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우대>
선조가 정궁인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먼저 재건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조선왕조 초기부터 제기된 길지설(吉地說)이다.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난 경복궁은 불길한 곳이라는 인식이 종종 제기되었고 특히 세종 조에는 경복궁에 대한 신료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표출되기도 했다.
둘째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경복궁보다 규모가 작은 창덕궁 일대를 복구하는 것이 민력의 소모를 줄일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라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중건은 워낙 큰 역사이므로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대원군이 중건을 시작한다. 그동안의 조선왕조의 상당 부분이 사실상 창덕궁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창덕궁은 계속 수난을 당하는데 인조반정(1623) 당시 실화로 인조반정군이 광해군을 수색하는 와중에 실수로 불을 내었다고 알려진다. 이듬해 인조반정의 공적 평가에 대한 불만으로 촉발된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다시 한 번 크게 소실된다. 창덕궁은 인조 25년(1647년)에 이르러서야 복구되면서 원래의 규모를 거의 회복하였다.
그 후 정조 즉위년(1776)에 현재의 부용지, 즉 금원의 북쪽에 규장각을 건설하며 동궁을 왕의 침전 가까운 곳으로 짓게 하였다. 순조 3년(1803) 12월에는 인정전이 소실되고 이듬해 중건하게 되었으며, 순조 33년에는 큰불이 일어나 희정당과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의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헌종12년(1846)에는 후궁들을 위해 낙선재 일곽이 만들어졌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물러나고 덕수궁에 머물게 되자, 순종이 창덕궁에 임어하게 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인정전에서 강제 체결되는 비운을 겪게 되면서 조선왕조는 이곳 창덕궁에서 막을 내린다.
1917년 대조전 서쪽에서 큰불이 일어나 대조전, 희정당, 경훈각, 선정전 동쪽의 내전 등이 크게 소실되며 대조전 영역의 복구는 1919년 정월 고종의 승하와 삼일운동, 고종의 국장 등으로 인해 1920년에서야 준공을 보게 된다. 더구나 복구과정에서 경복궁의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경성전, 응지당, 흠경각, 함원전, 만수전, 흥복전 등을 헐어내고 그 목재로 창덕궁의 대조전, 희정당, 흥복헌, 경훈각, 함원전 등을 건설했다.
1917년 창덕궁의 대조전의 화재가, 실수로 일어난 화재가 아니라 '일제에 의한 고의적인 방화'로 추정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복원된 창덕궁 대조전 일대의 영역은 건축 양식을 절충해서 짓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21년에는 창덕궁 후원 동북쪽 후미진 곳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옮기면서, 인정전 서쪽에 있던 원래의 선원전은 폐지되고 만다. 선원전은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이는 궁궐의 공간 중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1926년 4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함에 따라 창덕궁은 본격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인정전 동서 행각과 인정문 등이 철거되어 전시장으로 개조되고, 수많은 전각들이 헐렸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대대적인 정비 공사가 벌어졌으며 1995년부터는 인정문과 인정문의 서쪽 행각, 1999년부터는 진선문과 숙장문이 복원되었고 계속 복원 중이다. 창덕궁은 1989년 낙선재에서 돈화문을 통해 이방자 여사 운구행렬이 빠져나간 이후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공간구성과 배치>
창덕궁의 공간구성은 고대 궁궐 제도의 규범으로 전해지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따른 공간구성의 기본적인 원칙과는 크게 다르다.
창덕궁의 공간구조는 정전(正殿), 침전(寢殿), 편전(便殿)으로 이루어진 인정전 주변의 공간과 후원(後苑)이라는 크게 둘로 양분되어 있다. 더구나 창덕궁은 조선시대 내내 거주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생활공간이었기 때문에 왕의 어머니인 대비가 거주하는 곳(만수전, 춘휘당, 천경루, 양지당 등)은 물론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장소 등의 다양한 기능이 부가되었다.
