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91) : 파라오의 저주(2)

Que sais 2021. 3. 18. 13:38

https://youtu.be/WhNEoaHglhE

<카르나본 경 설득>

카터 또한 자신의 행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발굴 작업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카터는 카르나본에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투탕카문의 무덤을 발굴하자고 권유했다.

사실 카르나본 경도 이런 카터의 제안이 엄청난 도박임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실패한 발굴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유럽의 부호로 손꼽히는 자신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파산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터와 카르나본 경에게 행운도 따랐는데 때마침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투탕카문 무덤 인근의 발굴권을 이집트 정부에 반납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도록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1914년 발굴을 포기한 것이다.

사실 데이비스는 카터의 조언으로 발굴에 관한 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들이 발굴한 무덤들은 명성을 얻는데는 충분했지만 이들 모두 도굴당해 별로 실속은 없었다. 데이비스가 발굴권을 포기한 이유다.

그러나 학자들은 데이비스가 조금만 더 버텼으면 카터의 조언으로 엄청난 행운을 잡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카터가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을 발굴하던 중 어느 바위 밑의 조그마한 방에서 투탕카문이라고 새겨진 도자기 컵과 금박 입힌 나무상자를 주웠다.

이는 투탕카문과 관련된 물건 가운데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그동안 소문으로만 알려진 투탕카문의 무덤이 근처 어디엔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는 증거였다. 그런가 하면 어느 구덩이에서는 하얀 토기로 된 12개의 항아리를 발견했는데, 그 항아리에는 아마포 묶음과 동물 뼈 그리고 여러 종류의 방부제가 들어있었다.

또한 근처에서 80여 명이 식사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도 발견되어 인근에 투탕카문의 무덤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졌다. 노동자들의 숙소는 대체로 작업 중인 왕의 묘 옆에 있었으므로 이것은 근방 아주 가까이에 왕의 묘가 있다는 증거였다. 결론적으로 이 노동자 숙소 바로 옆에 투탕카문의 묘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발굴권을 갖고 있는 데이비스는 자신이 발견한 보물의 중요성을 몰랐다. 이들 유물의 발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고스란히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넘겨주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원록 박사 역시 데이비스가 발견한 구덩이가 투탕카문의 미라를 방부 처리할 때 쓴 물건들을 보관했던 곳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원록 박사는 더 이상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원록 박사가 관심을 보였더라도 발굴권은 데이비스가 갖고 있으므로 그가 직접 발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원록 박사는 이 사실을 카터에게 살짝 귀띔했고, 카터는 카르나본 경에게 투탕카문 무덤을 발굴하자고 설득하며, 이집트 정부에 반납된 발굴권을 신청해 허가 받으라고 조언한 것이다.

카터의 이야기를 들은 카르나본 경은 행운의 여신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카터의 조언을 듣자마자 곧바로 발굴권을 신청했다. 당시 유물 발굴권은 금광채굴권이나 다름없었기에 정식으로 허가받기가 꽤 복잡하고 까다로웠는데, 카터와 고대유물국 국장 가스통 마스페로가 서로 잘 알던 사이였기 때문에 카르나본 경은 쉽게 허가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발굴권을 둘러싼 약간의 후문이 있다. 마스페로가 카터에게 허가증을 주면서 별다른 성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마스페로는 데이비스가 발굴권을 반납하면서 왕가의 계곡이 바닥났을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며 카터에게 너무 기대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물론 데이비스는 자신의 결정에 어떤 후회도 보이지 않았다. 데이비스는 이 말을 한 후 1년 뒤인 1915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카터의 성공을 보지 못했다.

이 당시의 발굴은 도박 중에 도박이었다. 발굴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발굴권을 받은 사람이 투자해야 하며 성공할 경우에 한해서 그 일부를 정부와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부자들이 발굴에 손을 대었다가 파산하였다. 데이비스도 그런 경우였다.

카르나본이 1914년 발굴권을 획득했지만 마스페로와 데이비스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발굴은 예상만큼 진척이 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으로 발굴은 중단되었다. 카터도 군에 징집되어 이집트 주재 영국군 정보부대에서 일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18년 카르나본경이 이집트로 돌아오자 카터는 카르나본경의 발굴에 다시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라는 투탕카몬의 묘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카터의 발굴팀이 파낸 흙만 무려 20만여 톤이나 된다고 알려질 만큼 어마어마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었다.

