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세계의 악당 라스푸틴 복권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2)

Que sais 2021. 4. 30. 20:30

https://youtu.be/Mk0gGXINE14

<거룩한 사람 라스푸틴>

라스푸틴은 스스로를 동방 교회교리 강사로 뜻하는 스타레츠(starets) 또는 거룩한 사람(holy man)'이라고 칭했다. 그가 강조하는 죄를 통한 구원이라 하는 것은 여자와 남자자유롭게 섹스를 해야 하며 육체의 죄 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최면술에도 능해 여자들에게 자신의 유혹에 저항하지 말고 굴복할 것이며 자신을 유혹의 수단이자 죄악으로 미끄러지게 하는 매개자로 사용하라고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1902볼가 강가에 있는 카잔 시에서 성직자는 아니지만 경건한 신도로 명성을 얻었다. 말끔하고 주변 좋은 언변과 최면술을 겸한 신비한 능력은 그를 만나는 여자들마다 반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를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그의 특이한 행동은 러시아 제정시대의 삶 자체가 고통으로 차 있던 러시아인들에게 큰 희망으로 비쳐졌기 때문으로 거룩한 사람에 대한 소문은 러시아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교회 성직자들이 그를 적극 지지했는데 그가 여자와의 성관계에는 매우 자유롭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의 총장이자 황후의 고해신부아르치만드리트 테오판(Archimandrite Theophan)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았을 정도다.

1903년 라스푸틴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나이는 30에 지나지 않았지만 193센티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체구농부가 입는 작업복과 바지, 장화 위에 검은 가죽 코트를 걸친 그의 모습은 곧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류층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신을 찾는 자(God seeker)'라 불렸다.

 

라스푸틴

거룩한 사람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려는 귀부인들이 그의 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라스푸틴은 여자들의 면전에서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 등 적절하게 분위기를 잡는 재주를 선보여 여자들을 처음부터 장악했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요승(妖僧)’, ‘괴승(怪僧)’, ‘광승(狂僧)’이라는 호칭이 따라붙지만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은 신학교 등은 전혀 밟아본 적이 없는 시베리아 오지 농부 출신 신비술사(병을 낫게 해주는 등 우리나라의 무당과 흡사)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이런 경력이 크게 부각된 것은 기이한 초능력으로 당시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지적 예술적 탐구 분야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대 러시아의 최상류층들은 남색, 레즈비언, 다양한 사도마조히즘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그의 등장은 진부한 러시아 귀족들에게는 청량제로 여겨졌다. 심지어는 자살, 살인, 아편, 알코올 등이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층 사람들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일부분이었으므로 도승과도 같은 라스푸틴은 매우 유용한 남자로 자리매김하였다.

 

<황제 니콜라이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러시아 최후의 황제니콜라이 2는 상당히 낭만적인 사람으로 알려지는데 독일의 알렉산드리아 공주와의 결혼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일이다.

니콜라이는 황후가 되는 알렉산드라12세일알렉산드라의 언니 엘리자베스니콜라이의 삼촌러시아 대공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Sergej Alexandrowitsch)와의 결혼식이 있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 만났다.

니콜라이헤센 공주의 딸알렉산드라를 만나자마자 좋아했다. 어머니를 일찍 잃은 알렉산드라는 수줍어하고 조용한 내성적 성품을 갖고 있었는데 니콜라이는 이렇게 잘난 척하지 않으며 나서지 않는 가정적 성품의 여인을 선호했다.

니콜라이의 부친 알레산드르 3와 어머니인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아들이 알렉산드라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라의 어머니덴마크의 공주이기 때문이다. 독일 슈레스비히-홀슈타인덴마크대항해 치렀던 3년간의 전쟁으로 마리야 표도로브나독일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다 헤센 대공제국의 황제보다 신분이 한참 낮았기 때문에 신분상의 이유에서도 니콜라이의 결혼을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불어 당대의 황가 결혼은 거의 모두 정략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니콜라이의 주장은 이런 세계 정치 판도에 맞지않는 예외적인 예이다.

 

니콜라이2세와 알렉산드라 황비

그러나 니콜라이알렉산드라와의 결혼을 끝까지 고집했다. 종교 문제도 걸림돌이었다. 알렉산드라루터 신교러시아 정교루터 신교와 차이가 있으므로 오히려 알렉산드라 공주가 러시아로 시집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러자 니콜라이언니러시아 대공과 결혼했지만, 두 종교를 함께 가지며 신앙 생활을 무난하게 극복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알렉산드라가 굳이 러시아 정교개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는 결국 사랑한다는 이유로 결혼에 골인하였는데 이들의 결혼식황제의 결혼식으로는 역사에 남을 만큼 검소하게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열렸다고 설명된다.

