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금천교(錦川橋)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에서 궁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으로 축대를 쌓아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했다.
황기영 박사는 조선왕궁에는 북쪽인 현무(玄武)에서 발원하여 외당을 회유하면 극히 길하다는 개울을 금천(禁川)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의 뜻을 살리기 위한 명당수의 의미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금천과 어도가 만나는 지점에 다리가 놓이는 것이 기본으로 이런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錦川橋)라고 한다.
태종 11년(1411) 3월, 진선문 밖에 처음 조성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금천교 중 가장 오래된 다리다. 다리는 궁궐마다 설치되는 공통적인 건조물이지만 다른 궁에서는 정문에서 들어오는 주축에 설치되는 데 비해 이곳 창덕궁의 금천교는 직각으로 꺾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지형을 인위적으로 변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적절히 활용한 궁궐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설물로 학자들은 아마도 창덕궁이 법궁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돌다리 폭은 왕이 거동할 때 좌우의 호위군사가 함께 행진할 수 있을 만큼 넓다. 전체가 세 구획으로 이루어진 삼도인데 가운데의 어도가 상당히 넓고 다리는 두 개의 홍예를 틀어 돌난간을 세웠다. 삼도는 장대석으로 깔았으며 동서 방향이다. 홍예의 가운데 남북방향으로 귀면을 각각 양각하여 새겨놓았다. 홍예 사이에 역삼각형의 귀면 석재가 있는데 조각된 귀면은 부정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 이 역삼각형의 석재를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서는 ‘청정무사’라고 했는데 귀면이 잠자리 두 눈 사이의 모습과 유사하여 불려 진 듯하다.
그 앞 뒤 짐승이 앉아 있는데 남쪽의 동물은 얼핏 보면 해태 같기도 하지만 몸에 털이 아니라 비늘이 덮였고 뿔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으로 보아 해태는 아니다. 홍순민 박사는 백택이라고 하는 또 다른 상상의 짐승으로 추정했고 북쪽에 있는 것은 몸통은 거북이 같으나 얼굴을 보면 이것 역시 거북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금천교는 현재 진선문과 숙장문의 축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하지만 182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를 통해보면 일직선상의 축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2001년 현재 금천교 발굴조사를 통해, 원래의 위치에서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위치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③ 진선문(進善門)
진선문은 대문인 돈화문 다음에 나오는 일종의 중대문이다. 돈화문과 인정문 사이에 문을 하나 더 첨가한 것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다.
문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1409) 기사에 진선문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창덕궁 창건 무렵으로 추정한다.
진선문과 인정문, 숙장문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모두 헐리어 화단으로 꾸며지는 수난을 겪었다. 세 문과 행각으로 에워싸인 가운데 빈 공간은 궁궐 안의 작은 광장으로 조하(朝賀)의식과 즉위식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때문에 이곳은 나무를 심거나 조경을 하지 않는 곳이었는데, 1908년 인정전 개수 공사 때 이곳에 화단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어 원형과 기능을 훼손시켰는데 1999년 복원되었다.
진선문이 잘 알려진 것은 억울한 백성들이 와서 칠 수 있는 큰 북 소위 신문고 또는 등문고(登聞鼓)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대에 처음 설치하였으나 그후 유명무실해졌다가 영조대에 다시 설치했다.
④ 외전
진선문을 들어서면 궁궐의 두 번째 마당이 나온다. 이곳은 인정전의 바깥 행랑과 더불어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 '인정전 외행랑 뜰'이라고도 부른다. 마당의 서쪽 행랑은 첫 번째 마당 쪽으로 서향하고 있으며, 남쪽 행랑에는 내병조(內兵曺), 호위청(扈衛廳), 상서원(尙瑞院)이 있으며, 동쪽 행랑에는 배설방(排設房)이 있다. 북쪽 행랑은 모두 인정전 마당을 향하고 있으며, 남쪽 행랑의 내병조 역시 남향하고 있어 진선문 쪽에서는 벽만 보인다.
호위청은 궁중의 호위를 맡아보는 군영으로 인조1년(1623년)에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 세력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며 상서원은 새보, 발병부, 마패, 절부월 등 각종 증명을 관장하는 기관이다. 배설방은 전설사에 소속된 관청으로 궐내에서 왕이 주관하는 행사 때 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천막인 차일(遮日)과 휘장을 치는 일을 맡았다.
그러므로 이들 마당은 극도로 단순화되고 절제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적 절제 덕분에 마당을 가로지르는 어도의 방향성이 더욱 강조된다. 이 마당은 북쪽의 인정문을 통하여 궁궐의 으뜸 공간인 인정전 마당으로 이어지고, 또한 동쪽 숙장문을 통해 궁궐의 깊숙한 영역으로 이어지는 전이의 공간이다.
이곳 두 번째 마당은 그 모양이 정형화된 직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 모양이다.
