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34) : 이집트의 영광(15)

Que sais 2021. 3. 4. 09:06

youtu.be/IAqmW7uZ9SM

<외국인과 결혼하지 않은 이집트 공주>

이집트가 특유의 전통이 3000년 이상 계속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 있다. 그중에는 이집트인들의 결혼관에서 기인한다는 다소 생소한 주장도 있다. 그것은 이집트 파라오가 전통적으로 공주들을 외국인과 결혼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근친결혼으로 자신의 아내로 맞거나 가족의 다른 구성원과 결혼하기를 권장했다는 것이다.

고왕국 초창기부터 이집트 파라오는 많은 왕비를 거느렸다. 현대적인 감각으로는 이해되기 어렵지만 이집트인들은 많은 왕비의 숫자야말로 파라오가 일반 사람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규모 하렘을 유지한다는 것은 파라오가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결혼은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므로, 파라오는 가능한 한 많은 왕비를 갖는 것이 기본이었다.

반면에 이집트 공주가 외국으로 시집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멘호테프 3적부터 이집트의 그 어떤 왕도 공주를 외국인에게 시집보낸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본인은 바빌론의 두 공주 및 미탄니의 두 공주와 결혼했음에도 말이다.

이집트에서 공주를 외국에 보내지 않는 것은 물론 공주가 왕족이 아닌 남자들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했다. 이와 같이 공주를 외국인이나 왕족이 아닌 사람과 결혼시키지 않는 것은 결혼으로 인해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혹시라도 벌어질지 모르는 왕위 계승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아케나톤

학자들은 이집트 왕비들 상당수가 파라오의 친누이나 이복누이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자신의 가족과 결혼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근친간의 결혼이 파라오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와 이시스남매지간이다.

파라오는 신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과 결혼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인 근친과 결혼해 신의 혈통을 이어갔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왕실의 근친결혼은 왕손의 숫자를 줄임으로써 왕위 계승권을 보호해주는 기능도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신비한 파라오라고 칭했던 아케나톤이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했고, 이집트의 영광을 상징하는 람세스 2의 경우, 67년간이나 통치하면서 100명 이상의 자녀들을 낳았다고 전하는데, 학자들은 람세스가 자신의 과 결혼하여 낳은 딸 즉 손녀딸과 다시 결혼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타부근친상간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근친상간이라는 말만 들어도 심각한 거부반응 일으킨다. 사실 근친 간의 섹스를 의미하는 근친상간은 다른 타부와는 달리 행동은 고사하고 그런 욕망을 의식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학자들은 근친상간을 부정하는 엄한 타부가 인간들에게 뿌리내리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 즉 타인과의 관계가 성립됨으로써 비로소 자기라는 위치를 갖게 된다. 인간은 부모에 대해서는 자식이고 동생에 대해서는 형이나 오빠이고 남자에 대해서는 여자라는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부모나 가족이 죽었을 때 슬퍼하는 것은 가족이 죽어서 애통하다는 뜻도 있지만, 가족 죽음으로 인해 자기를 구성하던 가족의 속성, 즉 자기의 일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친상간은 이러한 신분관계를 파괴하며, 신분관계가 파괴되면 자기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만약에 딸이 아빠와 섹스를 한다면 아빠는 딸에 대해 아빠가 아니라 한 명의 남자가 되어버린다. 두 사람의 인간이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라는 신분이 있어야하는데, 근친상간은 한 사람이 두 개의 신분을 지니게 되어 가족제도가 파괴되기 때문에 이를 타부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박사는 친자 간의 심리를 연구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즉 근친상간에 대한 심리를 예리하게 분석했다. 남자아이는 엄마, 여자아이는 아빠에 대해 애정을 느끼는 반면 동성에 대해 증오라는 서로 반대되는 심리를 느낀다.

인간은 특히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소위 부친살해(父親殺害)라는 독특한 생각을 거쳤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아들은 태어나면서 최초로 어머니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그 사이로 뛰어드는 사람이 아버지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를 경쟁자로 보게 되며 이런 경쟁의식 증오심으로 이어진다. 아들의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아버지가 사라졌으면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친살해의 욕구.

그러나 실제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대신 상징적인 절차로 순화된다. 즉 아버지를 부정하고 극복하여, 아버지보다 더 훌륭하게 되거나 최소한 아버지와 다른 사람으로 변하여 유사부친살해의 의식을 거행한다.