카터의 발굴 방식그리드(grid)으로 발굴 예정 지역을 작은 정사각형으로 나누어 하나씩 구석구석 철저히 파나가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4년이 넘도록 막대한 자금을 퍼부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카르나본 경은 카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더 이상 자금을 지원할 수 없으니 작업을 중지하라고 지시한 것은 물론 카르나본 경은 자신이 갖고 있는 발굴권까지 포기하겠다고 선포했다.

 

카르나본경과 카터

카터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나본 경의 말은 곧 발굴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곧 발굴 책임자인 카터가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결국 발굴자로서 그의 인생도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집념의 사나이 카터는 카르나본에게 계곡 지도를 보여주며 아직까지 손대지 않은 곳이 한 곳이 있는데 그곳을 발굴해보고 더 이상 발굴할지 아닐지를 결정하자고 설득했다. 그가 제시한 곳은 발굴 장소 인근의 지역이지만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방문하는 관광객을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발굴 작업을 하지 않은 곳이다. 카터는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좁은 구역이므로 일 년만 탐사하면 결과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때 카터도 카르나본에게 통 큰 배팅을 한다.

그는 카르나본에게 1 만 더 발굴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면서 자신도 발굴에 들어가는 비용을 일부 부담하겠다고 했다. 카르나본은 카터의 제안에 감동을 받고 발굴을 1년간 연장하는데 합의했다. 이 통 큰 배팅은 카터에게는 일석이조의 결실을 갖고 왔다. 카르나본경이 카터의 요구대로 발굴을 연장토록 허가하지만 자신이 영국의 부호 중에 부호인데 발굴책임자인 카터에게 자금을 부담시킬 수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집념의 사나이 카터>

카터의 제안으로 1년을 추가로 연장하여 발굴했음에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카터는 카르나본 경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221028부터 발굴하던 장소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한 마리의 카나리아를 가져왔는데 카나리아는 감독과 인부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여 황금의 새라고 불리었다. 카나리아가 곧 작업이 끝나므로 아쉬워하는 현장 인원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투탕카문의 묘 

1922114일 카터의 일꾼들은 6년 전 파기 시작했던 지점에서 불과 몇 십 미터 떨어진 곳이자 람세스 6세의 무덤으로부터 고작 4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 인부가 계단 같은 흔적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카터는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계단 양식으로 보아 투탕카몬이 살았던 18왕조 묘의 입구임이 분명했다. 표면을 석회로 입힌 입구에 지하 묘지를 경비하던 사람들 관인투탕카몬 파라오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현장을 확인한 카터는 드디어 찾고 있었던 투탕카몬의 묘지를 발견하였을지 모르니 발굴권을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라며 다음과 같은 전문을 급히 카르나본 경에게 보냈다.

 

마침내 그 골짜기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봉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무덤으로 입구를 다시 덮어놓고 경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축하합니다.’

 

학자들은 카터가 카르나본 경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라는 말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영국인답게 고지식한 면을 보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투탕카문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면서도 자신 혼자 무덤을 개봉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발굴 작업을 중단한 채 무덤을 원상태로 봉쇄했다. 한마디로 다시 무덤을 묻은 것이다. 카터는 카르나본 경이 도착할 때까지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조차 공개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만은 그의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카터가 발굴하던 장소를 다시 묻었다는 것을 안 다른 발굴 전문가들은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보안을 위해 매몰시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터는 주변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발굴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이집트의 언론을 비롯해 세계의 언론이 카터가 발견했을지 모르는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 추측기사를 보도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카터는 어떤 이야기도 발설하지 않고 스폰서인 카르나본 경을 기다렸다. 그런 그에게 전 세계의 언론이 놀랐다. 세기적인 발굴을 두고 카터처럼 거의 20여 일이나 함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평했다.

그런데 돌발적인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이에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던 황금의 새코브라에게 먹힌 것이다. 파라오 묘의 비밀을 밝힌 마스코트가 죽자 발굴의 전도에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터는 이런 소문에도 동요되지 않고 무덤을 봉쇄하는 일을 견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