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96) : 파라오의 저주(7)

Que sais 2021. 3. 19. 10:25

https://youtu.be/nOqogzq96gM

<파라오의 살해>

투탕카문이 살해되었느냐 아니냐가 상당한 관심을 끌었는데 이는 이집트 역사에서 실제로 파라오의 살해가 벌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철저한 위계에 의해 움직이는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살해라는 말은 매우 어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들에 의해 권능을 부여받은 반신(半神)과도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백성은 그를 신으로 생각했고 파라오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 권력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이집트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파라오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유일무이한 존재인 파라오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위를 누렸으며 700여 신으로부터 보호받았다. 파라오의 백성들은 그런 존엄한 존재에 감히 도전한다는 생각을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이집트인들의 생각은 파라오는 파라오, 재상은 재상, 군인은 군인 가문에서 나오며 장인은 장인 가문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신과 같은 파라오에게 반항한다는 짓을 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이단이요 극악한 반역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사를 보면 상상할 수 없는 권능을 갖고 있는 파라오를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바로 일반 이집트인들이 아니라 왕의 신변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불쾌한 일을 무시하는 전통을 가진 이집트인들은 파라오 암살이나 암살 시도에 관련된 자료들을 거의 남겨놓지 않았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파라오가 암살되었다는 것은 파라오가 인간이고 취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에서 파라오에 대한 암살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아메넴헤트1세와 람세스 3의 경우인데 두 사건은 놀랄 만큼 유사성이 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파라오는 한없이 멀고 존엄한 존재이므로 파라오가 이집트를 통치하는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파라오의 신권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파라오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사람 즉 파라오의 부인과 아이 그리고 고관들이다. 이들은 이론상 파라오에 가장 충성스런 신하들이지만 파라오를 인간으로 볼 소지가 많았다. 아무리 강력한 파라오라도 왕비에게는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이지 신으로 행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파라오가 암살되었음에도 이집트 정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점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는 파라오의 이원집정체계 때문에 한 파라오가 죽었다하여 이집트 체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파라오 한 명이 죽었다고 이집트의 통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암살자도 그런 내용을 모를리 없다. 그러므로 이들이 파라오의 암살에 가담하는 것은 군주제 자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두 명 중 한 명의 왕위 계승에 관여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당연히 음모를 꾸민 사람들은 그들의 측근일 수밖에 없다.

파라오의 친속이 불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집트 왕가의 특성 때문이다.

파라오에게는 수많은 왕비들이 있었다. 그런데 공인된 계승 방법은 호루스 신이 오시리스 신의 지위를 계승하는 자연스러운 방식 즉 아들이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다. 그런데 람세스 2의 경우 100여 명 또는 이보다 많은 200여 명의 자식이 있었고 이들 중 절반이 아들이었다. 람세스 2가 워낙 오래 살았으므로 그의 후계자는 13번째 아들인 미네프타였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모든 왕자들이 평등하게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정식 왕비이든 하렘에서 태어나든 모두 파라오의 자식이지만 그들의 신분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다. 왕비 혹은 정비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다른 형제보다 지위가 높았으며 자연스럽게 이들 중에서 후계자가 되었다. 수많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왕실로 볼 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파라오가 될 가망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정도의 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들의 위치는 다소 어정쩡하다. 파라오가 첫 번째 정비 소생의 아들을 두기 전에 사망한다면 자신들의 아들 중 한 명이 파라오를 상속할 수 있지만 일이 그렇게 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여하튼 누가 선왕이 죽자마자 파라오가 되었든 파라오가 되지 못한 왕자들의 미래는 간단하다. 왕궁에서 쫓겨나가 사회 한 구석에서 조용히 사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므로 왕자들이 왕위 계승권을 조작해서 궁극적인 전리품을 차지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설명이다.

이집트인들이 이런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헤로도토스아멘호테프의 대화세소스트리스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대해 적었다. 학자들은 세소스트리스를 중왕국 시대의 센우스레트 파라오들과 신왕국 시대의 람세스 2를 결합하여 형상화시킨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하튼 헤로도토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의 적들과 싸우느라 외국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귀국해보니 그의 동생이 그를 죽이려한 것을 알고 왕비의 조언대로 두 아들을 희생시켜 무사히 목숨을 건진 후 동생에게 복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아멘호테프의 대화남아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밤이 찾아왔을 때다. 나는 피곤했으므로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내가 막 잠이 들기 시작했을 때 나를 보호하는데 사용되었어야 할 마땅할 무기들이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내 잠을 깨서 싸우기 위해 벌떡 일어나 나는 그것이 경호부대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내 무기를 잡을 수 있었다면 혼자서라도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밤에는 그 누구도 강하지 못한 법이다. 아무도 혼자 싸울 수 없으며 도와주는 사람들이 없이는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없는 동안에 유혈 상태가 일어났다. (중략) 내가 그에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고 내 시종들이 배신하리라는 것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어떤 여자가 군대를 끌고 온 것일까? 왕궁 내에서 반란자들의 모의를 꾸민 것일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글은 아멘호테프의 유령이 쓴 것은 아니다. 여하튼 아멘호테프는 이때 죽었는데 이 기록은 왕의 살해사건을 추적했던 케티 서기관이 쓴 것이다. 한마디로 이 내용은 사실이라는 뜻이다.

