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피라미드 석관의 미스터리>
세계7대 불가사의로 지목되는 대피라미드에서 그동안 제기된 미스터리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대피라미들의 건설 시기는 물론 수레조차 없었던 시대에 어떻게 대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있느냐는 계속 학자들을 괴롭혔다.
그동안의 설명은 간단하다. 고왕국 4왕조 때인 쿠프 파라오 때 그동안의 갈고 닦은 피라미드 건설 노하우를 통하여 거대한 피라미드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나일강 건너 수 킬로미터 떨어진 채석장에서 굴림대, 로프, 나무 썰매, 뗏목 등을 이용해 대체로 20년에 걸쳐 건설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한겨레의 오철우 기자는 토목공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대피라미드는 노예나 일반인을 마구잡이로 불러다가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극도로 효율적인 관리 체계와 고도의 기술을 기반으로 매우 숙련된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설명했다. 즉, 오늘날의 건축술에 버금가는 고도의 기술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왕의 현실로 알려진 곳을 구성하는 개당 70톤에 이르는 100개의 석재는 다른 작은 돌들과 같은 석회암이 아니라 화강암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카이로에서 900킬로미터 떨어진 아스완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건축공학과 토목공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피라미드가 단지 돌을 적당히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세기에 피라미드를 연구하여 피라미드학을 개척한 플린더스 피트리 경(Sir Flinders Petrie)은 자신이 피라미드를 직접 측정해 보고 기자 대피라미드에 적용된 정밀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당시에 사용되었을 측정용 막대자는 밤낮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할 정도로 조잡했다. 한마디로 그런 장비로는 대피라미드와 같이 정교하게 방위부터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피라미드 밑변 길이는 남쪽 면 230.45미터, 동쪽 230.39미터, 서쪽 230.36미터, 북쪽 230.24미터다. 230.3미터에 대해서 최대 15센티미터의 차이가 난다. 또, 피라미드 밑면의 네 모서리는 거의 직각에 가깝다. 최근에 측정한 바에 의하면, 밑면의 남동쪽 모서리는 89도 56분 27초, 북동쪽 모서리는 90도 3분 2초, 남서쪽 모서리는 90도 0분 33초, 북서쪽 모서리는 89도 59분 58초로서, 90도에 대해서 최대 변위의 오차는 0.07% 이내다.
전체 건물의 방향을 보면, 기자 대피라미드는 그 네 밑변이 각각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르키고 있다. 우선 북쪽 변은 2분 28초 서쪽 방향으로 돌아가 있고, 남쪽 변은 1분 57초 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동쪽 변은 5분 30초 북쪽으로, 서쪽 변은 2분 30초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수준이 어느 정도로 정밀한 것인가는 천문대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
학자들은 현존하는 유명천문대 중 가장 정밀한 천문대는 파리 천문대를 꼽는다. 그런데 이 건축물도 자오선에 대해 6도나 기울어져 있다. 기자 대피라미드의 남북 방위는 겨우 3분 정도 어긋나 있다.
오철우 기자는 이 정도로 정밀하게 방위를 결정하는 나침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침반이 정북을 가리키지도 않을 뿐더러 수시로 그 방향이 조금씩 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목적으로 천문용 방위각 측정 장치(Astronomical Alt-Azimuth Instrument)를 사용하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더라도 이에 맞먹는 정밀 계산을 했음이 틀림없다는 설명이다.
밑변의 틀을 잡은 뒤에도 현실적인 난점이 있다. 오늘날 건축을 할 때 전체 모양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대각선 측량을 한다. 그런데 대피라미드의 경우는 건축 초기에 대각선 측량이 불가능했다. 대피라미드 가운데 존재하는 돌출된 암석이 시야를 가려 대각선 측량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거의 정확한 정사각형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것은 피라미드 건설 기술자들의 승리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당시 사용이 가능했을 도구와 방법만으로 그런 정밀도를 성취했다는 것은 오직 그와 같은 고도의 정밀도를 달성하기 위한 거의 초인적인 노력이 뒤따랐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한마디로 당대에 상상할 수 없는 수퍼천재가 열악한 공구로 성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반론을 제기한 학자가 등장했다. 대영박물관의 고대 이집트 담당관이었던 에드워즈 박사는 모서리를 완벽한 직각이 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정밀 측정 장치가 피라미드 건설 당시에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피라미드가 단지 숙련된 노동력과 단순한 도구에만 의존해서 건설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차원이 다른 화강암>
학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왕의 현실이 파라오의 돌로 알려진 화강암을 사용했는데 이를 어떤 도구로 어떻게 다듬었느냐이다. 피트리 경은 1884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집트인들에 의해 남겨진 문자들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왔고, 이제 많은 학자들이 돌에 각인된 이런 문자들을 쉽게 해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집트인들의 고대 지식과 기술을 나타내는 물질적 증거에는 관심조차 표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던 박사는 「고대 이집트의 진보된 기계 가공술(Advanced Machining in Ancient Egypt)」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왕의 방에 사용된 43개의 들보를 다듬은 기술을 검토했다. 비록 고대 이집트 시대에 어떤 간단한 바퀴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화강암 들보에 나 있는 기계 자국은 그보다 훨씬 뛰어난 기술적인 성취가 당시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아마도 직선톱과 둥근톱, 튜브형 드릴, 그리고 놀랍게도 오늘날 선반과 유사한 장비를 썼음이 틀림없다.‘
직선톱과 둥근톱, 그리고 드릴과 선반 등은 오늘날 재료 가공에 사용되는 주요 공구들인데 과거에 이런 공구들을 사용했다니 놀라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플린더스 피트리 경도 대피라미드의 화강암 석관을 자세히 조사한 후 그것을 가공하는 데 여러 종류의 톱들이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 석관의 외부가 최소한 길이 2.44미터 이상되는 청동으로 만든 직선톱에 의해 잘렸을 것으로 발표했다.
