘었기 때문이다.

람세스 2세는 네페르타리, 이시노프레 외에 5명의 위대한 왕비들이 있는데 그 중 세 명은 그의 딸이었다. 당시에 이런 결혼은 당연한 일이였다. 더구나 람세스2세는 카데시 전투에 따라 히타이트의 공주인 마토르네페루라를 왕비로 맞이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58세다. 아부심멜 신전에 이런 사건이 적혀있다.

 

이때 하투시리는 큰딸을 금과 은이 가득한 화려한 선물과 명예 표창 선물과 함께 이집트의 왕 우세르마아트레-세테펜레에게 보냈다.’

 

아부심멜 신전은 람세스2세의 역작이며 소신전은 네페르타리를 위해 건설했다. 그런데 네페르타리는 아부심멜 신전 축성식 때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중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으로 그녀는 아부심멜 신전이 준공된 후 얼마 안 되어서 사망했다.

람세스 2세가 왕좌에 오른 후 항상 그의 옆에 있었던 위대한 왕비는 람세스 2세가 왕비들의 계곡에 준비해 둔 무덤 속에 매장되었다. 세계를 놀라게한 네페르타리의 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람세스2세의 탁월함은 그의 용병술이다. 그는 수많은 아들들을 멤피스와 헬리오폴리스의 사제, 또한 군대의 요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파라오와 비견된다는 카르나크의 아몬 신전 사제장에는 그의 아들을 임명하지 않았다. 람세스 2세가 천부적으로 정치가 자질을 갖고 있었다는 뜻으로 그의 장기간 통치기간 동안 자식들 간의 왕위다툼은 한 번도 없었다고 알려진다.

이집트 역사에서 람세스2세보다 더 많은 건축물을 만든 파라오는 없다. 그처럼 많은 조각상과 금석문, 신전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람세스 2세의 예술가들은 그처럼 많은 작품들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조각 방법을 사용했다. 이를 람세스 2세 양식이라고도 부르는데 한마디로 부조의 벽을 양각에서 음각으로 바꾼 것이다. 전체적인 배경을 파낼 필요없이 벽면에 형상을 새기는 방법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람세스 2세의 입상이 거의 모든 신전에 세워져있는데 람세스 2세의 치세가 남보다 길었다고 하지만 이들 모두 당대에 조각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매우 독창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기념비 둘레의 파라오를 뜻하는 카르튜슈에 선왕의 이름대신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입상 자체가 람세스 2세를 묘사하는 것이 되었는데 몇 천 년 전에 새겨진 이의 진위를 따지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 람세스2세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데 사실 학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집트의 역사를 다룰 때 철저한 분석과 검증이 필요한 이유다.

 

<람세스2세 무덤>

람세스 2는 근래에 계속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우선 람세스 2세의 미라가 여권을 받아 프랑스에서 곰팡이를 치료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그의 미라가 발견된 것은 고고학상 기적 중 기적이라고 설명된다.

우선 람세스 2세의 묘인 KV7은 당대의 파라오 전통에 따라 왕가의 계곡에 매장되었다. 그는 그의 아들의 무덤인 KV5KV8 사이에 있는데 그의 묘는 초기 18왕조 무덤의 구부러진 축 계획에 따라 축조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의 다른 무덤들과 달리 특이한 위치에 배치되어 주기적으로 계곡을 업습하는 돌발 홍수에 취약했다. 한마디로 람세스2세의 무덤은 최악의 장소에 건설되었다는 뜻이다.

람세스2세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전체 무덤은 820미터에 달한다.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큰 규모이지만 무덤을 건설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암석들이 나와 무덤을 계획대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자 새로운 디자인으로 매장실과 매장실 입구 등을 변경하여 건설했다.

그러므로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 무덤 자체가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많이 손상되었지만 벽화 일부분은 남아 있었다. 또한 도굴이 되었지만 나무와 청동으로 된 샤웁티, 조상 파편, 유리 조각, 방해석으로 된 배 조각, 몇몇 장례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의 미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18817월 이집트 경찰은 미발견된 파라오의 무덤에서 나왔음이 틀림없는 초우량 부장품들이 국제미술품 시장에 나오자 이를 특별조사하여 도굴꾼 무하마드 압달 라술을 체포했다. 그는 카이로박물관장인 프랑스 고고학자 가스통 마스페로가 파견한 에밀 브르크슈 박사에게 자신이 부장품들을 빼낸 곳을 안내했다.

그런데 그가 안내한 곳은 하셉수트 여왕이 세운 장제전 위쪽 약 60미터 지점에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놀랍게도 그 속에 무려 40여개의 호화로운 관들이 무더기로 있었다. 브르크슈 박사는 이들 관의 주인의 이름을 읽어가다 그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람세스 2라는 글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세티1, 그의 부인인 아모세 네페르타리, 아흐모세, 아메노피스 1, 투트모세 3 등도 있었다. 이집트 역사를 이어온 파라오들의 미라를 도굴에 대비하여 이동시켜 보관한 것이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조사한 결과 몸 안에는 파란색 천 조각에 금속성 금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람세스2세 시대 세트신을 숭배하였는데 세트가 붉은 머리를 가졌으므로 미라 역시 금발로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미라에서 발견된 모래 입자 등을 현미경으로 분석 한 결과, 람세스 2세는 이집트 북부 나일강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방부 처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또한 람세스 2세가 치료를 받기 위해 프랑스로 넘어가게 된 람세스 2세의 미라를 훼손한 곰팡이다에달레아 비엔니스 프리에스라는 버섯 모양의 균류였는데 프랑스 과학자들은 코발트 60을 이용해 감마선 처리로 이들을 성공리에 퇴치했다.

 

한편 1995년 왕가의 계곡에서 켄트 박사가 우연하게 람세스 2세의 가족묘를 발견하여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현재도 발굴이 계속되어 규모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큰아들인 허코세프의 이름 등이 적혀는 것은 물론 이곳에 매장된 사람은 여자는 없고 모두 남자로 숫자만 해도 90기나 된다.

이는 람세스 2세의 자식이 아들딸 모두 100여 명을 넘어 200여 명이라는 당대의 또 다른 기록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한다. 람세스 2세 가족무덤은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큰 무덤으로 일부 도굴되지 않은 부분도 있어 앞으로 많은 화제를 일으킬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적으로 제20왕조 람세스 3세 시대에는 왕자들의 묘가 왕비의 계곡에서도 만들어졌다. 이것은 왕비의 계곡의 동쪽 마디나트하브에 위치한 람세스 3세의 기념 신전과의 관계 때문으로 왕비의 계곡이 왕의 가족 매장지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왕가의 계곡 최후의 대발견, 뉴턴, 19969

유적의 보존, 뉴턴, 199912

네페르타리, 위키백과

http://narmer.info/kv/kv07pl.htm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장 베르쿠데, 시공사, 1996

역사의 지배자,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오늘의책, 2002

신성한 건축, 캐롤린 험프리 외, 창해, 2005

유네스코 세계 고대문명, 생각의 나무, 2006

이집트 역사 100장면, 손주영 외, 가람기획, 2006

Egypt, Bonechi,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