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81)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6)

Que sais 2021. 3. 14. 13:00

https://youtu.be/PVwroc3OBeA

<조직적인 도굴의 장본인은 각국의 외교관>

나폴레옹의 원정 이후 유럽에서 이집트에 대한 열풍이 일자 이집트 유적에 대한 파괴와 해외 반출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는 이집트의 모하메드 알리 정부에도 큰 관련이 있다. 그것은 알리가 온갖 편의를 동원하여 도굴꾼들, 즉 모험가들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모하메드는 나폴레옹과 전투한 경력도 갖고 있는 터키인으로 1805년에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이집트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프랑스, 영국, 독일 등 많은 유럽 기술자들을 고용했다. 런데 기술자들은 모하메드 통치 초기부터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해 수많은 유적을 파손하고 반출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각국의 영사 등 이집트 주재 외교관들이 더욱 앞장섰다.

그들은 외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모하메드와 협상했다. 당시에 이집트 전체의 토지 및 노동력은 그의 소유였으므로, 집트에서 발굴하고 이를 반출하기 위해서모하메드 알리의 허가서 피르만(명령이라는 의미의 페르시아어)이 필요했다. 외교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피르만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언제든 그들이 원하면 모하메드 알리와 직접 면담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알리 역시 무턱대고 피르만을 내 준 것은 아니다. 이집트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금과 유럽의 기계 등 기술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각국의 영사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했다.

각국의 영사들은 피르만을 획득한 후 모험가 즉 도굴꾼들을 각지에서 모집하여 고용했다. 한마디로 각국의 영사 이름으로 유적을 발굴하거나 골동품을 사들였는데, 이는 조선왕조 말기 각국의 외교관들이 우리나라의 유물들을 대량으로 구입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에서 출생한 드로베티, 그는 프랑스로 귀화하여 1798년 나폴레옹 원정 때 대령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드로베티1810년 프랑스의 이집트총영사로 임명되어 알리와 교분을 쌓았으며, 1814년 총영사직에서 물러난 후 이집트에 계속 머물면서 고대유물 거래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때마침 1820년에 프랑스의 이집트총영사로 복직되었다. 드로베티는 프랑스 총영사라는 직책 모하메드 알리와 교분이 두터운 것을 이용 직접 유적 발굴에 참여하면서 각종 유물들을 수집했다. 그는 유물을 영사관으로 옮겨서 안전을 확보한 후 루이 18세에게 루브르 박물관을 위해 팔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루이 18세가 너무 비싼 값을 요구한다 거절하자, 샤르데냐의 왕 샤를 펠릭스에게 팔았다.

이것이 이탈리아의 토리노 박물관수준 높은 이집트 유물 전시품을 갖게 된 연유다. 이 박물관에는 유명한 아멘호테프 1, 투트모세 1, 투트모세 3, 아멘호테프 2세의 조상과 아멘호테프 3세의 스핑크스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집트 미술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명한 유물, 람세스 2세의 거대한 화강암 좌상소장하고 있는데, 좌상의 밑에는 드로베티를 위해 리포가 1818년에 발견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더욱 유명세를 탔다.

드로베티는 샤르데냐 왕과 만족할 만한 상담을 성공시킨 후 더욱 유적 발굴에 2차 수집품의 구매를 또다시 프랑스에 요청했다. 이때 샹폴레옹의 중재로 샤를 10세가 그의 수집품을 구입했고, 이것이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가장 유명한 이집트 유물 소장품이다.

드로베티만 이집트 유물에 눈독을 들인 것은 아니다. 영국의 이집트 주재 영사인 헨리 솔트도 드로베티와 같은 방법으로 유적을 발굴하는 것은 물론 골동품을 구입했다. 그의 1차 수집품은 대영박물관에 판매했는데 2차 수집품은 프랑스가 차지했다.

 

대영박물관의 로제타석

이 당시 루브르 박물관이 구입한 것 중에 유명한 것은 장밋빛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람세스 3세의 석관, 거대한 화강암 스핑크스 두 개 등으로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이집트 전시품 중에서 가장 많은 시선을 끄는 것 중에 하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집트 유물을 갖고 있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의 토리노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는 유독 거대한 유물들이 많은데 이는 당대의 각국 영사들이 대형 유물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현재 각국에 소장된 오벨리스크, 스핑크스, 석관, 거대한 조상 들은 이때에 옮겨진 것이 대부분으로 솔트에 의해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진 람세스 2세의 거대한 흉상은 대영박물관의 이집트 관 입구에 전시되어 그 위용을 자랑한다. 유명한 로제타석은 람세스 2세의 흉상과 멀지 않은 곳에서 볼 수 있다.

