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72) : 스핑크스(1)

Que sais 2021. 3. 11. 20:27

youtu.be/VPKApezkIWc

이집트가 남다른 독특성으로 지구인들의 시선을 끌지만 그 중 스핑크스도 남다른 주목을 받는다. 그야말로 이집트를 대표하는 간판 타자이기 때문이다.

스핑크스는 아랍어로 공포의 아버지란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교살하다는 뜻의 스핑게인이란 단어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집트어로 살아 있는 형상이란 뜻의 셰세프 앙크가 스핑크스의 어원이라고 본다.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근동(유럽에 가까운 동방의 여러 나라가 있는 지역, 터키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고대인들이 꿈꾸던 피조물 중 가장 완벽한 상상의 동물을 숭배하였다. 그 동물은 사자의 앞부분, 황소의 뒷부분,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구성되어 있는 스핑크스였다. 이 중에서 기자에 위치한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과 사람의 얼굴이 결합된 형태이지만 날개는 없다.

 

스핑크스

다양한 어원처럼 스핑크스의 기원에 관한 해석 역시 분분하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고고학자 및 과학자들이 몰려들어 많은 조사를 했고 이를 주제로 한 학자들의 수많은 논문들이 제출되었지만 아직까지 기자 고원의 대스핑크스는 누가 언제 왜 지었는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스핑크스는 쿠프 파라오가 대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채석장을 개발하는 도중에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회석으로 된 바위의 언덕 형태가 동물이 무릎을 꿇고 있는 형상과 비슷하므로 조각가가 이 바위 언덕의 천연적인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고 스핑크스 조각의 영감을 얻었으리라 보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사막에 나타나는 독특한 지형인 야르당(yardang)때문에 스핑크스 형태의 거대한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야르(yar)는 투르크어로 가파른 언덕이란 뜻인데, 마치 배를 뒤집어놓은 듯한 작은 봉오리 모양의 야르당타클라마칸 사막이나 이집트 서부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따라서 바람에 의해 자연적으로 깎인 야르당의 모양에서 영감을 얻은 이집트의 고대 기술자들이 불쑥 솟은 야르당의 앞부분을 쿠프 파라오의 머리 모양으로 조각했을 거라는 설명이다.

여하튼 이집트인들은 천연적으로 동물 모습을 한 바위 언덕을 길이 73미터, 11.6미터, 높이 20미터의 엎드려 있는 거대한 사자 형태와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정리한 것으로 스핑크스는 고대세계가 건축한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조각상이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로는 스핑크스를 건설한 사람은 쿠프가 아니라 케프렌으로 추정한다. 1853년 케프렌의 계곡 신전 부근을 발굴한 프랑스의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는 스핑크스의 얼굴이 케프렌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스핑크스의 머리 및 두건, 휘장을 비롯해 전반적인 인상은 케프렌의 조각상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스핑크스 앞으로 뻗은 앞다리 사이에 있는 투트모세 4세의 석비에도 케프렌이 스핑크스를 만들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스핑크스를 건설한 이유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추측된다.

첫째는 스핑크스 자체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주는 경외의 대상이며 의학과 인체에 대한 비밀을 갖고 있어 건설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스핑크스가 인간에게 생과 사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므로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스핑크스가 피라미드를 보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여 케프렌이 자신의 피라미드를 보호할 목적으로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세번째 설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공식적인 건립연대에 의문

지금까지의 정설은 케프렌이 스핑크스를 건설하였다는 것이지만 최근에 제출된 3가지 가설은 기존 이집트학의 통설을 완전히 무너트린다.

1991년 미국의 보스턴대 지질학자인 로버트 쇼크, 토머스 도베키 교수 등은 지질학적인 관점에서 케프렌보다 훨씬 선대인 기원전 7000년 혹은 그 이전에 스핑크스를 축조하였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는 미국의 몽타주 전문가인 프랭크 도밍고가 제기한 가설로 스핑크스의 얼굴은 케프렌 파라오를 모델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카이로박물관>에 있는 케프렌의 조각상과 스핑크스의 얼굴을 세부적으로 대조하여 그동안 알려진 스핑크스의 주인공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마지막으로는 에이드리언 보발 박사가 제기했다.

그는 첨단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여 기원전 1500년 무렵 춘분 아침 사자자리가 스핑크스의 동쪽 지평선에서 떠올랐을 것이라고 이론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사자 모양의 스핑크스가 이러한 천문학적인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 그 시기에 건축되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보발과 그레이엄 핸콕이 공동으로 저술한 신의 지문창세의 수호신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자 스핑크스가 전통적으로 기원전 2500년경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기 전인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조각되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도 생겼다.

세계 4대 문명 중에 하나인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200년경에 비교적 갑자기 일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시기에 도시, 신전, 상형문자, 탁월한 미술 등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기원전 30클레오파트라 7의 이집트가 로마에 멸망하기 전까지 약 3천 년간 이집트 왕국이 존재했다.

