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80)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5)

Que sais 2021. 3. 13. 11:06

https://youtu.be/1z6q-A5Xs0w

파라오의 무덤을 훼손할 정도의 도굴 행위가 우발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잘 조직되고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무덤을 지키는 관리들로부터 무덤의 비밀을 전해받기도 했다. 한 파피루스에 의하면 도굴꾼의 주범으로 테베 시장을 용의자로 지목하기까지 했다.

이 재판 기록에는 아멘호텝 3, 세티 1, 람세스 2세의 무덤들도 모두 약탈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앞에서 람세스 2세 등의 미라가 이리저리 옮겨진 내용도 있다. 특히 람세스 3세의 미라는 도굴꾼들에게 훼손당한 뒤 세 번이나 다시 매장되었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이장할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재위 17, 두 번째 계절 셋째 달 6, 오시리스 신이신 우세르마레-세테프네레(람세스 2)의 미라를 오시리스 신이신 멘마레 1(세티 1)의 무덤에 이장하기 위해 옮기다. 아멘 대신관 파이네젬이 기록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도굴범이 체포되었는데도 파라오의 무덤을 도굴한 것이 아니므로 죄를 묻지 않고 석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이집트 정부의 관심은 파라오 등 집권자에 한하므로 도굴이 일어나더라도 그건 이집트 안보에 관한 일은 아니었다. 이것이 최고 관리들의 비호 아래 도굴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집트의 거의 모든 무덤들이 도굴될 수 있었던 요인이다.

한편 피라미드 등이 수많은 도굴꾼에 의해 약탈되었지만 이를 복구하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9세기에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에서 왕의 시신은 람세스 시대(기원전 1292~1070)에 새로이 다른 목관에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왕국 시대의 수많은 무덤을 람세스 2세의 아들인 카엠와세트가 재건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그 효과가 오래가지 못했다. 복원된 건축물 등이 오히려 새로운 도굴꾼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도굴이 전 이집트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기원 9세기경 칼리프 알마문이 쿠프의 대피라미드를 공식적으로 약탈한 것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일반 도굴꾼이 아니라 이슬람의 지배자인 칼리프로 대피라미드에 천문에 관한 자료가 있다는 명분으로 대피라미드를 파헤쳤다. 그러나 그가 단지 천문 자료만을 얻기 위해 대피라미드를 파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대피라미드에 보물이 없다고 확인되었다면 천문대 자료를 얻기 위해 그 엄청난 공력을 들였을 리 만무하다는 주장이다.

여하튼 알마문의 지시에 의해 작업반들이 대피라미드의 현실까지 도착했지만 대피라미드가 이미 도굴되었는지 또는 알마문에 의해 약탈되었는지는 아직도 불문명하다.

이는 쿠프의 대피라미드와 같은 엄청난 구조물이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로든 명분을 세워 도굴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에 세워진 모든 무덤들을 손 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정보만 있으면 도굴은 굳이 도굴꾼이 아니더라도 정책 차원에서조차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랍어로 쓰여진 감춰진 진주와 고귀한 신비에 관한 책, 발견된 보물과 숨겨진 보물의 위치에 대한 안내서라는 제목을 가진 책에는 보물이 있는 정확한 장소와 보물을 소유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절차가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14세기 이집트에는 보물추적자 즉 도굴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하나의 기술로 강조될 정도라고 쟌 베르쿠데 박사는 적었다.

도굴에 대해서는 투탕카문의 묘를 발견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하워트 카터가 돋보인다. <세계7대불가사의 피라미드(XXXV) : 이집트의 영광(16)>에서 설명한 도굴꾼 라술의 사건이 마무리되자 잠시 도굴이 잠잠했다.

