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97) : 파라오의 저주(8)

Que sais 2021. 3. 20. 11:01

https://youtu.be/CiST62pYw7o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암살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투탕카문의 살해는 상당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투탕카문이 파라오가 되었을 당시는 정통 이집트인들로 볼 때 아케나톤이 이집트를 17년이나 엉망으로 만든 후다. 때문에 전 이집트 사람들이 강력한 군주의 등극을 열망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아케나톤의 후계자였던 세멘크카레(재위 기원전 1334~1333)가 즉위 후 곧장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10세의 투탕카문이 파라오에 오른 것이다.

소년왕 투탕카문에게 거는 이집트인들의 기대는 컸다. 그 기대가 얼마큼인지는 카르낙의 돌기둥에 적힌 그의 선포로도 잘 알 수 있다.

 

폐하께서 왕위에 오를 즈음, 신들과 여신들을 모신 신전들은 황폐해졌고. (중략)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엉망이 되었고 신들은 이집트에 등을 돌렸다. (중략) 그러나 많은 날들이 지나간 뒤 폐하께서 부왕의 옥좌에 오르시어 호루스의 을 통치하셨다. 검은 땅과 붉은 땅은 폐하의 감독 하에 들어갔으며, 모든 사람들은 폐하의 권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는 아케나톤이 사망하자마자 집권층이 똘똘 뭉쳐 아케나톤의 만행을 제거하는데 총력을 경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이런 엄청난 작업을 아케나톤의 왕비인 네페르티티의 아버지인 아이(Ay)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케나톤이 사망하자마자 그의 망령된 시기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이미 아멘호테프 3세와 아케나톤, 스멘크카레를 섬겨온 노련한 정치가였고, 네페르티티의 아버지이자 투탕카문의 의붓 외할아버지였던 까닭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학자들을 혼동시키는 일이 등장한다.

 

투탕카문 벽화(아이가 투탕카문의 입열기 의식 주재)

투탕카문이 너무 일찍 죽은데다 남긴 자식이 없어 준비된 후계자가 없었는데 아이(Ay)투탕카문의 장례식을 주재했다는 점이다. 이는 아이가 투탕카문의 후임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이런 사실은 투탕카문의 무덤에 적힌 글로 알려졌는데, 왕가의 계곡에서 선왕의 무덤에 후계자의 이름이 새겨진 경우는 거의 없다.

카터도 오시리스 신으로 상징되는 죽은 투탕카문의 입을 여는 의식을 아이가 주재하였는데, 이는 그가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일반적으로 선왕의 장례를 집전한 사람이 후계자가 되므로 투탕카문의 후계자가 아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핵심 관건은 아이가 후임 파라오가 되기 위해 즉 왕권을 탈취하기 위해 투탕카문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투탕카문이 살해되었다는 가설은 영국 리버풀대학 연구진1968년 투탕카문 미라의 X-선 촬영 결과 머리 부분에서 작은 뼈의 단편이 발견됐는데 이는 투탕카문이 뒤통수를 강타당해 숨졌음을 시사한다고 밝힌 이후 더욱 힘을 받았다.

더구나 투탕카문의 어린 시절이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도 소문을 부채질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키야는 투탕카문의 탄생과 거의 같은 시기에 갑자기 사라진다. 학계에서는 출산할 때 죽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왕궁 내의 음모에 의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인식한다.

투탕카문을 키운 사람은 아케나톤의 본부인인 네페르티티 왕비였다. 그런데 아케나톤이 사망하자 여자로서는 드물게 네페르티티가 정권을 잡았다. 학자들은 이처럼 비정상적인 네페르티티의 등장은 그녀의 아버지이자 신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가진 아이(Ay)가 섭정을 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한마디로 아이가 네페르티티를 앞세우면서 당대의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학자들에 따라 아케나톤의 후임자 스켄크카레네페르티티로 간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편을 보내주세요>

스켄크카레가 사망하자 투탕카문이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아케나톤과 네페르티티의 여섯 딸 중 세 번 째인 앙크에스엔아멘과 결혼한다.

그런데 앙크에스엔아멘은 재혼이다. 그녀의 친 아버지인 아케나톤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아케나톤이 친딸인 앙크에스엔아멘과 결혼한 것은 자신이 벌리는 개혁 정치의 합법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투탕카문과 앙크에스엔아멘

투탕카문과 앙크에스엔아멘이 결혼했을 때 앙크에스엔아멘의 나이는 열한 살 또는 열두 살 정도이고 투탕카멘은 여덟 살 또는 아홉 살이다. 투탕카문의 묘에 매장되어 있던 2구의 태아 유해는 그들 사이에 생긴 아이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들 아이도 투탕카문의 살해설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학자들은 이 태아들이 투탕카문의 자식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서도, 왕비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았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왕비가 자식을 사산할 경우 왕위를 노리던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명분을 줄 수 있으므로 투탕카문을 살해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투탕카문이 파라오가 된 지 10년도 채 안되어 갑자기 사망하자 그야말로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과부가 된 앙크에스엔아멘히타이트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들 편지는 하투사스 왕궁1만 개가 넘는 점토판 중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녀가 보낸 편지는 두 개다. 점토판의 편지 내용은 정말로 놀랍다.

