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94) : 파라오의 저주(5)

Que sais 2021. 3. 19. 08:03

https://youtu.be/EYVNqr9UubI

투탕카문의 미라

파라오 저주의 주인공은 사실상 투탕카문의 미라. 투탕카문의 미라가 공개되지 않았다면, 파라오의 저주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터도 투탕카문 미라의 중요성을 알고 상당히 많은 부분을 미라와 미라의 부장품에 관련한 내용에 할애했다.

관 속의 투탕카문 미라는 약간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있었는데, 이는 미라를 관에 안장할 때 약간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라는 동서 방향으로 누워있는데, 머리가 서쪽을 향해 있다. 하지만 카터가 미라를 황금관에서 떼어낼 때 고온의 열을 사용하는 등 매우 고생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장례용 연고를 부어 딱딱하게 접착되었기 때문이다.

시체를 감싼 방식은 정통 미라를 제작하는 방법과 같았다. 미라를 만드는 작업 또한 아주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최상품의 아마포 붕대와 아마포 천, 아마포 심이 사용됐다. 아마포 심은 인체의 형상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재료이며 미라에서 발견된 많은 장신구들은 총 143점으로 아마포 붕대로 천과 붕대로 감긴 두툼한 외피의 여러 층 속에 있었다.

왕의 머리에는 왕관형 머리장식이 쓰여 있었는데 띠 모양이었다. 홍옥수들이 원형을 그리고 있었고 홍옥수 고리 중앙에는 작은 금 돌기들이 붙어 있었다. 투탕카문 미라는 이마에 황금으로 만든 넓은 관자놀이 밴드를 둘렀고 밴드는 양쪽 귀 뒤에서 끝났다.

카터는 왕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마지막 붕대를 벗길 때 머리가 탄화된 상태이므로 극도의 주의를 기울였는데, 모든 붕대가 벗겨지자 젊은 왕의 얼굴이 나타났다. 카터의 말을 들어보자.

 

젊은이의 얼굴은 우아하고 기품이 있어 보였으며 이목구비는 반듯했다. 특히 입술은 윤곽이 뚜렷했다. 나는 그 얼굴이 거기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안겨준 최초의 가장 놀라운 인상을 여기에 기록해도 데리 박사(이집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와 살레 베이 함디 박사(알렉산드리아 공중위생국 관리)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그 얼굴은 아케나톤의 얼굴, 기념 건조물들에서 볼 수 있는 그 얼굴과 아주 닮았다.’

 

카터는 투탕카문의 얼굴아케나톤의 얼굴과 놀랍도록 닮았다는 점을 들어 투탕카문이 아케나톤 후궁의 소생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아케나톤의 어머니인 티 왕비(아케나톤의 아버지인 아멘호테프 3세의 처)의 얼굴 아케나톤, 투탕카문의 얼굴이 닮았다는 점을 들어 투탕카문이 티 왕비의 손자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물론 투탕카문은 아케나톤의 딸과 결혼하여 파라오로서의 정통성을 얻었다.

어쨌든 투탕카문 미라의 얼굴을 보면 무덤에서 발견된 많은 조각상들이 투탕카문의 얼굴을 정확하게 모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투탕카문의 목에는 두 종류의 상징적인 목걸이 장식이 걸려 있고 사자의 서를 비롯한 20개의 부적이 여섯 개의 층을 이루는데, 이들 유물층 사이에는 아마포 붕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맨 위에는 양각에 금박으로 장식한 호루스의 목걸이 장식미라의 목을 덮고 있다.

왕의 목 부위에 배치해 놓은 많은 부장품들은 사자(死者)가 저승에서 맞닥뜨릴 위험한 상황이나 대상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보여준다. 이들 부장품들은 모두 사자가 저승여행을 할 때 입을지도 모를 해로부터 고인을 보호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투탕카몬 미라 옮기기

목과 배 사이의 가슴 부위에 35개의 유물들이 들어 있었는데, 특히 쇄골 아래에 4줄의 황금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가슴 아래의 오른쪽, 왼쪽에는 황금으로 만든 세 개의 팔찌형 부적이 있었으며, 그중 두 개는 청금석과 홍옥수로 만든 구슬이 달려있고 세 번째 것에는 호루스의 눈이 달려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호루스의 눈은 철제라는 점이다. 기원전 14세기에 이미 이집트에 철기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일부학자들은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철제 장식품3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대에 철기가 황금보다도 비쌌기 때문에 도굴꾼이 우선적으로 철기를 훔쳐갔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미라의 가슴에서 청금석으로 만든 세 개의 스카라베가 있는 가슴장식이 발견되었다. 쇠똥구리를 의미하는 스카라베는 철봉 위에서 뒷다리로 네브 신의 상징물들을 쥐고 있는가 하면, 하늘의 상징인 태양과 달의 원반들을 떠받치고 있다. 그리고 철봉에서는 마거리트 꽃이 피어나고 연꽃이 떠 있다.

한편 가슴과 배를 싸고 있는 붕대 층에서 두 그룹의 반지가 발견되었다. 오른쪽 손목 위로 다섯 개, 왼쪽 손목 위로 8개가 있는데 이들은 황금, 청금석, 옥수(玉髓), 터키석 등으로 만들었다. 반지에는 왕의 모습이나 그의 이름이 적힌 카르투시(파라오나 왕비의 이름을 적을 때 사용하는 타원형 무늬 장식)가 새겨져 있다.

