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92) : 파라오의 저주(3)

Que sais 2021. 3. 18. 13:46

https://youtu.be/7Eb4TXtX9Gw

<무엇이 보이오?>

카르나본 경은 카터의 전보를 받자마자 곧바로 출발하겠다는 답신을 보냈고, 1123일 증기선을 타고 도착했다. 1126일 카터는 카르나본 카르나본 경의 딸인 에블린 등과 인부들을 뒤에 세워둔 채 문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불을 비추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훗날 카터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입구의 아랫부분을 막고 있는 돌무더기가 천천히 치워졌다. 지켜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 속도가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마침내 장애물이 제거되고 문 전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들어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온 것으로 나는 떨리는 손으로 왼쪽 상단에 작은 틈을 만들었다. 그 틈으로 들여다보니 안은 캄캄했고 탐침을 아무리 깊이 찔러 넣어도 거기에 닿는 것은 텅 빈 공간 뿐이었다. 이것은 봉인된 문 너머에 어떤 방이 있든지 간에 그 방은 텅 비어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좋지 않은 가스가 들어차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촛불을 켜서 구멍에 들이댔다. 그리고는 구멍을 조금 더 넓히고 촛불을 안으로 집어넣은 뒤 안을 들여다봤다. 카르나본 경과 그의 딸 이블린 양은 내 곁에 붙어 서서 가슴을 졸이면서 내 평결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 방에서 새어나오는 더운 공기 때문에 촛불이 펄럭거려 처음에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이윽고 내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이 안개 속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이상한 동물이며 조각상, 금붙이들, 방 안의 도처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번쩍거렸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영원만큼이나 긴 시간이었을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덤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 카르나본 경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카터에게 물었다.

 

무엇이 보이오?”

놀라운 것들이.”

 

투탕카문 무덤 발굴을 둘러 싼 대화 중에서 가장 유명하게 회자되는 말이다.

문을 열자 그들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 중에서 가장 작은 편에 속하는 투탕카몬의 전실에는 의식용 침대와 옥좌, 아름다운 상자와 단지, 황금 장의자, 동상, 배의 모형, 무기 항아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유물이 쌓여 있었다.

 

한쪽 벽에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그 앞에는 지하 묘지를 지키는 사자(死者)의 신 아누비스가 제단으로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아마포 스카프가 아누비스의 목을 감싸고 있었으며, 제단 전체는 들것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누비스의 발 밑에는 불이 꺼진 횃불이 떨어져 있었고, 횃불 받침대에는 마법의 주문이 새겨져 있었다. 아누비스 뒤에는 금도금한 커다란 나무 상자가 있었고, 그 속에는 왕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 때 내장을 담아둔, 설화 석고로 만든 카노픽 항아리들이 들어 있었다.

투탕카문 파라오의 미라가 들어 있던 방을 개봉한 것은 1924217일의 일이었다. 길이 5m, 너비 3.3m, 높이 2.73m에 이르는 거대한 4층의 금박을 한 목제 궤를 열자, ‘네브-케펠-라는 상형 문자가 쓰여진 3층으로 된 황금관이 들어 있었다. ‘네브-케펠-투탕카몬 파라오를 일컫는 말로 그 속에 투탕카문 파라오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었다. 1관은 황금 무게가 110kg이나 되며 세 개의 관 모두 왕의 모습을 본뜬 황금 마스크가 덮혀 있었다. 또한 상하 이집트를 나타내는 코브라와 매의 문장이 붙은 왕의 두건을 쓰고 있었다. 특히 3관의 황금 마스크는 현존하는 전 세계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1923218투탕카문의 무덤을 공식적으로 공개하는 행사에 참석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기자 메이너드 오웬 윌리엄스는 당시의 발굴 현장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거의 3천 년 만에 공개되는 행사에는 이집트 왕비,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 영국인 고등판무관인 앨런바이 경을 비롯하여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다. 무덤의 주위에는 푹푹 찌는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새로운 유물이 나오지 않을까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카터는 앞장서서 무덤 안으로 여왕을 안내했다. 카르나본 경은 여왕의 왼편에 나란히 걸어 내려갔고 그의 딸 이블린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30분쯤 후에 일행이 밖으로 나왔는데 사람들은 앨런바이 경의 상의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카네이션까지 멋지게 단 양복이 왜 저렇게 더러워진 것일까?

