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90) : 파라오의 저주(1)

Que sais 2021. 3. 18. 12:51

https://youtu.be/cSpU8O95wvs

이집트인들이 자신의 무덤이 개방되는 것을 가장 기피했는데 이는 자신들이 저승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방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19왕조 즉 이집트의 전성기에 사망한 투탕카문 파라오의 무덤이 현대에 발견되어, 고대이집트를 보다 충실하게 파악하게 만들어 준 기념비적인 고고학적 발굴 성과이지만, 당사자인 파라오에게는 안식을 방해받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파라오의 저주란 무덤을 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무덤의 주인공이 그동안 견지한 안식을 저해한 방해꾼에게 분노와 저주를 퍼붓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사자의 저주를 이집트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투탕카문 파라오는 자료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므로 혼란이 일어난다. 어느 이름이 맞느냐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매우 어려운 숙제를 안겨주는데 그것은 고대 이집트에서 나오는 글은 모음 없이 적었기 때문이다. 자음만 적었으므로 발성에는 여러 변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사용하는 투탕카문이라는 이름은 <이집트고유물최고위원회><카이로국립박물관>이 공식적으로 표기하는 것임을 적는다.

그러나 사자의 저주는 원래 도굴이라는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집트에서 도굴은 이집트식 장례문화와 함께 생겨난 곧 이집트의 역사일 정도로 매우 오래되었으므로 도굴의 역사가 이집트의 역사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사자의 저주, 파라오의 저주 역시 매우 오래된 것임이 틀림없지만 이곳에서는 투탕카문의 파라오의 저주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현대인에게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로 잘 알려진 투탕카문 파라오는 기원전 1343년에 이집트 18왕조의 반항아 아메노피스 4아케나톤2왕비 키야 사이에서 태어나 10세의 나이에 파라오가 되어 19살이 되던 기원전 1323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왕가의 계곡(Valley of Kings)에 묻힌 채 수 천 년 동안 잊혀졌던 투탕카문은, 사망한 지 3,245년 후인 19221026일 영국의 카르나본 경과 고고학자 카터에 의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무덤이 발굴됨으로써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왕가의 계곡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길이 500미터, 너비 1킬로미터의 골짜기다. 이집트 나일강 중류의 룩소르 서쪽에 있는 이 골짜기에는 기원전 20001000년 사이에 이집트를 다스렸던 거의 모든 파라오들의 무덤이 있다.

왕가의 계곡은 1875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이 당시에 이미 모든 무덤이 도굴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아직도 도굴되지 않은 파라오의 무덤이 남아 있을 거라는 신념에 찬 많은 사람들이 왕가의 계곡으로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특히 세계 7대 불가사의인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발굴되고 1873년 독일인 백만장자 슐레이만이 전설로만 알려졌던 트로이 문명의 유적을 발견하자, 고대 문명의 유적을 발굴하는 것이 마치 금맥을 캐는 것과 같은 유행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투탕카문의 무덤을 발굴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하워드 카터1874년 영국의 노퍽의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 11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업적이라고 알려진 투탕카문 묘를 발굴하여 궁극적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고고학자로 성공했지만 이의 배경이 되는 정규 교육 과정 즉 고전학이나 그 밖의 학문을 이수한 적이 없다. 한마디로 이집트학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세기의 발굴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아버지<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Illustrated London News)>전속 화가로 있으면서 가끔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유지들을 상대로 그림을 그려주곤 했다. 카터 역시 그림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집트라는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아버지와 똑같은 화가로의 길을 걸었을 것이고 아마 평생 영국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유물 발굴에 있어서 카터는 유난히 운이 좋았다.

아버지가 그림을 그려 준 윌리엄 애머스트 티센 애머스트(William Amhurst Tyssen Amherst) 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이집트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마침 카터가 아버지의 추천으로 그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 실력은 곧바로 애머스트 경으로부터 인정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애머스트 경이 관련된 <이집트학 모임>에서 전문가의 지휘 감독아래 이집트의 무덤에 그려진 벽화를 모사해 줄 화가를 찾고 있었다. 이때 애머스트 경의 부인이 카터의 남다른 그림 솜씨를 알고 그를 적극 추천했다. 1891년 그의 나이 고작 열여섯 살 때다.

이집트로의 출발이 확정되자 카터는 3달 동안 박물관에서 이집트 역사와 미술의 기초를 배운 후 이집트로 출발했다. 그림을 그리는 실력이 뛰어났던 카터는 이집트에 도착한 후 곧바로 인정을 받았다. 카터에게 찾아온 더욱 큰 행운은 애머스트 경텔엘아마르나아케나톤의 궁전 등 신도시 유적에 관심을 보인 것을 계기로 당대 제일의 이집트학자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William Matthew Flinders Petrie)으로부터 고고학적 발굴 기법 즉 발굴 과정이나 발굴 지역을 조직적으로 조사하는 법 등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훗날 카터페트리 경에게 배운 발굴지식이 투탕카몬 무덤을 발굴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카터는 사진과 관련해서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투탕카문 의 무덤 사진은 발굴 직후 그가 사진사를 지도하여 찍은 것인데, 당시의 카메라가 매우 조악했음에도 어떤 유물은 50회나 찍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카터는 사진 확보에 매우 공을 들였다.

그가 20세기 초의 여느 발굴자와는 달리 유물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하고 연구했다는 것은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자료 내역으로도 알 수 있다.

