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79)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4)

Que sais 2021. 3. 13. 10:54

https://youtu.be/IXcT7huqgGA

18왕조 즉 신왕국 시대부터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관행은 사라지고 새로운 형식의 묘를 지었다. 그들은 눈에 잘 띄는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요소로 특징되는 묘를 짓기 시작했다.

테베의 맞은편에 자리한 나일 강 서안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왕의 넋을 위로하는 신전을 짓는 동시에 테베 산 바위를 뚫어 각자의 무덤을 축조하는 것이다. 즉 망자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신전에서 일괄적으로 시행하도록 하고 무덤은 좀 더 관리가 편리한 피라미드의 기능을 하는 테베 산 밑에 축조하는 것이다. 바로 왕과 왕비의 계곡이다.

이들 계곡은 왕래가 잦은 큰길에서 다소 떨어진 은밀한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초창기에는 비교적 경비하기가 쉬웠다. 왕가의 계곡에 처음으로 묻힌 투트모세 1건축가 이네니자신이 주군의 무덤을 완벽하게 감추었다고 자신의 무덤 벽에 자랑스럽게 적어놓았다.

 

나는 나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가운데 절벽을 파서 폐하의 묘를 마련하는 작업을 감독했다.’

 

그러나 그의 호언장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집트에서 도굴이 얼마나 성행했는지는 람세스 2세의 치세 동안에 있었던 대규모 절도사건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람세스 2세는 범인이 체포되자 자신의 상속자이자 아들인 람세스 왕자를 재판관으로 임명했다. 조이스 타일드슬레이 박사의 글에서 실린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테베의 몇몇 신전에 딸린 창고를 관리하는 정부 관리가 신들의 재산을 처음에는 자기 아버지 집으로 빼돌리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개인 창고로 빼돌렸다. 그가 빼돌린 물자가 많았지만 그의 행위는 발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처벌을 대신해서 삼각주 북부지역으로 전보(轉補)되었다. 그런데 그가 떠나자 그의 아내와 딸이 계속 창고의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고 결국 꼬리가 밟혀 체포되었다.

 

람세스 2세 라메시움 장제전

당시 그녀들이 훔쳤다고 제시된 양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상당량의 포도주와 아마포, 가죽신과 소금, 2만 부셸의 곡식, 30두의 황소를 포함한 가축은 물론 몇 대의 전차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부셀은 곡물, 과실 따위를 재는 무게 단위. 1부셸은 영국에서 62파운드( 28.123kg), 미국에서는 60파운드(27.216kg).

기록에는 이들 이름이 적혀있지 않는데 이유는 그들의 기록을 지워버리기 위한 방편 중 하나다. 학자들은 이들이 도굴한 절대량을 볼 때 도굴 책임자가 당시에 상당한 위치에 있었던 고관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당시 부인이 대법원의 심리에 회부되어 왕자와 고관들 앞에 출두했을 때의 재판 기록은 다음과 같다.

 

관리 : 왜 창고 책임자에게 알리지도 않고 왕실의 관할 구역에 속하는 두 개의 창고에 무단히 들어갔는가?

부인 : 그 창고들은 제 남편이 관할하던 곳입니다.

관리 : 그대의 남편이 그곳을 관할하는 책임을 맡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을 떠나 다른 자리로 전보되었다.

 

부패한 관리 일가족이 빼돌린 물자가 앞의 설명처럼 많다는 것은 테베에 있는 창고나 무덤에 얼마나 많은 물자들이 쌓여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 기록에 의하면 람세스 2의 영혼을 모신 라메세움 신전에 딸린 곡식창고의 저장 용량은 16,522,000리터에 달했고 그것은 3,000가구(17,00020,000)를 일 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었다. 더구나 이들 양은 테베가 갖고 있는 저장 창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곡식창고를 비롯하여 수많은 저장고에 많은 물자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지역 사람들이 훔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도 아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에 이런 행동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람세스 2세의 황태자가 직접 심문하여 부인과 딸이 범행을 자백하자 곧바로 남편이 소환되어 범행을 추궁 받았다. 그런데 그는 반성하기는커녕 심문하는 관리들을 맹렬히 반박했다.

 

만일 우리 아버님의 소유물 속에서 훔친 물건들이 발견된다면 그 두 배를 배상하겠소. 없어진 물건들은 폐하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 모두가 공모해서 훔친 것이요.’