투탕카문 무덤을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보다 훨씬 후대의 파라오인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만들 때 일꾼들이 투탕카문 무덤 입구를 흙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중략) 투탕카문의 현실(玄室, 시체가 모셔져 있는 무덤 속의 방) 앞에 서 있던 두 개의 조각상은 한 손에 직장(職杖), 다른 한 손에는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으며 피부색은 이집트 미술에서 남성을 상징하는 검은색이고 머리쓰개, 목장식, 팔찌, 스커트, 샌들은 금박을 입혀 놓았다. 이 조각상들은 죽은 왕을 지하세계의 신인 오시리스로 형상화한 것이다.

투탕카문의 관이 들어 있는 현실의 크기는 길이 5미터, 높이 3미터, 폭은 3.5미터였다. 방 벽과 관 사이의 폭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다. 이 사이를 지나가느라 앨런바이 경의 등에 먼지가 묻었던 것이다.’

 

추후에 왕의 미라에 대한 검사 결과로 그의 키는 166센티미터 정도로 현실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2구의 젊은 파수꾼 입상의 키와 거의 일치한다. 입상의 얼굴도 사망 당시의 왕의 얼굴로 추정하고 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유물>

투탕카문의 무덤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치고는 작을 뿐만 아니라 두 번의 도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유산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투탕카문 파라오처럼 작은 무덤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위대한 파라오의 무덤이었다면, 어느 정도의 보물이 들어 있었을까하는 점이다. 예컨대 람세스 2세의 무덤에 있는 일곱 개의 방이나 사상 최대의 보물을 넣었다고 알려진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은 어떠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무덤 안의 방이 31개나 되는 페피의 무덤 속 보물이 얼마나 많았을지는 그야말로 상상이 불허한다. 무려 4500년 전에 건축된 쿠프의 대피라미드가 도굴이 됐는지 안됐는지 또한 다른 비밀의 방이 있나 없나 하는 점이 아직도 화제가 되는 이유다.

공식적으로 발굴된 유물의 숫자만 무려 34,000점에 달하는데, 이처럼 엄청난 유물이 남아있을 수 있던 것은 투탕카문의 무덤 입구가 너무 작아서 도굴꾼이 3중관 등을 비롯한 대다수의 덩치 큰 유물들을 무덤 밖으로 반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투탕카몬 부장품

유물에 대한 소개는 발굴의 주인공인 하워드 카터아서 메이스와 함께 쓴 투탕카문의 무덤(The Tomb of Tutankhamen)으로 공개했다. 카터의 조수였던 메이스파라오의 저주로 사망했다고 알려진 핵심인물 중 한 명이다.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상당한 숫자에 달하는데 발견된 유물을 미라에 관계된 것과 장례에 관한 부장품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석관

투탕카문의 미라와 목관들이 들어있는 석관은 최상급의 노란색 규암을 깎아서 만들었다. 길이는 2.7미터, 1.45미터, 높이 1.45미터다. 석관의 외면은 네 명의 수호여신 이시스, 네프티스, 네이트, 셀케트로 장식되어 있다. 여신들은 석관 네 모서리에 각기 하나씩 묘사되어 있는데, 활짝 펼친 날개와 뻗은 팔이 마치 왕을 보호하듯 석관을 둘러싸고 있다. 유해의 발 부분에 해당하는 석관의 아랫부분은 보호용 상징들이 판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뚜껑은 장밋빛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금이 간 자리는 회를 발라 구분이 어렵게 만들었는데, 카터는 애초에 제작된 뚜껑이 왕의 장례식에 맞춰서 도착했는데 금이 갔음에도 이를 교체하지 않고 금이 간 것을 그대로 뚜껑으로 씌웠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여하튼 카터는 이 석관이야말로 현재까지 발견된 석관 중에서 가장 장엄하고 화려하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