문제는 당대에 구리는 발견되었지만 본격적인 청동도구는 등장하지 않았을 때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무른 구리로 톱을 만들었다고 하여 돌을 다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들 톱으로 단단한 화강암에 흠집내기조차 어렵다는 점이다.
이에 페트리경은 톱날 끝에 다이아몬드가 박혔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 사회에 다이아몬드가 사용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으므로 1884년 그의 다이아몬드 가설에 관련 학자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보다 실무적인 문제는 화강암 석관의 내부를 어떻게 파냈느냐이다. 이 작업은 석재를 암반에서 잘라내는 것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피트리 경은 이 작업에 원형톱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분명한 증거로 ‘파라오의 현실’에 사용된 화강암 중에서 이런 원형톱의 나선형 톱날 자국처럼 보이는 자국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나선 톱날 자국이 회전톱의 1회전에 2.5센티미터를 파고들어간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런 가공은 오늘날의 현대적인 드릴을 사용해서 사암이나 석회암과 같이 무른 암석을 가공할 경우에도 어려운데, 화강암과 같은 단단한 돌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피트리 경은 이런 가공을 수작업으로 했을 때 1톤에서 2톤 정도의 압력을 가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이를 이론적으로나 실험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했다.
크리스토퍼 던 박사도 당시에 화강암과 같이 단단한 암석을 가공하기위해 적절한 강도로 제작되지 않은 청동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명백히 잘못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라미드와 신전을 건축하기 위해 이집트인들이 채석하고 놀라울 정도의 정밀도로 절삭해낸 수백만 톤의 석재들은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믿던 것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더 진보한 문명의 일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수백만 톤의 돌들이 청동제 정(chisel), 까뀌(adze), 그리고 나무망치와 같은 원시적인 손작업 도구들로 채석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절대 이런 것들로 채석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담금질로 강화된 청동기로도 화성암을 다듬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특히 화강암 표면을 문질러서 윤기를 낸 기술은 이런 원시 손도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당대의 청동기 기술로는 어림없는 보다 강한 재질의 공구가 사용되었어야 한다는 뜻인데 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이아몬드 급 강한 보석이 박힌 청동기로 조금씩 쪼아서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화강암 표면을 윤기나게 가공하기 위해 연마제와 같은 것을 사용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작업을 통해 커다란 관의 내부를 모두 파내고 다듬었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석하는 이외에 다른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1883년 플린더스 피트리 경의 논문에서 쿠프 파라오의 화강석 관의 제작에 대한 의문점을 지적하자 많은 학자들이 대안을 제시했다. 존 에반스 박사는 다이아몬드가 붙은 공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금강사와 같이 충분한 강도를 갖는 연마제를 사용하면 구리나 뼈, 목재로 된 원통형 드릴로도 단단한 암석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런 드릴로 가공할 때 구멍 안쪽 벽면을 따라서 홈이 파일 수도 있음을 간단한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지만, 이 실험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멍을 뚫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피라미드 건설 방법을 연구한 라우 박사는 드릴의 끝에 부싯돌을 끼워서 실험을 했는데, 무른 암석의 가공에는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화강섬록암(diorite)은 이런 도구로는 택도 없었다. 연마제로 수정가루를 사용하여 나무 드릴로 가공했는데 그 가공 속도가 2시간 동안 무려 0.2밀리미터였다.
만만치 않은 일인데 여하튼 쿠프 파라오의 관은 거대한 화강암의 속을 다 파내었으므로 어떻든 4500여 년 전에 그런 기술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쿠프 파라오의 석관을 어떻게 파냈느냐도 미스터리이지만 고왕국 시대의 전인 선왕조 시대에 제작된 돌항아리들은 더욱 큰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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