라술 사건이란 1881도굴꾼 무하마드 압달 라술이 하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위쪽에서 약 60미터 지점에 있는 작은 동굴에서 파라오들의 유품을 빼돌린 사건인데 이때 람세스 2세는 물론 그의 아버지인 세티1, 아흐모세, 아메노피스 1, 투트모세 3세 등의 석관들이 원래 무덤에서 옮겨져 있었다. 파라오들의 미라를 도굴에 대비하여 이동시켜 보관한 것이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도굴에 손을 대면서 살아왔던 쿠르나 주민들로서는 도굴의 매력을 떨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라술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뒤 바로 라술의 손자가 다시 도굴을 시작하더니 몇 개의 조직적인 도굴단이 조직됐다. 이 당시 도굴꾼 토벌대를 조직한 사람이 카터. 카터가 이 당시의 활약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무장한 노동자 한 무리를 이끌고 쿠르나에 있는 높이 300미터의 고개 정상으로 향했다. 그 고개는 새로 발견된 무덤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구멍 속으로 내려져 있는 밧줄 끝을 가리켰다. 잠자코 귀를 기울이니 밑에서 도굴꾼들이 일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래로 드리워진 밧줄을 잘랐다. 도굴꾼들이 도망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나는 내가 가져온 밧줄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것은 솔직히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도굴꾼들은 모두 8명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 밧줄을 타고 도망칠 것인지 아니면 도굴 현장에 더 머물 것인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요구했다. 상황을 깨달은 그들은 사라졌고 나는 무덤 속에서 밤을 보냈다.‘

 

도굴꾼들의 속성을 파악한다면 이 당시 카터의 용기는 사실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가 살해되지 않았다는 것이 기적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네페르티티 무덤 추정도

이때 새로 발견된 무덤에는 보물은 없었고 하셉수트 여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관 하나만 있었다. 투탕카문의 할아버지 아멘호텝 3의 미라도 발견되었다.

참고로 왕비의 계곡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무덤이 있는데 그것은 아케나톤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의 무덤이다. 네페르티티의 무덤은 <월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 황금광들이 뒤쫓고 있는 사라진 7대 불가사의 보물중에 하나인데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투탕카문의 무덤의 별실로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근간 투탕카문과 같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대발굴이 이루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나머지 6개는 칭기즈칸의 무덤, 17086월 컬럼비아 해안에서 영국 전함들을 피해 달아나 바다 속에 침몰한 스페인 겔리온선 산 호세 호, 러시아의 앰버 룸, 예수의 최후의 만찬 때 사용되었다는 성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렸다는 앙기아리 전투 벽화와 여성인권 운동가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대서양을 단독으로 비행 횡단한 최초의 여성인 이어하트의 비행기 잔해.

 

아멘호텝 3세

여하튼 투탕카문의 무덤도 완성된 초창기에 두 번이나 도굴꾼의 손을 탔다고 한다. 카터는 무덤이 매장되고 나서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도굴이 행해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도굴꾼들은 많은 물건을 가져가지 못했다. 아마도 도굴하다가 적발되어 체포되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어쩌면 도굴꾼이 뚫은 터널이 너무 좁아 규모가 크고 중요한 물건들을 빼낼 수 없었던 것일지 모른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고대 이집트 전 기간을 통한 파라오의 무덤이 투탕카문을 제외하고 모두 도굴된 것은 아니다. 1939년 고고학자 피에르 몽테삼각주 지역 동쪽에 있는 타니스에서 주거지역을 발굴하다가 우물 입구를 발견했다. 우물을 비우자 돌로 포장이 되어 있는 바닥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무덤의 지붕이었다. 우물은 도굴꾼이 무덤으로 들어가기 위해 파 놓은 것이다.

이 무덤은 제21, 22왕조의 수도였던 타니스에 매장된 파라오의 무덤 중 하나였다. 첫 번째로 발견된 오소르콘 2의 무덤은 이미 도굴되었으나 인근에서 발견된 프수세네스왕의 무덤네 명의 고관들의 무덤은 완벽한 상태였다. 이곳에서 은으로 만든 관, 금으로 세공된 마스크, 보석,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항아리들이 발견되었다. 비록 유물의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20062에도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불과 15미터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7개의 관어린이용 금관 1, 파라오의 문양이 새겨진 20개의 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유물과 비문들이 발견된 것이다.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나온 도기와 일치하는 조각들이 출토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와스 박사는 투탕카문을 낳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어머니 키야 왕비 또는 투탕카문의 왕비인 앙크에스엔아멘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때 파라오 무덤으로 알려져 투탕카문 무덤 발견 이후 더 이상 파라오의 무덤이 없다는 그간의 속설을 뒤집을 수 있다고 설명되었지만, 결국 파라오의 무덤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