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82) : 약탈 문화재 - 한국 (1)

Que sais 2021. 3. 14. 13:10

https://youtu.be/mCn-Q7tfsWI

<약탈문화재>

과거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현실 속에 다시 나타난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무단 정복, 강제 합병 등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중에 일어났던 수많은 폐해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피식민국의 상황 변화에 따라 적나라하게 표출되는데 그리스 예술에 대한 현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이유는 영국 및 프랑스 등이 그리스 문화재를 가져가서 연구해 이룩한 학문적 성과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러한 유물이 그 생산국에 남아 있었다면 무지와 무관심속에서 더욱 파괴되었을 것이라면서 보다 우수한 연구와 보관 능력을 가진 나라에 잘 보존돼 있음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피식민국들의 문화재 반환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약탈국들이 이와 같이 교묘한 논리로 문화재 반환을 거부하는 이면에는 자신들이 확보하고 있는 문화재를 일단 돌려주기 시작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반환 요구에 직면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 대부분의 대형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은 약탈문화재. 그러므로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외국 문화재를 반환하라는 요구는 결국 그들 박물관을 문 닫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라고 이해한다. 비록 약탈해 온 유물들이기는 하지만 이들을 반환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억지를 쓰면서 사안에 따라 장기 임대 등은 고려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재를 빼앗긴 것이 피해국들에게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조상의 얼을 빼앗긴 크나큰 상처로 생생하게 살아 남아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유산을 만들어 낸 사회는 과거 한 때 유산을 약탈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역사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라도 유물들이 자신들 품 안에 있기를 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1907헤이그 협약습격에 의한 경우라도 도시나 기타 지역의 약탈은 금지된다라고 규정한 이유다. 또한 1987유엔이 채택한 결의안 42-7원 국가에 중요한 문화적인 가치를 지니는 문화재의 반환은 자신들 문화유산의 대표적인 컬렉션을 구성하려는 해당 국민들에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명시했다.

약탈 문화재의 반환은 식민시대를 포함하여 과거의 모든 문제를 적극적으로 소화하고 정리해 나가는 불가결한 주제라는 것을 인식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약탈 전리품 반환 요구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 츠베탕 토도로프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했다.

 

약탈 전리품의 반환이야말로 식민주의가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계몽주의라는 싸구려 옷으로 치장한 하나의 착란이었다는 변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증명이 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반환>

강대국의 이런 안하무인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서 1980년부터 불고 있는 약탈문화재의 복원과 반환 운동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19934월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아부자 선언>으로 노예무역,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에 참여한 나라들이 아프리카에 지고 있는 도덕적 채무보상적 성격의 부채에 대해 언급하면서 약탈된 재산과 전통적인 보물들의 반환을 요구했다.  아프리카 인들이 감수했던 손해가 과거의 일이 아니며 약탈재산을 합법적인 소유주에게 반환하여 전례 없는 도덕적 부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집트가 빈환 요청하는 네페르티티

뿐만 아니라 중국1860아편 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약탈한 문화재의 반환을 각각 당사국에 촉구하고 있다. 한국 또한 1866프랑스 군대가 규장각에서 약탈한 의궤와 옥책문(玉冊文), 1922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오대산 사고에서 일본으로 보내 현재 궁내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의 반환을 각각 프랑스와 일본에 요청하고 있는 중이다.

약탈된 문화재가 각국의 법률상의 어려움 때문에 반환이 어렵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약탈 문화재의 반환이 이미 여러 차례 이루어진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1830알제리 함락 당시 프랑스 군대가 약탈한 알제리 태수 도장2003년 반환되었고, 1898년 독일 군대에 저항한 음콰카의 두개골1954년 탄자니아로 돌아갔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1893년에 약탈된 보물의 일부1977년 돌려보냈다.

1905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러일전쟁 당시 일본인들이 가져간 북관대첩비가 남한을 거쳐 2005년 북한에 반환되었고, 일본 동경대학교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일부는 반환이 아니라 기증형식으로 2006년 돌아왔다. 조선왕조실록의 반환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한국의 해외유출 유물 반환>

한국의 경우는 다른 피식민가들과는 다소 다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식민국들은 아직도 아프리카 나라들의 유산 관리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자기 나라 학자들의 연구가 아프리카 나라들의 유산 홍보에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런 설명이 적용되지 않는다.