 

페피 1세

고왕국 시대의 페피 1에 대한 암살사건도 알려진다. 이에 관한 내용은 파라오가 신임한 고위 관리 웨니의 아비도스 무덤의 벽에 기록되었다.

 

하렘에서 누군가가 웨레트케테스 왕비를 은밀하게 고발했다. 파라오는 나를 무척 신임했으므로 재상이나 다른 재판관 없이 나 혼자만 그 사건을 심리토록했다. 나는 감찰관 한 사람과 함께 그 사건의 조서를 작성했다. 나 자신은 소작인들을 감찰하는 신분이었지만 과거에 내 위치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파라오의 하렘과 관련된 비밀을 들은 적은 없다. 폐하께서 나를 당신의 그 어떤 관리, 그 어떤 시종보다도 더 소중히 여겨 나로 하여금 그 사건을 심리해달라고 하셨다.’

 

불행하게도 더 이상의 자료가 없으므로 그의 조사가 어떻게 끝났고 왕비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파라오에 대한 불순한 행동이 있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특히 왕비라면 더욱 그럴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멘호테프가 살해된 지 약 800년이 지나 제20왕조 때 람세스 3를 겨냥한 암살시도가 일어났다. 이 당시는 많은 서기관들이 있었으므로 상당히 많은 자료가 아직도 남아있다.

람세스 3는 재위 초기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군사원정을 단행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이집트의 영토를 확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각주 안전을 위협하는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벌인 결사적인 전쟁이다.

람세스 3세는 재위 5년에 리비안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재위 8년에는 바다 사람들을 격퇴했고 재위 11년에는 서쪽 국경에서 전쟁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람세스 3세는 3만 명의 리비아인을 죽였다고 하는데 숫자의 진위는 과장되었을지 모르지만 여하튼 상당한 승리였음은 틀림없다.

 

람세스3세

그런데 3번에 걸쳐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집트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국제 상황 즉 무역로가 막혀 더 이상 공물과 세금이 국고로 들어오지 않았다. 더불어 흉년이 들어 곡물값이 뛰어올라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달마다 지급되어야 할 봉급이 늦게 나오자 테베의 일꾼들이 파업을 일으켰으며 고분과 신전에서 귀중품이 도난되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한마디로 테베의 아몬 신관들이 파라오에게 도전했는데 더욱 상황이 불리해진 것은 아몬 신관들이 남부에 있는 유력자를 밀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왕궁도 안전하지 않다는 뜻인데 실제로 그의 하렘에서 음모가 잉태되고 있었다.

 

글로 주문을 쓰는 것은 마법을 걸어 사람의 혼을 빼고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인데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밀랍으로 몇몇 신과 인간들의 형상을 빚어냈기 때문에 그자는 심문을 받았으며 그의 모든 진술이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자가 저지르려던 모든 범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것은 사형을 받을 만한 범죄인데 그는 이 나라에 대한 더없는 증오감으로 그런 일을 자행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사형에 당할 것임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는 파피루스 롤린파피루스 리에 적힌 내용으로 한 무리의 음모꾼들이 밀랍인형을 만들고 주문을 사용하여 람세스 3를 죽이려다 실패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고대 주술의 기본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실패하자 보다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간다. 암살자들은 바구니 속에 숨긴 단도로 파라오를 찔러죽인 후 티이라는 두 번째 왕비의 아들인 펜타웨레트 왕자를 옹립하려고 했다. 음모자에 대한 재판 기록이 투린 쥬디셜 파리푸스에 이 일로 재판을 받은 기록이 적혔다. 람세스 3세의 암살에는 13명의 조신, 11명의 하렘관리, 5명의 군인과 2명의 신관은 물론 몇몇 재판관들도 포함된다. 죄상이 드러난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형벌은 당연히 극형이었다.

 

그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파라오 지시를 무시했으므로 코와 귀를 절단당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 여자들이 돌아갔을 때 그자들은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서 여자들과 술을 마시고 즐겼다. (중략) 그자들은 자기들이 저지를 범죄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대역죄인 파이베세는 당시 왕궁의 집사였는데 그자에게는 독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형벌이 내려졌다.’

 

반역자에 대한 형벌은 준엄했지만 티이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 펜타웨레트는 자살을 허용받았다. 자살은 극소수에게 주어지는 특전이다. 왕권을 노리던 왕자가 말뚝에 꿰어죽거나 화형을 당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람세스 3세 미라

그런데 당시 재판관이자 수비대장이었던 호리는 무사히 도망쳤다. 더욱 학자들이 궁금한 것은 람세스 3가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느냐이다. 파피루스 리에는 음모자들이 재판을 받을 때 람세스 3세가 사망했다는 암시를 주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특히 저격을 받았을 때 중상을 입었지만 완쾌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이는 람세스 3세의 미라 즉 몸에서 뚜렷한 부상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