 

'제 남편은 돌아가셨고 저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아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한 분을 저에게 보내주시면 그분을 남편으로 맞아 이집트의 왕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그러면 많은 금과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제 신하 중에서 남편으로 삼기는 싫습니다.‘

 

히타이트에서는 처음에 진의를 의심하고 답변을 미루자 다시 편지가 도착한다.

 

폐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제가 속임수를 쓰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까? 만약 저에게 아들이 있다면 저와 제 나라에 굴욕적인 이런 편지를 외국에 보내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저를 믿지 않고 그런 말을 하시지만 아들도 없는 제가 신하중 한 명을 남편으로 삼아야겠습니까? 저는 다른 나라에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폐하께만 보냈습니다.’

 

앙크에스엔아멘의 편지는 투탕카문이 미라가 되는 70일 동안에 보내진 것이다.

두 번에 걸친 편지를 받고 히타이트는 결국 자난자(Zannanza) 왕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그녀의 이런 행동 못지않게 이집트에서도 반격을 가했다. 그녀가 히타이트에 비밀 메시지를 보낸 것을 알고 자난자 왕자가 이집트의 국경을 넘자마자 살해 한 것이다.

 

<복잡한 투탕카문 사후>

투탕카문의 사망 후에 일어난 일은 마치 소설과 같다.

역사학자들은 당대의 정황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투탕카문이 갑자기 사망하자 이집트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네페르티티의 아버지인 신관 아이(Aye)히타이트 왕자를 살해하고 앙크에스엔아멘과 결혼하면서 파라오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이집트의 왕위 계승은 파라오의 딸들을 매개로 계승되었다. 파라오가 되려면 파라오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이다. 파라오의 혈통을 가진 여성의 남편이 파라오가 된다는 뜻으로 이는 왕비에 따라 파라오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파라오와 결혼했던 왕비의 새로운 남편도 언제든지 파라오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이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집트 역사에서 파라오가 된 사람은 대부분 정비가 아닌 후비 소생의 아들일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그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비(正妃)의 몸에서 난 공주와 결혼했다. 물론 정비의 아들인 경우도 같은 어머니 아래 태어난 친동생이나 친누나와 결혼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아이 석상

투탕카문이 사망하자 아이가 파라오에 눈독을 들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파라오가 되는데 큰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가 왕족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아이가 아케나톤 파라오의 왕비인 네페르티티의 아버지이지만 평민이므로 파라오로 등극하는데는 결정적인 하자가 생긴 것이다. 방법은 투탕카몬의 정비인 앙크에스엔아멘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집트 파라오의 정통 왕비인 앙크에스엔아멘으로 보아 남편이 죽었다하여 평민과 결혼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기피하고 싶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앙크에스엔아멘은 당대 이집트 왕가로 따지면 아버지인 아케나톤과 이복형제인 투탕카문의 정식 왕비로서 그야말로 족보가 좋았다.

그러므로 앙크에스엔아멘이 이런 궁지에서 탈출하기 위해 히타이트 왕에게 도움을 구하는데 히타이트에서 왕자를 보냈지만 국경에서 살해된다. 외국의 왕자가 살해된다면 엄청난 외교적인 문제가 일어날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강행했다는 데 가장 중요한 의문은 누가 자난자 왕자를 살해했느냐이다. 정황상 아이가 후보자이지만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리 만무다.

그런데 이 질문에 관한 한 학자들은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증거를 찾았다.

우선 투탕카문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은 그의 무덤 벽 즉 파라오가 매장되는 무덤인데도 벽을 조각하는 대신 서둘러 칠했다는 점이다그런데 그의 미라도 70일간의 시간을 거쳐야한다. 그러므로 최소한 70일을 거쳐 무덤이 완성되었는데 그의 무덤에 그려져 있는 벽화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투탕카문의 미라가 썰매에 안치되어 이동하는데 이 썰매는 10명의 궁전 관리가 이끈다. 그런데 이 그림에 잘 알려진 당대의 고위관리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네페르티티의 아버지이자 신관으로 알려진 아이.

반면에 투탕카문이 하얀 옷을 입은 오시리스가 된 장면이 있는데 이는 투탕카문이 부활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아이가 파라오의 왕관과 표범가죽을 입고 아드제(adze)라는 끝 부분이 금속인 나무 악기를 들고 있다. 이는 아이가 투탕카몬의 입을 벌리는 의식을 주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아이가 투탕카문을 이어 파라오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그림은 아이가 히타이트 왕자를 살해하고 파라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왕의 장례를 집전하는 사람은 사자의 뒤를 이은 파라오를 뜻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투탕카문을 미라로 만드는데 필요한 70일 간에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