 

그는 한술 더 떠 파라오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자기한테 몹시 가혹한 행동을 저질렀다며 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항변했다. 불행히도 그 후반부의 결말은 남아있지 않아 부패한 관리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에서는 사형이 없었다고 알려진다. 죄의 경중에 따라 판결을 내린 후 각각의 죄인에게는 성벽을 쌓아올리는 노역을 부과했다. 그러나 앞의 경우 도굴꾼들의 이름이 적히지 않았음을 볼 때 응당 사형으로 응징되었을 것이다. 당시에 테베의 신전들에서 물건을 훔친 행위는 신들과 국가 양쪽의 안정을 저해하는 중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람세스 6세의 무덤의 경우 도둑이 붙잡혀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는 글이 파피루스 메이어 B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외국인 네사멘은 우리 일행을 맞아들인 뒤 네브마아트레-메리아멘왕(람세스 6)의 무덤으로 안내했다. (중략) 우리 일행은 모두 5명으로 나는 4일간 구멍을 뚫었다. 마침내 그 무덤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중략) 우리는 청동 솥 하나, 청동 주발 세 개, 청동제 물 항아리 하나를 찾아냈다. (중략) 우리는 그 물건들의 무게는 대략 구리 500데벤(1.8킬로그램) 정도의 가치가 있었으므로 한 사람당 100데벤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커다란 옷상자 두 개를 열었다. (중략) 그 속에는 색깔 있는 천으로 된 숄이 25장이나 들어 있었다.'

 

20왕조 람세스 9세의 심문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당시 테베 서쪽에 지어진 제13왕조의 무덤을 약탈하다가 체포된 도굴꾼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

 

'우리는 평소처럼 무덤에서 물건을 훔치러 갔다가 평소에 도굴했던 피라미드나 무덤과 다른 소베켐샤프 왕의 피라미드를 발견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간 구리 연장을 사용하여 이 왕의 피라미드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중략) 우리는 매장지 뒤쪽에 누워 있는 왕의 관을 발견했다. 또한 왕의 방 옆에서 그의 왕비 누브카아스의 관도 발견했는데 왕비의 미라는 석고 관으로 잘 보호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잡석들이 채워져 있었다. 우리는 왕과 왕비의 석고관, 목조관들을 열었다. 왕의 미라는 검 한 자루를 찬 채 당당한 자세로 누워있었고 목에 많은 부적용 장신구들과 금목걸이가 걸려있었으며 얼굴에는 황금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왕의 미라는 금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관의 안과 밖이 모두 각종 보석과 금,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우리는 왕의 목에 걸려 있는 장신구와 금목걸이는 물론 보석들을 모두 떼어낸 후 왕과 왕비의 관을 태웠다. 금은 물론 은과 동으로 된 물품도 갖고 나와 우리끼리 나누어 가졌다. 우리는 금을 8등분했는데 각각 20데벤을 가질 수 있었다. (중략) 며칠 뒤 테베의 관리가 우리가 도둑질했다는 소문을 듣고 나를 체포하여 테베 시장 안에 가두었다. 나는 내 몫에 해당하는 금 20데벤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테베 부두를 관리하는 책임자 카이모페에게 전했다. 그가 나를 풀어줘 나는 내 동료들을 다시 만났으며 그들은 다시 나에게 한 몫을 떼어주었다.'

 

현재도 금 1.8킬로그램은 대단한 양인데 일인 당 36킬로그램의 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부 도굴꾼들이 체포되어 처벌을 받아도 이들을 대신할 사람들이 항상 호시탐탐 피라미드를 약탈하는데 기꺼이 참여했다는 설명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굴을 위해 관리들에게 뇌물도 주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기록이 이어진다.

 

'재판은 정식으로 기록되었으며, 이 사건은 파라오에게 상정될 것이다.'

 

파라오에게까지 보고된다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에서 체포되어 법정에 섰고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할 경우 죄인은 코와 양쪽 귀를 자르거나 처형되어도 좋다고 신 앞에 맹세했는데 파라오의 무덤을 훼손한 도굴꾼은 이집트에서 가장 혐오하는 범죄자이므로 그에게 사형 이외에 다른 선고가 내려질 리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