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77)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2)

Que sais 2021. 3. 12. 17:48

https://youtu.be/BGCht6ivBQg

<끊이지 않는 도굴>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파라오의 노력은 초창기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왕가의 계곡이 묻혀있던 무덤들은 투탕카문의 무덤을 제외하고 모두 도굴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국가의 권력자가 파라오의 무덤을 도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집권층으로서는 자신들의 무덤에 갖고 갈 유물로 과거의 파라오 무덤에 묻혀 있는 물건들을 확보한다는 것처럼 매력적인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태어난 환경과 지위에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이승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만 충실히 하면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이집트인 사회에서 어째서 도굴이 끊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들지 모른다.

대답은 간단하다. 한정된 자원 아래서 일반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을 누린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말해 도굴은 이집트 사회에서 현재보다 더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기회였다.

이집트 고왕국 시대 등 초창기에는 파라오만이 미라가 될 수 있었다.  사후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파라오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미라가 된 파라오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공급해주지 않는다면 가 어떻게 저승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초창기에 이집트인들은 매우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했다. 장례식 때 세상의 모든 물건을 부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사자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줄 수 있는 카 신관을 고용하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신관에게 일정한 땅을 시주하여 그 땅이 계속 유지되는 한 계속해서 사자에게 제물을 바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파라오와 사제가 서로 독립되어 이집트를 지배할 수 있었던 계기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들이 사자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주고 의식을 거행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외적인 조건 즉 천재지변이라든가 정치적인 격변 등에 의해 이들 의식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을 위험성은 다분했다. 그러므로 고대 이집트인들이 고안한 방법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신관들이 의식을 빼먹더라도 자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장례물품들을 비롯하여 필요한 하인 등을 인형으로 만들어 무덤 속에 갖고 가는 것이다. 그러면 장례식이 끝난 후 샵티우샵티나 샤웁티로 불리는 인형들이 마법에 의해 살아나 죽은 주인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사후에 살 수 있는 또 한 번의 획기적인 변환이 일어났다.

 

사자가 심판받는 모습(심장과 깃털)

무덤 속에 물건들을 넣는 것과 함께 무덤의 벽면에 사자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들을 그리거나 부조로 새겨 넣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그림이나 글씨에도 영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무덤에 그려진 것이 사자의 사후에 그대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벽면에 사냥하는 장면이나 낚시를 하는 장면이 있다면 사후에도 낚시를 하고 사냥하며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이집트의 무덤들에 유명한 벽화들이 그려지는 동기.

그런데 시간이 흘러 파라오의 전통이 엘리트 계층, 중산 계층들로 이어지자 이들 모두 죽어서 미라가 되고 사후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자들을 무덤으로 가져가고자 했다. 그들도 파라오처럼 자신의 가 사후의 안락한 삶을 누리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귀족들이 자기들의 가 좀 더 우아하고 넓은 무덤방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히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부장품들을 넣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지속될 만큼 많은 부장품들을 공급한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대의 각종 물자들의 생산능력으로 보아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자 이집트인들은 좀 더 비용이 적게 들고 믿을만한 방법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장례물품들과 하인들을 상징하는 그림이나 축소 인형 형태로 제작하여 무덤 속에 집어넣어 장례식이 끝난 후 그 인형들이 마법에 의해 살아나 죽은 주인을 위해 일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우삽티나 샤웁티를 매장하는 이유다.

3왕조부터 개인들의 무덤도 벽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할 수 있다. 처음에는 영혼이 무덤 안에서 필요한 물자들의 그림이나 부조들을 그리거나 새겨넣었다. 그러나 이들의 상상의 나래는 더욱 펼쳐져 갈대밭이 펼쳐진 곳으로 이동하여 망자와 그의 가족이 오시리스 신과 더불어 인생을 향유하는 장면들을 그려넣었다.

이집트인들은 벽화의 그림이나 조각이 실제와 같이 현실화될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비품은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우샵티나 샤웁티 같은 인형 즉 망자를 보좌할 인형만 갖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비품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파라오와 그의 직계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황금 부장품들, 그림이 들어있는 파피루스와 나무관 등이 일반인들에게도 허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그동안 파라오의 특혜 중 특혜, 즉 파라오에 가까이 묻히는 중요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이집트 전역에서 일반인들의 묘지들이 태어났다.