진선문이 있는 서쪽 행랑은 길고, 숙장문이 있는 동쪽 행랑은 그보다 짧다. 이처럼 대칭적이고 반듯하게 세우는 일반적인 궁궐 건축과 달리 마당 모양이 사다리꼴을 이룬 까닭은, 동쪽 숙장문 쪽 바로 뒤에 종묘에 이르는 산맥이 뻗어 있어, 이곳으로 더 넓힐 수 없기 때문이다.
종묘는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시는 신성한 공간인데 종묘를 받치고 있는 산의 뿌리를 훼손하면서 궁궐을 짓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세종 1년(1419년)에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이 인정문 밖 마당이 반듯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창덕궁 건설을 현장에서 지휘한 박자청을 하옥시킨 바 있다.
‘처음 태종이 인정문 밖에 향랑을 건립하라는 명령을 내려 박자청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함과 동시에 아무쪼록 단정하게 할 것을 명했는데, 박자청이 뜰의 넓고 좁은 것도 요량하지 않고 성 짓기를 시작하여 이미 기둥을 세우고 상량까지 하였으니, 인정전에서 보면 경사가 진 것처럼 보여 바르지 못하므로 태종이 성내어 곧 헐어버리게 하고 박자청 등을 하옥시켰다.’
이 기록을 보면 이 마당이 사다리꼴인 것은 원래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동궐도』에는 행랑에 내병조, 상서원, 호위청 등의 관청이 들어서 있는데, 경사진 행랑을 고치라고 명하면서 행랑을 세우지 말고 도로 담장을 쌓도록 했던 것으로 보아 처음과는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④ 선원전(璿源殿)
진선문 북쪽에 ‘구선원전’이 있다. 선원전은 태조와 현 왕의 4대조의 초상화(어진)을 모셔놓고 초하루, 보름 기타 생신이나 기일 등 수시로 왕이 직접 가거나 신하들이 차례(茶禮)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다. 종묘가 국가의 대표적 상징으로 제계의 대상이었다면 선원전은 왕실의 정신적 지주로서 궁궐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으로서는 조선왕조의 높은 뜻이 있는 선원전을 그대로 두지 않고 1927년 창덕궁 후원 서북편에 있던 대보단 자리에 새로 선원전을 짓고 어진을 옮겼다. 그러므로 원래의 선원전은 빈 건물이 되었고 구선원전으로 불린다.
⑤ 인정문(보물 제813호)
궁내의 정전인 인정전은 보물 제813호인 인정문을 통해 들어간다. 인정문은 태종 5년(1405) 창덕궁 창건 때 세워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문은 어칸이 좌우의 문보다 조금 더 크며, 좌우로 10칸의 행각이 연결되어 있고 그 행각이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인정전의 조정을 이룬다.
인정문은 법전인 인정전을 통행하는 문으로 그 격이 상당히 높은 문이다.
왕으로 즉위 전에는 아직 법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으므로 인정문에서 즉위하고 인정전으로 들어가 좌정한 후에 비로소 대소 신료들의 하례를 받았다.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등 여러 왕이 이 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므로 인정문과 인정전은 조선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자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되는 등 공식적으로 국가 행사가 열린 건물로서 큰 의미가 있다.
이 문에서 특이한 것은 용마루의 양성 부분에 장식돼 있는 구리로 만든 세 개의 오얏꽃 문양이다. 이것은 1907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기 전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게 한 후 대한제국의 황실 문양으로 사용된 것이다. 오얏꽃 문양은 이곳뿐 아니라 인정전과 희정당 앞 건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일제가 조선 왕조를 이왕조라는 하나의 귀족 가문으로 격하시킨 것을 의미한다.
인정문 역시 여러 차례의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재건되었으나 영조 20년(1744) 인접한 승정원에서 불이 나면서 다시 소실돼 이듬해 3월 중건되었고, 순조 3년(1803) 선정전 서쪽 행각의 화재로 불탔으나 다시 복구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1912년 무렵 일제가 행각을 전시장으로 용도 변경하면서 벽체와 바닥의 구성을 일본식으로 변형했던 것을 1988년 복원해놓은 것이다.
이곳 인정문 밖에서 왕실의 행사가 이루어지므로 주위의 행각에는 궐내각사인 많은 관아가 들어서 있었다. 남쪽 행각으로는 궁궐 각 문의 열쇠를 관리하거나 왕의 출입시 앞길을 인도해주는 내병조(內兵曹), 궁중을 수호하는 호위청(扈衛廳), 옥쇄나 마패 등을 관장하는 상서원 등이 있었으며, 진선문의 남북 행각에는 의식에 쓰이는 줄이나 끈 등을 관장하던 결속색(結束色), 궁궐 안의 군장비를 관리하던 정색(正色), 의식이 있을 때 장막을 공급하던 전설사가 있었다. 그리고 숙장문의 남북 행각에는 왕의 장막 설치를 관장하던 배설방이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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