문제는 니콜라이 2의 부인 알렉산드라개인적 성향이다. 러시아 상류사회는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는데 독일 출신 황후는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지 못해 사교계에서부터 소외되었다. 처음부터 우호세력을 구축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잠재적 적대 세력들의 싹이 황실과 귀족 사회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독일인의 기질이 듬뿍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알렉산드리아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로마노프 왕조를 이어갈 사내아이를 출산하지 못하고 4명의 딸만 낳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러시아의 왕위 계승법에 의할 경우 아들이 없으면 로마노프의 왕가 남자 친척 중 한 명에게 넘어간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라4명이나 연속하여 딸만 낳았으므로 알렉산드라아들을 낳기 위해 종교적 신비주의로 눈을 돌렸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라스푸틴의 황태자 치료>

19047, 마침내 황태자 알렉세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태어나자마자 배꼽에서 출혈이 계속되었고 사소한 충격에도 심한 멍이드는 혈우병갖고 내어났다. 현재에는 혈우병이 수명에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 이병은 매우 위험한 유전병으로 서로 혈족 관계에 있는 유럽의 왕가에서 나타난 이었다.

 

Tsarina Alexandra Fedorovna, Grand Duchess Tatiana, Queen Victoria, Edward, Prince of Wales,

해가 지지 않는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던, 알렉산드라 황후외할머니빅토리아 여왕(18191901)네 명의 아들1명이 혈우병으로 생명을 잃었고, 들은 영국, 스페인, 독일, 러시아 왕가로 시집가서 후손들에게 혈우병을 퍼트렸다.

알렉산드리아알렉세이를 살리기 위해 티베트의 약초를 비롯한 특효약이란 특효약은 모두 구하느라 온 정신을 쏟고 있었는데 시녀인 안나(Anna Wyrubowa)라스푸틴에게 신비한 치료 능력이 있다고 그녀에게 추천했다.

라스푸틴이 황태자 방으로 안내되자 그는 주저 없이 황태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아가야. 이제 괴롭지 않을 거다. 눈을 떠보아라.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숨쉬기도 힘겨워하던 알렉세이는 눈을 뜨고 다정하게 라스푸틴의 손을 잡기까지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알렉세이는 눈에 띄게 안색이 좋아졌고 의사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190511월 라스푸틴을 만난 니콜라이 2는 일기에 밀리차와 스타나(첫째 딸 타티아나)와 함께 차를 마셨다. 토볼스크 지방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을 만났다라고 기록했다. 이 만남이 결국 로마노프 왕조몰락으로 가게 하는 단초였다.

 

<라스푸틴의 명성>

그 후 라스푸틴황실과 거의 2년 동안 만나지 않았는데 이는 라스푸틴이 자신의 행적이 러시아 상류층으로부터 시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실과 거리를 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알렉세이의 병이 안정으로 돌아서 그가 굳이 관여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알렉세이의 병을 치료해주었다는 소문은 상트페테스부르크에서 라스푸틴의 명성을 천정이 높은 줄 모르게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목의 대상이 되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러시아 주재 프랑스대사였던 모리스 펠레오로그가 다음과 같이 적었을 정도였다.

 

그의 모든 얼굴 표정호기심으로 반짝이고 깊고 매력적인 연한 푸른빛 눈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투시하는 듯 애무하는 것이었고, 순진하고 교활했으며, 가깝고도 먼 것이었다. 그가 흥분한 모습을 보이면 그의 신도들은 최면에 걸린 듯 행동했다.’

 

그의 에로틱한 모험러시아 귀족들의 호색적인 상상력을 자극했고 러시아 농민들도 그에 대한 이야기로 날을 지새울 정도였다.

 

러일 전쟁 러시아 발틱함대의 패배

라스푸틴러시아 황실과 연계될 때인 1905러시아일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가적인 수치심이 팽배되고 있을 때였다.

1904 일본만주와 한국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러시아 영토를 위협했다. 러시아인들이 일본의 행동분개하였고 니콜리스 일본과의 전쟁러시아의 사기를 높이는 신이 내린 승리로 보았다. 그러나 1905 러시아일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가적인 수치심이 팽배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다. 1905에 거의 120,000의 평화로운 시위자겨울 궁전으로 행진했다. 제국군은 그들에게 발포하여 수백 명을 살해했다. 블러디 선데이(Blood Sunday)로 알려진 이 사건은 황제에 대한 여론을 돌렸다.

결국 니콜라이 21905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의회1906년에서 1917까지 존속한 두마의 설치허가했고 1906피터 스톨리핀수상으로 임명했다.

놀라운 것은 이 동안 라스푸틴황실과 접촉하지 않았으므로 문제가 될 일이 없었다.

 

라스푸틴의 알렉세이 황태자 치료

그런데 1907년 말 황태자 알렉세이의 출혈이 다시 시작되자 라스푸틴이 또 다시 알렉세이의 병상에 호출되었다. 놀랍게도 라스푸틴이 도착하자 알렉세이의 병은 곧 안정되었고 출혈도 멈추었다. 또 한 번 알렉세이의 기적과 같은 치료라스푸틴황제의 가족들과 밀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라스푸틴신의 사자이며 황실에 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문제는 알렉산드리아라스푸틴을 너무 숭배하고 경애한 나머지 정치에 대해서도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고 알려졌다는 점이다.

사실 라스푸틴이 황가와 만난다는 자체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라스푸틴에 대한 모든 비난의 핵심 요인황가와 밀착인데 이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러시아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국가기밀 중 특급 극비 사항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시베리아 농촌의 하층계급 출신인 라스푸틴황제, 황후와 대면한다는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므로 황실 친족과 황실 관료 그리고 일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 무슨 일 때문에 라스푸틴이 궁정에 들어갈 수 있는지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정답을 알 수 없으므로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