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98) : 파라오의 저주(9)

Que sais 2021. 3. 20. 11:20

https://youtu.be/5RpOS5otqxI

앙크에스엔아멘이 강력하게 평민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역사는 그녀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결론은 아이와 앙크에스엔아멘은 결혼하고 아이가 파라오가 된 것이다.

이들 결혼이 기록에 없으므로 정황으로만 설명되는 상황에, 1930년 이집트 학자인 뉴베리 교수가 그야말로 놀라운 발표를 했다.

그가 카이로에 있는 골동품 상점에서 반지를 발견했는데 여기에 아이와 앙크에스엔아멘의 이름이 카르투슈 안에 있다는 것이다. 파라오에 한하여 카르튜수 안에 이름을 상형문자로 적었다. 이는 아이와 앙크에스엔아멘이 결혼했고 아이가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뉴베리 교수는 자신의 발견을 하워드 카터에게 편지로 전했다. 카터가 아이의 무덤을 방문했는지 또한 앙크에스엔아멘의 기록이 무덤에 있는가다. 사실 앙크에스엔아멘은 이후 기록이 사라졌는데 결혼반지가 유일한 최후 증거였다.

그런데 이 반지는 현재 행방불명이지만 이와 유사한 반지가 발견되었다. 역시 두 사람의 이름이 카르튜수 안에 적혀있는데 현재 베르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뉴베리 교수는 아이의 무덤에 앙크에스엔아멘의 기록이 적혔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아이가 앙크에스엔아멘과 결혼해 파라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의 무덤에는 아이와 앙크에스엔아멘의 흔적이 모두 삭제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앙크에스엔아멘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학자들이 위대한 아내(henet werit)라는 글을 발견했다. 한편 투탕카문의 무덤에도 앙크에스엔아멘이란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아이가 앙크에스엔아멘와 결혼하려고, 선왕의 묘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앙크에스엔아멘이 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그녀가 아케나톤을 비롯한 격변시대의 주인공으로 결국 18왕조가 19왕조로 넘어가는 핵심주체이기 때문이다.

 

투탕카문의 석상

투탕카문이 갑자기 사망하자 예상대로 투탕카문의 왕비인 15세의 앙크에스엔아멘과 결혼한 아이가 파라오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 역시 파라오가 된지 채 4년이 못 되어 사망하고, 평민 출신 장군이자 왕의 부관으로 아케나톤의 기록을 철저하게 삭제하던 호렘헤브가 파라오가 되었다.

 

그가 파라오가 되자 아텐 신앙에 관여된 파라오들인 아케나톤, 세멘크카레, 투탕카멘, 아이의 기록을 철저하게 지웠다. 이뿐이 아니다. 호렘헤브는 이 네 명을 존재하지 않았던 파라오로 만들기 위해 아멘호테프 3가 죽은 뒤 바로 자신이 즉위한 것으로 조작했다이 네 파라오의 치세 기간을 자신의 치세 기간에 포함시켜 자신의 재위 기간이 59이라고 선언했다. 더불어 아이의 무덤을 철저히 훼손했다. 그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는 모두 깎이고 관도 박살났다.

사실 호렘헤브로 보아 이집트의 수치로 불리는 아케나톤이 유일 태양신 개념을 강조하여 몇 천 년 동안 이집트를 지배한 이집트인들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혼동으로 몰아갔으므로 이를 바로 잡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케나톤이 당대의 최고 권위를 갖고 있는 사제들의 권위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사제들의 권리가 박탈되면서 통제권은 군대와 중앙 정부로 넘어 갔지만 당대의 여건상 관료주의부패의 온상이었다. 한마디로 사제들의 지원이 없었던 왕실로서는 치명상이었다.

여하튼 호렘헤브는 아톤신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증오를 바탕으로 투탕카문과 앙크에스엔아멘의 기록을 지웠는데 이는 국민적 인기를 얻기 위한 제스처로도 볼 수 있다. 미처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신을 숭배하는 이집트에서 곧 파라오로 대변되는 아케나톤의 태양신 아톤 숭배사상은 환영받지 못했는데, 이를 의식해 펼친 정책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러나 1314년 호렘헤브 역시 집권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사망했다. 이로써 18왕조는 막을 내렸고, 이후 람세스 1가 파라오로 등극하면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라고 평가되는 제19왕조가 시작되었다.

아케나톤이 사망하고 이어서 등장한 투탕카문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험한 시대의 파라오라 볼 수 있다. 나이도 어려 권력 기반이 없는 투탕카문은 사제들의 지원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창시한 유일신 태양신을 버리고 과거의 전통으로 회귀하지만 그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 권력의 알력으로 아케나톤으로 변형된 이집트는 새로운 시대 즉 19왕조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집트인들로 보아 투탕카문과 앙크에스엔아멘은 사라져야할 구악의 잔재이므로 철저하게 제거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다.

