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1)>
한국과 중국, 일본을 모두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세 나라의 궁궐 중에서 어느 나라 건물들이 가장 아름다우냐고 질문하면 단연코 한국의 궁궐이 가장 아름답다고 대답한다. 기다랗게 늘어져 버선코 마냥 날아갈 듯 오른 추녀선이며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단청을 보면 한국인들의 심미안이 놀랍다고 칭찬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의 건축물이 다른 나라 목조 건축물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한국의 자연적인 풍토와 잘 어우러지는 형태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으뜸으로 든다.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굳이 자연적인 지형을 깎거나 변형시키지 않았으며 나무나 돌도 자연을 그대로 이용했다. 건축물 재료조차 자연을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한국 건축물의 대부분에서 사용된 원형기둥이다. 이는 건축물에 사용된 나무가 원형이므로 특별한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반면에 일본과 중국의 경우는 사각형의 기둥이 자주 보인다. 사각형 기둥은 원형의 나무를 인공적으로 깎아 사각형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이 면만 보면 중국과 일본이 건물을 건설할 때 보다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계적인 톱이 없었던 과거에 원형 기둥을 사각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더구나 대형 건물에 사용되는 기둥은 매우 크기 때문에 쉽게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차이는 한국이 매우 안정된 국가라는 것을 뜻한다. 한국은 원칙적으로 노예제도가 없었다. 한반도 내에서 전쟁이 많기는 했지만 설사 죄를 지어 죄인이 되고 천민이 되어 양반에 소속되는 신분으로 되었다 해도 외국의 노예에 비할 바가 아니다. 노예와 같은 잉여 노동력이 없던 한국에서는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고 당연히 자연에 가장 알맞은 형태를 생각했다. 그렇다고 원형기둥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아니다. 대형 건물의 기둥은 착시 현상을 고려하여 배불림을 채택했으며 목조 건물에 있어서의 피치 못할 단점인 부식 문제를 아름다운 단청으로 해결하였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건축 방법 즉 한국의 자연과 환경에 알맞도록 모든 것을 조화시켰다는 것은 건축에서 어느 나라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기술과 철학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창덕궁은 1997년 우리나라의 궁궐 중에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은 움직일 수 없는 건축물, 성곽, 탑 등이 그 대상이며, 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해당 문화의 유산이나 자연유산의 진정성, 가치의 탁월성, 해당 국가의 관리 계획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창덕궁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공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한 문화권 내에서의 건축, 기념물 조각, 정원 및 조경 디자인, 관련 예술 또는 인간 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인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는 궁전>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경복궁을 창건했지만 2대 정종은 다시 개성으로 환도한다. 3대 태종 때에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기는데 이때 경복궁 동쪽에 별궁을 짓는다. 이것이 창덕궁이다. 초창기의 창덕궁은 외전(外殿) 74칸, 내전(內殿) 118칸으로 현재 창덕궁보다 작았다. 창덕궁의 ‘창덕(昌德)’이란 덕을 빛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궁인 경복궁이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조선 초기의 왕들은 창덕궁을 크게 이용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정궁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소실되자 창덕궁이 가장 먼저 재건되었다. 이후에도 창덕궁은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됐으나 인조 25년(1647)에 재건 공사를 완료했다. 복구된 건물은 인정전, 승정원 등 314칸과 내전 421칸으로 합계 735칸이 되는 대규모 공사였다.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정문인 돈화문이 남향으로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 정전의 출입문인 인정문이 나타난다. 인정문의 좌우로 행랑이 있는데 이 행랑에 둘러싸인 중앙에 인정전이 자리 잡고 있다. 인정전의 우측에 편전인 선정전이 있고 선정전 우측으로 내전, 희정당의 뒤로 대조전이 있다. 희정당의 동편에 성정각 등 부속건물이 있으며 담장을 경계로 동궁(東宮)과 창경궁이 접하여 있다. 내전의 뒤로 후원이 전개되며 이 후원도 동쪽으로 창경궁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정궁이었던 경복궁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경복궁은 외전과 내전이 앞뒤로 놓이고 정문과 정전은 남북으로 뻗은 직선 축 상에 나란히 놓여 있는데 반하여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롭게 건물들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창덕궁은 경복궁이 조선말기에 복구될 때까지 300여 년간 역대 왕이 정사를 본 왕궁으로 창경궁과 함께 ‘동궐’ 또는 ‘동관대궐’이라고 불렸다.
창경궁은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에 거처하던 궁인 수강궁(壽康宮) 터에 1419년에 건설한 것이다. 성종은 왕실의 어른인 정희왕후 즉 세조비이자 성종의 할머니, 덕종비이며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예종비이며 성종의 작은어머니인 안순왕후와 창덕궁에서 거처했는데 이들을 위하여 따로 지은 궁궐이 창경궁으로 일종의 대비궁(大妃宮)이라 볼 수 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광해군 2년(1610)에 중건하여 사용하다가, 인조반정(1623)으로 다시 불에 탔고, 인조 25년(1647) 다시 중건이 시작된 이후 크고 작은 화재와 재건축이 이어졌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부터 경복궁 재건 전까지 약 270여 년간 법궁(정궁, 왕이 정사를 돌보며 살아가는 곳)의 역할을 대신 해 왔다.
창덕궁은 조선인들로부터 사랑받던 궁궐이었으나 조선말기의 환란을 겪은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광무 1년(1907), 순종이 즉위하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의 조약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이루어졌으며 순종이 창덕궁 전하(殿下)로 격하되면서 500여 년의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리는 것도 목격한다.