 

유물의 치수, 유물의 스케치, 고고학적인 기록

앨런 가디너 박사의 기록

루카스가 보존제로 처리한 내용

무덤 속에서 유물의 위치를 보여주는 사진

유물 자체를 찍은 사진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유물을 꺼낼 때의 여러 각도와 단계에서 찍은 사진

 

위 내용을 보면 그가 남다르게 사진으로 모든 장면을 찍어 유물을 분석하는데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사진을 보면 그가 발굴은 물론 예술 분야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아랍어를 공부하고 인부들을 관리통솔하고 유적을 복원하는 법을 배웠다. 이후 그의 성실함이 알려지자 프랑스인으로 이집트 고고국의 국장가스통 마스페로(Gaston Maspero)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카터는 계속 승승장구하여 1899년에 이집트 고대 유물국에서 두 명의 수석 조사관 중 한 명으로 임명 될 정도였다.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한 그는 30대 초반에 상 이집트(이집트의 카이로 이남에서 수단에 이르는 지역) 및 누비아 지역의 사적 주임 조사관의 지위에 올랐다. 이집트 발굴에 관한 상당 부분이 그의 영향력 안에 들어간 것이다.

카터가 발굴자로 성공하는 데는 계속 행운이 따라다녔다.

 

왕가의 계곡 투탕카몬의 (우측)

어느 날 카터는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우연히 땅바닥 위로 돌출한 지형이 말발굽에 걸리자 이상하게 여기고 그곳을 파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곳에서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무덤이었다. 남다른 눈썰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의 변호사로 많은 돈을 번 뒤 은퇴하여 이집트에 온 테오도르 데이비스(Theodore Davis)를 만났다. 그는 당시 왕들의 계곡에 대한 발굴권을 막 얻은 상태였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정부의 <고대유물관리국>뿐만 아니라 이집트 정부로부터 허가를 얻은 개인이나 기관들 역시 특정 지역의 발굴권을 받아 독자적으로 발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카터의 조언으로 데이비스는 호르엠하브이 왕의 무덤, 하셉수트 여왕의 무덤, 아케나톤 왕의 할아버지인 투트모세 4세의 무덤들을 발견했다. 발견 자체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이미 도굴당한 묘였으므로 실속은 없었으나 카터 개인으로는 손을 대는 것마다 놀라운 발굴로 이어지자 카터에게는 발굴의 행운이 따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카터는 데이비스와 함께 발굴에 참여하면서 아직도 발견되지 않는 투탕카문의 무덤이 반드시 왕가의 계곡 어디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집트 18왕조의 모든 왕들은 왕가의 계곡에 묻혔지만 유일하게 투탕카문의 무덤만 발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투탕카문의 치적이 별로 없으며 또 재위기간이 단 10년에 지나지 않으므로 다른 장소에 묻혔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였다.

물론 발굴의 행운을 몰고 다니는 카터에게도 좌절은 있었다.

이집트 정부의 유물관리국 검사관으로 일하는 동안에 발생한 사건 하나를 미숙하게 처리한 데서 비롯된 일이었다. 페트리경이 처와 3명의 젊은 여성과 함께 왕릉의 상형문자를 정리하고 있던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여러 명의 프랑스인이 찾아와 여성들의 잠자리에 침입하려고 했다. 위급해진 페트리는 이를 카터에게 알렸다. 급히 달려온 카터는 프랑스인들을 때려 눕혔다.

카터에게 당한 프랑스인들은 마스페로에게 항의했다. 객관적으로 보아 프랑스 관광객이 잘못했지만 프랑스인이 영국인에게 맞은 것이 비화되어 급기야는 사건의 본질과 상관없이 영국인과 프랑스인 간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마스페로는 카터에게 형식적으로라도 프랑스인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는데 영국인답게 완고한 성격을 가진 카터는 이를 단 번에 거절했다. 카터는 먼저 잘못한 것이 분명한 프랑스인에게 사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마스페로가 그를 좌천시키자 카터는 사표를 제출했다.

이집트 고고학을 담당하는 이집트 정부 관리직에서 해직되었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이집트에서 행해지는 모든 발굴은 이집트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집트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카터가 유능할지라도 국제적 문제를 야기한 그를 기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일이 화근이 되어 또 다른 국제 문제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유물조사국을 그만둔 카터는 카이로에 정착했다. 그리고 관광객에게 풍경화를 팔거나 관광 가이드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 당시 영국의 대 부호인 카르나본경이 이집트에서 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골동품 수집 및 발굴 작업에 손을 대고 있었다. 본명이 조지 에드워드 스탠호프 몰리뉴 허버트(George Edward Stanhope Molyneawx Herbert)카르나본 경은 제5대째의 카르나본 백작이다. 1887년에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 대학을 중퇴하고 경주용 자동차 경기에 직접 참가하는 등 스포츠맨 기질을 타고난 영국의 전형적인 귀족이자 대부호였는데 독일에서 입은 자동차 사고로 불구가 되어 이집트에서 요양 중이었다.

카르나본경은 발굴 작업에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므로 전문가가 필요했다. 때마침 마스페로가 그에게 발굴 현장감독으로 카터를 추천했다. 평소 카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지만 실업자가 된 카터를 돕는 의미에서 카르나본 경에게 추천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발굴 전문가 카터와 당대의 대부호 카르나본 경의 만남은 고고학계의 행운이었다. 1907년 카터는 카르나본 경의 발굴책임자로 선임되어 발굴에 참여했는데, 그의 실적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발굴에 참여하자마자 17왕조 시대 왕자의 묘를 발굴한 것이다. 물론 이미 도굴된 무덤이기는 하나 무덤에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카터는 또다시 행운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입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