미라는 팔뚝, 손 등 각각의 부위를 붕대로 감은 후, 전체 몸통을 덮는 붕대로 다시 감아 완성되었다. 양쪽 팔뚝은 배의 윗부분에 올라가 있고 왼쪽 팔뚝은 오른쪽 팔뚝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오른손은 왼쪽 허리, 왼손은 가슴 오른쪽 아랫부분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미라 팔뚝에는 팔꿈치부터 손목에 이르기까지 장식품이 줄줄이 걸려 있었는데 오른쪽 팔뚝에 7, 왼쪽 팔뚝에 6였다. 카터는 이들 부장품이 하나 같이 장례식과는 무관하다고 적었다. 이들 장신구들은 투탕카문이 살아있을 때 실제로 착용했다는 것이다.

미라의 부분은 붕대로 감은 층마다 10개의 유물을 하나씩 배치했는데, 허리띠에는 단검 하나가 꽂혀 있었다. 자루는 배의 오른쪽, 칼집 끝은 허벅지 상단 부분에 위치했는데 특별히 강화 처리한 금으로 만든 단검 날은 아무 장식 없이 칼집 안에 들어 있었다. 카터는 이 단검에 야생동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사냥용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미라의 두 다리 사이놓인 유물을 보고 찬탄을 금하지 못했.

 

투탕카문 미라(2007년공개)

전통적인 미라의 형상을 만들려면 유해의 두 다리를 따로따로 감싼 뒤 다시 하나로 감싸줘야 했는데, 이때 두 다리 사이에는 많은 양의 붕대와 심이 들어. 그런데 미라의 붕대를 풀어가던 카터가 의식용 앞치마를 발견했다. 앞치마는 여러 색깔의 유리로 상감 장식한 일곱 개의 금판으로 이루어졌으며 금판들은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구슬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바로 그 앞치마 곁에 황금칼집에 들어 있는 독특한 단검은 칼날이 철이었을 뿐 아니라 전혀 부식되어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단검의 자루는 낟알 모양이었는데, 금으로 된 바탕에 여러 빛깔의 보석들로 된 줄을 칠보 세공 양식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카터가 놀란 것은 이 철제 단검이 부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카터는 철이 히타이트를 통해 이집트에 들어왔다고 추정했는데, 실제 기록에 따르면 투탕카문보다 100년 후 람세스 2에게 히타이트 왕이 배 한 척 분량의 철과 철로 만든 검 하나를 선물했다고 한다.

미라의 발에서는 골풀로 짠 듯이 양각한 금으로 된 샌들이 발견됐다. 발가락에는 금으로 만든 발가락 덮개를 하나씩 씌워 놓았고 오른쪽 발목에는 줄 모양의 발목 고리가 채워져 있었다.

이러한 탕카문 미라의 유물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투탕카문이 살아 있을 때 실제로 사용한 것종교적인 의미로 만든 으로 나뉘는 것이다. 교적 의미를 담부적으로 만든 것들은 단순한 형태에다 비교적 질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받이, 칠보 세공한 목걸이 중에서도 질이 뛰어난 것, 반지, 팔찌들과 단검, 왕관형 머리띠 등은 모두 투탕카문이 살아 있을 때 직접 사용한 것이라 생각되는 최상품의 물건들이었다. 반면에 여러 목걸이, 금판과 상감으로 만든 부적, 발가락과 손가락 덮개들, 샌들, 앞치마 등은 장례용 물품라고 생각됐다.

미라를 살펴본 카터는 투탕카문이 어떤 연유로 사망했는지 알 수 없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미라를 둘러싸고 발견되는 수많은 부장품들을 볼 때, 당대의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의 군주인 투탕카문에게 남다른 정성과 애정을 쏟았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가디너 윌킨슨 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탄했다.

그들은 군주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랑과 존경을 바쳤고 사망 한 뒤에는 계속해 추모했다. 군주의 장례식에는 은혜로운 군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여전히 그의 자비에 감사하고 그가 지녔던 많은 미덕을 찬양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중략) 자비로운 군주가 살아서 자신을 추모하는 광경을 보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했다는 것처럼 그들의 진실성을 웅변해주는 것이 또 있겠는가?”

 

카노픽 단지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만들 때 전통적으로 심장은 미라 속에 남겨두고, 내장은 따로 빼내 네 개의 단지 속에 보관했다. 이를 카노픽 단지(항아리)라고 하는데, 투탕카문의 내장을 보관한 카노픽 단지는 가로 150센티미터, 세로 120센티미터, 높이 195센티미터나 되는 커다란 상자에 넣어두었다. 처마 장식 위에 화려하게 상감 장식된 코브라들이 태양 원반을 떠받치고 있으며, 상자의 네 면은 금박을 입힌 수호 여신들이 각각 한명씩 서서 두 팔로 감싸고 있다.

 

투탕카문 카노픽

이집트인들을 미라를 만들기 전에 빼낸 내장호루스의 아들로 인식되는 임세티, 하피, 두아무테프, 케베세누프라는 신과 관련된 네 개의 작은 설화석고 용기 속에 따로 보관했다. 이들 신은 각각 네프티스, 이시스, 네이트, 셀케트 여신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는데, 이집트인들은 이들 수호 여신이 내장을 보관하는 신들을 내면에 품고 있으면서 그들을 보호한다고 생각했다. 이들 네 명의 신 때문에 별 탈 없이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카노픽 단지 미라가 부활하는 데 있어 미라, , 석관, 석관을 보호해주는 사당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