 

스핑크스. 쿠프 대피라미드

그런데 스핑크스가 쇼크 박사의 주장처럼 기원전 7000년에 건설되었거나 보발 박사의 추정처럼 기원전 1500년 이전에 조각되었다면 그것을 누가 만들었을까하는 의문이 제일 먼저 제기된다. 그 해답이 밝혀진다면 세계 문명사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될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주장들은 이집트 최초의 기록보다 수천 년 앞선 시대에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할 정도로 잘 조직되고 부유한 미지의 또 다른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나 오래되어 완전히 잊혀진 또 다른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은 아틀란티스 대륙이 살아오게 하는 여운을 남긴다. 사실 스핑크스의 건축 연대를 조정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아틀란티스와 같은 문명이 빙하기 동안 남극대륙에 실존했다는 증거로도 이용해왔다.

 

스핑크스 건축연대를 조정하자

고대문명사에 있어 가히 핵폭탄을 터뜨린 것과 같은 쇼크 박사와 보발 박사의 주장은 불가사의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미를 당겨주었다.

사실 전문가들끼리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대립을 보는 것은 항상 재미있는 일이다. 특히 쇼크와 보발같이 새로운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여 기존 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더욱 재미있는 일이다.

스핑크스의 건축 연대를 둘러싼 논쟁은 아마추어 이집트학자인 존 앤터니 웨스트 박사로부터 발단이 되었다. 그는 열정을 가지고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의 실존설을 주장했는데 그는 먼 옛날 화성에 존재했던 문명이 지구의 여러 고대문명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웨스트 박사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일반적인 생각보다 과학적으로 훨씬 발전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집트인들이 또 다른 선진문명으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가 그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동기는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슈발레르 드 뤼비크 박사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나의 위대한 문명이 이집트를 휩쓸었던 거대한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우리는 기자의 서쪽 암벽에 조각된 스핑크스홍수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사자 형상인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을 제외한 몸통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물의 침식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뤼비크의 글을 읽은 웨스트 박사스핑크스 몸통의 심한 침식이 일반적으로 이집트 학자들의 견해인 바람과 모래에 의한 침식이 아니라 세차게 흐르는 물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기자 고원에 있는 유물들은 두 가지 형태의 풍화 작용을 겪었다.

하나는 바람이 모래를 날려 유물의 얇은 층을 조금씩 벗겨낸 형태다. 이 경우 유물들은 각진 모양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스핑크스의 경우 다른 유물과는 달리 깎인 부분이 둥글고 기복이 더 심하게 풍화됐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강수에 의해 풍화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이집트의 기록된 역사시대에 심한 홍수를 일으킨 강우현상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모순이 생긴다. 스핑크스가 위치한 기자 고원은 기원전 3천년부터 줄곧 사하라 사막이었다. 때문에 침식 흔적이 뚜렷할 만큼 많은 양의 비나 눈이 오지 않았다. 케프렌이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면 비나 눈에 의해 침식된 흔적이 나올 수가 없다는 설명이다.

여기에서 웨스트 박사는 과학 지식을 무기로 자신의 주장을 견지했다. 스핑크스에 침식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홍수를 기원전 9000년 무렵 빙하기 말에 빙상이 녹을 때라고 올려 잡으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파라오시대 이전에 나바티아 우기라고 부르는 훨씬 습한 기후가 15000년부터 기원전 5000년 사이에 간헐적 폭우를 특징으로 하는 습윤 기간을 겪었다. 그 후로 건조기가 계속되었는데 웨스트 박사는 장기간에 걸친 침식을 감안할 때 스핑크스의 건축연대가 최소한 기원전 70005000년 사이라면 이 부분을 말끔히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빙하시대까지 스핑크스가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는 것이다.

웨스트는 지질학자인 로버트 쇼크 교수를 설득하여 함께 이집트를 방문한 후 자신의 예측대로 스핑크스 침식의 일차적인 요인은 심한 장마가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우선 스핑크스가 비의 침식을 받은 암석의 특징인 물결 모양의 침식현상이 보인다고 발표했다. 또한 스핑크스 둘레의 수로에도 비에 침식한 것과 유사한 형태를 발견했는데 기원전 250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기자 고원의 다른 유물들은 스핑크스와는 달리 모가 난 침식현상을 보인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의 주장은 거침없다. 인공 지진을 일으켜 지질 구조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핑크스 서쪽, 즉 후면의 석회암은 표면에서 1.2미터 깊이까지 풍화를 겪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1.82.4미터로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기존의 주장처럼 스핑크스가 기원전 2500년에 축조되었다면 피라미드와 풍화 정도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측면과 전면을 먼저 만들고 후면은 나중에 건조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물론 처음의 건조 시기는 풍화 정도를 감안할 때 기원전 5000년 이전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