프랑스외규장각 문서를 약탈해갔지만 그 문서를 공개하여 연구 자료로 삼은 적도 없으며 일본은 한국에서 약탈해간 유물들을 공개하지 않고 감추려고만 했다. 한국의 유산을 한국에 돌려줘야 하는 당위성은 그 어느 나라의 경우에도 비견될 수 없을 만큼 크다.

학자들은 간략하게 말한다. 현재 한국의 세계적인 위상은 과거와 아주 다르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일본은 물론 프랑스와 문화 및 경제적인 면에서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음도 과거와는 매우 다르다.

이런 마당에 약탈된 유산이 상호협력 관계에 장애가 된다면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양측에 모두 도움이 된다는 지적이다. 약탈 유산을 무턱대고 갖고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반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이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472년간(13921803)의 역사 즉 172,000여 일을 연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며 총 1,893888책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양의 역사서.

실록(實錄)이란 명칭은 어떤 특정한 역사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의 한자어 뜻을 그대로 풀면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 책이다. 대체로 실록이란 왕의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한 사실을 국가에서 주도하여 편년체로 편찬한 이른바 관찬 역사를 뜻한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실록은 내용과 기재 방법이 엄밀하게 정해져 있었다. 반드시 기재해야 하는 내용은 대부분 정치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왕의 공식일정, 국가의 공식행사, 주요 정치적 사건, 고위 관료의 인사, 천재지변 등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히 정치적 사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다양한 학문 분야의 내용과 사회 현상도 담겨있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은 물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총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편찬이 완성되면 장중한 의식과 함께 중앙의 춘추관 사고와 지방의 외사고에 봉안하였는데, 봉안까지 포함하는 실록 편찬의 전 과정을 의궤로 정리했다.

봉안식을 하기 전에는 봉과식(封裹式)이라 하여 실록을 비단 보자기에 싸서 궤짝에 넣는 의식을 미리 진행했다. 그만큼 실록을 신성시하고 체계적으로 보관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봉과식은 크게 왕에게 바치는 어람부록(御覽附錄)실록을 싸는 의식 과정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이 의식을 나누어서 진행한 것은 왕이 실록을 열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예 왕에게 봉안하지 않고 바로 사고에 봉안하여 왕이 열람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의 춘추관(春秋館)의 별칭인 사간과 사고를 그대로 계승하여 태종실록편찬할 때까지 한양에 내사고(內史庫), 외사고(外史庫)로는 충주사고(忠州史庫)를 두었다. 세종 21(1439)에 경상도 성주(星州)와 전라도 전주(全州)에 사고를 더 지어 실록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내사고인 춘추관실록각(春秋館實錄閣)외사고인 충주전주성주사고가 정비되어 4사고가 운영되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은 엉뚱한 사건으로 수난을 당하기 시작한다.

우선 중종33(1538)에 성주사고에서 비둘기를 잡다가 화재가 일어나 모두 불타버리는 사고가 일어났지만 다른 사고의 실록들이 있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실록에 일대 위기가 찾아온다. 당시 실록의 사고는 경복궁내 춘추관외사고 3 등 네 곳에 있었는데 문제는 4곳의 사고가 모두 왜군의 진격로에 있었다는 점이다.

 

강화사고

제일 먼저 피해를 본 것은 경상도 성주 사고. 왜란 초기에 왜군이 몰려온다고 하자 실록을 보존하기 위해 땅에 파묻었으나 결국 발각돼 태워졌던 것이다. 서울로 가는 길목에 놓인 충주 사고 역시 왜군에 의해 모두 타버렸다. 특히 충주사고는 고려 때 만들어진 사고였던 만큼 고려 이후의 서책들이 모두 없어지는 수난을 당했다.

경복궁 안에 있던 춘추관 사고는 흥분한 백성들이 불태웠다.

학자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이때 실록뿐만 아니라 승정원일기까지 대부분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왕이 세상을 떠난 다음 정리한 실록이 2차적 자료라면 승정원일기는 역대 왕의 하루 일과, 상소문 등이 그대로 씌어 있는 생생한 1차적 자료이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전주 사고본인데 실록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록은 전주 사고본을 모본으로 1606재인(再印)되어 내사고인 춘추관을 비롯하여 외사고인 강화묘향산태백산오대산의 5사고에 보관되었다. 그런데 춘추관사고이괄(李适)의 난과 정묘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지거나 산실(散失)되는 비운을 겪는다.

결국 4사고만 일제 강점기까지 내려왔는데 조선총독부1911오대산, 태백산, 적상산 사고본을 강제로 접수했다. 적상산사고본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되어 구황실장서각에 보관돼 있었으나 1950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정족산 사고와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했다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