1917년 내전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 내전 건물들을 모두 헐어다 이곳으로 옮겨 짓는다. 또한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을 후미진 곳으로 이전하는 등 일제는 의도적으로 창덕궁의 모습을 왜곡했다.
1926년 4월 25일에는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창덕궁은 주인을 잃었다. 일제는 곧바로 일반인들에게 관람을 허가하여 창덕궁은 관람장으로 변하였고 한때 '비원(秘苑)'으로 축소․왜곡되어 불려지기도 했다. 1970년대까지는 동쪽으로 창경궁과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남쪽으로 종묘가 자리하고 있으므로 1990년대 대대적인 복원을 통해 이들을 연쇄적으로 방문할 수 있다. 현재는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궁궐로 남아있다.
<변천사>
창덕궁 창건 배경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했을 때 이미 한양에는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이 건설되어 있었다. 그런데 왕위 계승문제 등 계속되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1~2차 왕자의 난을 경복궁에서 겪게 되고, 정종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개성으로 천도한다.
정종의 뒤를 이어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한 태종은 취약한 권력 기반을 다지고, 왕권 강화를 위해 한양 재천도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쉽게 관철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는 한양 천도와 궁궐을 새로이 짓는 문제가 권력기반의 완성을 의미했기에 태종의 노력은 집요했다.
마침내 태종은 태종 4년(1404) 새로이 궁궐 조성을 명함으로써, 그해 10월부터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이궁(離宮)으로 조영되기 시작한다. 결국 태종은 이듬해 한양 천도를 단행한다. 1405년 궁궐이 완성된 지 하루만인 10월 20일 태종이 궁궐에 임어하게 되며, 10월 25일 창덕궁(昌德宮)이란 궁호를 받았다.
태종의 창덕궁 임어와 더불어 한양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도읍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조선왕조는 본격적인 체제 정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최초의 양 궐 체제를 갖추게 되는데 이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여러 궁궐이 건설되는 단초가 된다. 태종 즉위 후 5년만의 일이다.
여하튼 태종이 정궁인 경복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궁인 창덕궁을 건설한 것은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경복궁에 대한 나쁜 이미지 때문으로 추정한다.
헌종 연간에 편찬된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순조가 친히 지은 「창덕궁명병서(昌德宮銘幷序)」에 '덕의 근본을 밝혀 창성하게 되라'는 뜻이 창덕궁의 이름에 담겨져 있다고 전한다.
원래 이궁은 ‘천자출유지궁(天子出遊之宮)’이라 하여 왕이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궁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왕위에 있을 때 몇 달을 제외하고는 경복궁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창덕궁을 이궁이라고 볼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더구나 태종이 경복궁을 소홀히 하여 폐궁으로 만든 것도 아니므로 근본적으로 태종은 두 개의 궁궐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태종 이후 세종부터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자유롭게 이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궁궐 내에 화재나 전염병과 같은 재난이 있을 때 거처할 곳을 따로 마련해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궁이나 별궁 제도는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140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은 외전 83칸, 내전 195칸으로 총 278간 규모였으며, 당시 총 755칸에 달하는 경복궁에 비하면 3분의 1 정도였다. 창덕궁은 왕이 오랫동안 거처하는 궁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궁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작은 규모로 설계한 것이다. 그 이후 공사는 계속되어 태종 6년(1406)에 광연루(廣延樓)가 완공되고, 며칠 뒤 동북쪽 후원에 해온정을 건설했다.
태종 11년(1411)에는 누각과 침실, 그리고 진선문(進善門)이 세워지고 그 남쪽에 석교를 세우고, 이듬해 돈화문(敦化門)이 건립되었다. 이후 세종 즉위년(1418) 9월 인정전이 완공되자 세종이 창덕궁으로 잠시 이어하게 된다. 세조 7년(1461)에는 전각의 이름을 개정하여 이전의 전각 명칭과는 다른 '고유명칭'을 부여받았으며 계속 궁역을 확장하였다.
그 뒤 성종 6년(1475)에는 서거정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지어 올리게 하여, 성종이 직접 선별에 나서 총 29개 문 이름을 확정하기도 했다. 또한 성종 대에는 창덕궁의 정비와 더불어 창경궁이 완공됨에 따라 경복궁이 정궁이 되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이궁으로 삼게 하는 정궁과 이궁의 '양궐체제(兩闕體制)'를 완성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창덕궁 역시 왜군에 의해 소실되고 만다. 이후 경복궁, 창덕궁 등을 재건하지 못하다가 선조 말에 들어와 창덕궁의 재건에 나선다. 당시 환도한 선조의 거처는 정릉동에 있는 월산대군의 사저로 정릉동은 지금의 덕수궁(경운궁)이 있던 곳이다. 이곳을 정릉동이라고 하는 것은 태조 때 신덕왕후 현비의 능인 정릉을 이곳에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릉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 현재의 정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고적으로 조선 궁궐에 대해서는 김정호가 1824년에서 1834년 사이에 제작한 「수선전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세로 82.5㎝, 가로 67.5㎝로 실측에 의해 정밀하게 그린 지도로 1820년대 초 서울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렸다. 도성의 주요 도로와 시설들과 성 밖의 마을과 산, 절까지도 자세하게 나타냈는데 흥미로운 것은 잘 알려진 육조가 창덕궁 돈화문 앞이 아닌 경복궁 광화문 앞에 육조가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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