프로이트는 아들이 이러한 부친살해의 단계를 지나야만 가족공동체의 절대권력자아버지와 화하게 된다고 보았다. 아들과 아버지 간에 일종의 사회계약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계기로 아들이 아버지 혼자서 독점하고 있던 어머니, 누나, 여동생을 자기 손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단념한다고 보았. 충동 포기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본능의 포기, 상호의무의 수락, 신성불가침의도의 선언이 이루어지고 도덕과 권리 개념이 시작된다는 것이. 그래서 어느 아들도 아버지 자리에 들어서서 어머니와 누이들을 소유하겠다는 근친상간을 포기하고 이족 간의 섹스를 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 같은 프로이트의 학설은 현재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현대까지도 근친결혼이 통용되는 곳이 예상 밖으로 많이 있다. 예컨대 동아프리카의 아잔데 귀족은 아버지와 딸 간의 근친상간을 허용하며 아라페쉬족은 남매간의 성관계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은 어머니가 다르면 형제자매 간에도 혼인을 금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 형제와의 재혼, 처의 자매와의 재혼이 자유롭다. 특히 사촌 간의 결혼이 허용되므로 도시인구의 약 2%, 농촌인구의 약 5%가 사촌 간에 결혼할 정도다.

독일과 영국에서는 숙부 질녀, 숙모 질남 간의 결혼은 금지하지 않는 반면에 중국이나 스페인은 사촌 간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다. 덴마크에서는 부모와 입양한 아들 간의 결혼이 허용되지만, 프랑스에서는 양자와의 결혼을 금지한다고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양자로 받아들인 경우 이혼하거나 사별하여 친자관계가 소멸되어도 결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파라오에서 탈락한 왕자는 퇴출>

이집트에서 왕자들 중 어느 한 명이 왕위에 오르면 나머지 왕자들은 왕자로서의 신분을 상실한다. 파라오가 되지 못한 왕자들은 집권하는 쪽에서 볼 때 너무나 위험한 존재이므로 측근에 그대로 남겨두어서는 안될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런 제도적인 장치가 이집트에서의 왕위 계승문제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적이 없는 이유다.

오랜 기간 동안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가족은 당대 파라오와 그의 어머니, 누이들, 그의 왕비들과 아이들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아버지, 오빠나 남동생, 남편이라는 관계를 통해 왕실의 일원이라는 신분을 얻은 이집트 왕녀들은 평생토록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왕궁에서의 생활이란 하렘의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므로 야심 있는 여자들로서는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일이 될 수 있.

공식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후궁들의 경우, 하렘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들이 왕이 되어 왕의 어머니라는 직함을 얻는 것뿐이. 하렘에서 얼마든지 왕을 살해하고 대체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는데, 투탕카문하렘의 암투에 의해 살해됐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3000년이라는 장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기록만 검토해보면 반역이라든가 쿠데타와 같은 정변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정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도 생각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집트인들이 파라오의 안녕마아트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 설사 일어났더라도 그것을 기록하는데 매우 인색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이집트인들은 기록을 매우 신성시하고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기록 자체가 어떤 힘을 얻어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키는 동기를 갖게 만든다고 여겨 기록의 엄밀성무척 강조했다. 어떤 불미스러운 일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그 불미스러운 내용이 다음에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과 근거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어떤 사람이 위대한 업적을 쌓아 그 공적을 벽화 등에 기록했더라도 그가 불명예스런 일을 하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기록을 지워버렸다. 그에 관한 흔적을 지우는 방법이야말로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바로 그런 금기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외국에 나가 있던 세소스트리스가 고국으로 돌아오자 그의 부재 기간 동안 국왕 대리로서 일했던 동생이 그를 영접했다. 그 동생은 세소스트리스를 연회에 초대했고 그도 아들들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그러자 왕의 동생은 그 건물 주위에 나무 단을 잔뜩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세소스트리스는 그제서야 그 사건의 진상을 깨닫고 자기와 함께 연회에 참석한 왕비와 상의했다. 왕비는 다른 사람들이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아들 둘을 그 불 속에 던지라고 조언했다. 세소스트리스는 왕비가 말한 조언대로 하여 두 아들이 불타서 죽는 사이에 왕과 다른 아들들은 무사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뒤 왕은 자신의 땅으로 돌아와 동생에게 복수했다.'

위와 같은 내용이 전달될 수 있었던 것도 헤로도토스가 이집트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전해들은 내용을 자신의 책에 적어 남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헤로도토스가 아니었으면 구전이 아닌 바에야 위와 같은 불상사는 절대 알려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