 

<투탕카문 왕은 흑인이었나?>

이집트 역사에서 보면 20~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여러 명의 파라오가 등장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 그만큼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라든가 정치적으로 극히 혼란 된 시기를 제외하고는 여러 명의 파라오들이 계속해서 단명한 경우가 거의 없다. 또한 투탕카문의 무덤이 신왕국시대의 전통적인 파라오 무덤과 다소 다르다는 것도 투탕카문의 살해를 지지하는 요소 중 하나로 인식된다. 투탕카문의 무덤은 반듯하지 않고 구불구불한 평면을 갖고 있는데, 이런 무덤은 이집트에서 이교(아톤신)를 도입하려고 했던 아케나톤과 그의 후계자인 스멘크카레, 투탕카문에만 한정된다.

이는 투탕카문이 아케나톤의 유일신 개념을 부정하고 과거의 다신 숭배의식으로 되돌아갔지만, 당대의 집권층이 투탕카문을 완전한 다신론자로 인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아이(Ay)의 뒤를 이은 호렘헤브의 무덤을 보면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 반듯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를 근거로 호렘헤브 시대는 아톤신이라는 유일신 개념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투탕카문 때만 해도 아직 아케나톤이 세운 유일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 되며, 투탕카문은 이런 와중에서 살해당했다고 해석 가능해지는 것이다. 관련 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공전의 흥미를 자아냈다고 평가한다. 투탕카문이 매우 불행하게 살았고, 결국 살해당한 불운한 소년왕이었다고 극화시킴에 따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투탕카문흑인이냐 아니냐 설전 벌어진다. 실제로 미국에서 투탕카문 유물 전시회가 열리자 미국의 흑인들은 투탕카문이 흑인임을 인정하라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 ‘투탕카문과 파라오들의 황금시대라는 당시의 전시회에서 투탕카문이 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보다 더 옅은 피부색을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특히 일부 흑인 운동가들은 당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투탕카문 유물 순회 전시회에 출품된 투탕카문의 흉상이 백인 모습을 하고 있다며 흉상의 철거를 요구해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집트 고()유물최고위원회의 위원장 자히 하와스 박사는 투탕카문이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이었을 것이라는 흑인 미국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투탕카문은 흑인이 아니며 고대 이집트 문명에 흑인적 요소가 있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진실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집트가 아프리카 대륙에 있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은 인종적으로 아프리카 흑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탕카문과 앙크에스엔아멘

투탕카문이 살던 당시 고대 이집트인들의 인종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 간에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니 고대 이집트인들을 흑인으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이집트학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카터는 무덤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들을 근거로 소년왕 투탕카문 어느 인간과 다름없는 소년기를 살았다고 설명했다. 유물을 보면 생전에 파라오가 즐겨하고 직접 체험한 것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투탕카문이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냥을 좋아하는 열성 스포츠맨 타입이었다는 것이다.

카터는 옥좌에 묘사된 장면이 매우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옥좌에는 청순한 모습을 지닌 왕비가 국사를 돌보 가기 전으로 보이는 젊은 왕의 목걸이 장식에 향유를 발라주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왕의 옷매무새를 마지막으로 다듬어주는 모습도 있다.

벽화에는 왕과 왕비의 애정 어린 사생활 장면도 매우 많은데, 새끼 사자를 거느린 투탕카문이 활로 들오리를 쏘고 있는 동안 왕비가 그의 발치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장면도 있다. 왕비는 한 손으로 화살 한 대를 투탕카문에게 건네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살찐 오리를 가리키고 있다.

왕비가 파라오의 목에 펜던트를 매주는 장면도 있다. 반대로 투탕카문이 왕비의 손에 향유를 부어주는 장면도 있는데, 이는 어느 부부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인식될 장면으로 투탕카문이 여타 폭군과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투탕카문의 전차

재미있는 것은 투탕카문의 미라 양쪽 귓불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점이다. 카터는 이를 두고 투탕카문이 어렸을 때 귀걸이를 착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귀걸이에는 잘 움직이는 유연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두 경우 모두 귓불의 구멍에 끼운 장식 못을 이용해 귀에 걸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투탕카문 미라 주위에는 귀걸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성장한 후에는 일체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았다고 보인다.

또한 소년왕 투탕카문의 생활은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보인다. 그가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전차 마구에도 활 쏘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벽화에도 투탕카문스포츠 활동을 묘사한 장면 자주 나타난다. 사냥용 부메랑이나 화려하게 보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활이 유물로 남아 있고, 그의 미라 옆에 있던 황금 단검의 칼집에는 야생동물이 부조되어 있다. 또한 석회암 판에는 투탕카문이 사냥개의 도움을 받아가며 창으로 사자를 죽이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것들은 모두 파라오인 그가 여느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냥 등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카터는 무덤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장면들이 젊은 투탕카문의 취향과 기질 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른 파라오들의 유물에서는 망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의 증거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투탕카문 묘의 유물은 소박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어 놀랐다고 실토했다. 이들 이미지만을 감안하면 투탕카문이 살해되었다는 설과는 너무나 동떨어질 정도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