드로베트, 솔트와 같은 외교관만 이집트 유물에 관심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들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집트에 몰려와 피르만도 없이 비밀리에 유적을 발굴했, 이들이 수집한 유물들이 현재 전 세계의 박물관들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이집트에서는 이 당시 약탈된 이집트의 유산들을 돌려달라고 각국 박물관에 요청하고 있다. 과거에 약탈된 유산은 어떠한 명분으로든 원위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 초에 행해진 이집트 유물의 반출과 약탈에 대한 시각은 두 갈래로 나뉜다.

현재 외국 박물관에 수장된 중요 유물들의 대부분이 약탈에 의해 반출된 것이므로 이집트 정부에 반환해야 한다는 측과 이들 수장품이 약탈된 것은 분명하나 오히려 파괴될 뻔했던 많은 유물을 구해낸 공헌도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측이다. 즉 후자는 이들 유물들이 약탈된 것이 분명하더라도 반환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유명한 이집트 학자인 쟌 베르쿠데도 후자 편에 든다. 그는 1810년부터 1828년 사이에 13곳의 신전이 파괴되었는데, 그 신전들은 해외에 반출을 위해 약탈된 것이 아니라 이집트인들이 공장을 짓는 석재로 사용하거나 석회를 만들기 위해 용광로 속에 녹여버렸다고 한.

고대인들은 벽돌이나 돌을 접착시키기 위한 모르타르의 재료로 주로 진흙, 점토, 역청 등을 사용했는데 로마인들은 새로운 모르타르를 발명했다. 석회석을 용광로 속에서 가열하여 석회를 얻은 후 모래, 물을 섞는 것이다. 이 방식은 사용이 편리하고 견고해 현재도 많은 건축 현장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실제로 쿠프나 케프린 등 대피라미드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피라미드들은 외장 마감재를 사용하여 매우 말끔하게 마무리했으며 호화로운 그림과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추정한다. 케프렌 피라미드의 상당부에 이들 흔적이 남아있음은 물론인데 나머지 외장재가 모두 사라진 것은 이집트 현지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이들을 훼손 즉 파손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당대의 도굴꾼들이 이들 유물들을 외국으로 빼돌리지 않았다면, 수많은 이집트의 유물들이 사라질 운명이었는데 이들을 구해주었다는 것이다.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가 모두 약탈된 것은 아니지만 강대국이 식민지나 약소국에서 유산을 약탈해 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약탈 문화재제국주의 학자들에 의해 지식의 축적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되면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연구를 통해 얻은 지식은 다시 식민지 또는 약소국을 지배하기 위한 무기로 이용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강대국이 약탈한 문화재가 지배자들에게 통치기술을 제공한 후에도 그들이 구가했던 과거의 영광을 지속케 해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문화재 약탈국은 피약탈국들이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해도 교묘한 논리로 이를 회피한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논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비록 식민지에서 이들의 문화재를 약탈하였지만, 약탈 문화재를 본국으로 가져가 이를 과학적으로 연구를 하고 또 최선의 방법으로 보존해 왔으므로 오히려 피식민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면서 과()보다는 공()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특히 문화 발전의 대리인격인 박물관 등에서는 유물에 대한 지속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지식생산을 독려해 왔을 뿐만 아니라 문화재는 어떤 한 나라가 만들었더라도 그 나라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영국, 프랑스 등 서구 국가들은 오늘날 그리스 예술이 갖는 영향력에 대해 모두 자기 나라의 빼어난 문화예술 보존정책 덕분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본토에 남아있었으면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꼼짝없이 파괴되었을 유물들을 더욱 잘 보존하고 연구해놓았으니 오히려 더 고마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자신들이 전리품으로 여기는 약탈 문화재가 피식민국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생생히 기억되기 때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 문화유산을 만들어낸 사회는 비록 중요 유산들을 약탈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약탈을 당했지만, 자신들 고유의 역사를 재발견하기 위해서라도 약탈된 유물이 자신들의 품 안에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국은 문화재 반출에 관한 한 예외는 아니지만 유럽 등 제국주의에 의해 지배받던 다른 피식민국가들과 다소 다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식민국가들이 아직도 아프리카 피식민국가들에게 유산의 관리 능력 부족을 거론하면서 자신들의 박물관과 학자들의 연구가 약탈국가들의 홍보에 오히려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이런 설명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으로부터 유물을 약탈해간 나라들이 한국인에게 그 유물을 돌려줘야 하는 당위성을 폄훼할만한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으로도 확연히 구분된다.

프랑스의 경우 외규장각의 문서들을 약탈했지만 그 문서들을 공개하여 연구 자료로 삼은 적도 없으며, 일본의 경우는 한국에서 약탈한 유물들을 감추면서 철저하게 공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