이집트인들이 자신의 무덤에 남다른 공을 들이므로 살아있는 사람의 재산을 도둑질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부유한, 죽은 사람들의 무덤을 약탈하고자 하는 생각을 부추겼다.

특히 무덤에서 발굴된 물건들을 보면 장례식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갖가지 물건들이 안장되었다는 것은 더더욱 선조의 무덤을 도굴하는 유혹을 일으켰다.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상당 부분이 무덤 주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도굴꾼들에게 커다란 명분을 주었다. 도굴한 좋은 물건들을 자신이 생전에 직접 사용하다가 죽을 때 자기 무덤으로 갖고 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이다. 즉 도굴은 도굴꾼의 실생활과 저승의 부활에 대비하는 일석이조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물론 부장품 중에는 장례식을 위해서 만든 물건들도 있었지만 이것들은 대부분 조잡하고 약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무덤 속에 있는 물건들을 훔치거나 망자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자신을 위해 이런 금기를 깨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기도 했다. 무덤 속에 귀중품을 넣는 유서 깊은 전통에 이어 그에 못지않게 유서 깊은 도굴이라는 오래된 직업이 태어나는 것이다.

사실 장례부장품의 약탈은 이집트 믿음으로 볼 때 상당히 획기적인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의식의 맥락을 볼 때 부장품은 사자를 사후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형태로 변형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부장품은 사자의 영혼이 가질 수 있는 물질적인 것으로 이를 매개로 가족들은 사자와 소통하고 봉헌을 한다.

데이르엘메디나에서 발견된 일부 조각상은 죽은 가족들을 표현한 것이다. 무덤이 아닌 집 안에 안치한 선조들의 흉상은 사자의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대려오기 위한 물리적 수단이라 볼 수 있다. 즉 사자의 변신을 위해 그리고 사자와의 대화를 위해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대상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반드시 필요한 물품을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다면 약탈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말은 파라오의 무덤이 아니더라도 고대 이집트인들의 무덤을 도굴하려는 핵심 요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자를 훼손하고 모욕하는 범죄는 무덤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장의사의 작업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아이러니한 일이다. 집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곧바로 장의사에게 보냈다. 미라 제작소에서는 사자의 시신이 들어오면 장의사가 시신을 깨끗이 씻고 내장을 빼내고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 미라로 만든 후 장례식에 사용할 수 있도록 미라 주문자에게 보내 장례를 치도록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여자들이 죽을 경우 몇 일 동안 집에 두었다가 장의사에게 넘기곤 했다고 적었다.

 

지체 있는 사람들은 아내가 죽었을 때 곧바로 유해를 장의사에게 보내 미라를 만들게 하지 않는다. 아름답고 고귀한 신분을 지닌 여자들의 경우 더욱 그랬다. 그런 여자들의 유해는 사망하고 나서 사나흘 뒤에야 비로소 장의사의 작업장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누군가가 그녀들의 유해에 모욕적인 짓을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예전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한다. 어떤 자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 동료 일꾼들에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범행을 발각 당했다고 한다.’

 

시체를 훼손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지만 종교적인 의식이자 실용적인 의식 절차에 의해 만들어지는 미라의 작업장을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하튼 사자의 가족들은 사자의 시신을 장의사에게 보낸 후 70일이 지난 다음에야 붕대로 잘 감아놓은 미라 더미 하나와 내장이 든 단지, 그리고 미라를 제작하는 데 소요된 청구서를 받을 뿐이다.

문제는 자신들에게 도착한 미라가 정말 자기 가족의 유해인지, 미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장신구 등을 비롯한 필수 재료를 청구서처럼 모두 사용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장의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미라 제작 초기부터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근래 발굴되는 완벽한 형태의 미라들을 조사해보면 뼈들과 다른 잡동사니들을 마구 뒤섞어 놓은 것이 발견된다고 알려진다. 특히 후기 왕조나 그리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미라의 경우는 이런 경우가 더욱 많이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