그러므로 궁궐이 원래 왕의 집무 공간이자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이지만 창덕궁의 경우 집무 공간보다는 생활공간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 그러므로 관료들의 공간도 많지 않았고 각 건물도 경복궁보다 작은 규모다. 가장 중요한 건물인 인정전에 대해 태종이 너무 협소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창덕궁은 주어진 지형지세를 활용한 자유로운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변 경관과 조화를 중시하여 한국적인 궁궐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주례』의 궁궐제도는 어디까지나 규범일 뿐 이를 활용도에 맞게 창의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창덕궁은 응봉 아래 비좁은 곳에 자리를 잡았고 그 지세가 평탄하지 않았다. 따라서 건물의 배치가 자유롭고 지형조건을 최대한 이용하여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건물이 남북방향으로 배치되었던 경복궁과는 달리 건물들이 동북방향으로 옆으로 놓였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서남 모서리에 있고 법전인 인정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길을 꺾고 금천교를 건넌 후 다시 왼쪽으로 꺾어야한다. 편전인 선정전은 인정전의 동쪽에 있으며, 침전인 희정당과 대조전은 다시 편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창덕궁의 후원은 궁궐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창덕궁의 동쪽으로는 창경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자연의 지세를 최대한 활용했던 고려궁궐의 기본배치를 충실히 계승하고, 고려시대 이래 관습적으로 이어오던 궁중 생활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의 전체 규모를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것은 1830년 전후에 작성된 『동궐도』가 있기 때문이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건축 그림이다. 우리나라 궁궐 그림의 최대 걸작이자 가장 많은 정보를 전하고 있는데 『동궐도』는 한 면이 가로 36.5센티미터, 세로 45.4센티미터의 16폭이며 전체를 펼쳐놓으면 가로 584센티미터, 세로 273센티미터의 대작이다. 당시 궁 안에 실재했던 누정, 다리, 담장은 물론 연못, 괴석 등의 조경과 궁궐외곽의 경관까지 세밀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화원들의 뛰어난 화공기법과 정밀성을 엿볼 수 있는데 국보 제 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조 30년에 불타버린 환경전과 순조 34년에 중건된 통명전 경복전 건물은 없고 터만 그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제작 연대는 1826〜1828년 경으로 추정된다.
비단에 먹으로 그리고 채색했으며 부감법을 사용하여 그린 것으로 창덕궁과 창경궁 전각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조경과 산수까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배치에서 축, 건물간의 거리, 방향에 대해서는 화법의 속성상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또 다른 그림으로 『동궐도형』이 있는데 이는 1900년 전후한 시점에 그려진 것으로 『동궐도』와는 달리 건축 평면도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각 간의 치수를 척(尺) 단위로 기입하여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창덕궁을 초기에 건설한 책임자 즉 건축가는 감역관 박자청이다. 그는 창덕궁 영건 당시에 이직, 신극례 등과 함께 제조(提調)에 참여했고 성균관 문묘를 건설하는 공사에도 참여했다. 우동선과 조재모 박사의 글에서 많은 부분을 참조했다.
박자청은 원래 황희석의 수행원 출신인데 영선 공사에 자질을 발휘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성질이 다소 까다롭고 급하여 공사 감독을 하면 항상 빨리 완공하도록 재촉하여 인부들로부터 불만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번번이 조정에 소환되어 질책을 받기도 했으나 원래 건축공사에 능력이 있으므로 태조 산릉의 공사, 군자감 공사, 정릉동의 흥천사 공사 등에 계속 참여했고 공조판서에 이를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태종 11년(1411)에 만들어진 창덕궁의 최고 구축물로 불리는 금천교 역시 그의 감독 아래 만들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종조의 경복궁 공사, 시전 장랑의 건설에도 참여했다.
<창덕궁의 주요 건물>
창덕궁은 1997년 우리나라의 궁궐 중에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므로 창덕궁 안에 있는 수많은 건물들 모두가 세계유산이라 볼 수 있다.
창덕궁은 한국 궁궐의 간판스타 중 하나이므로 현재 국보 1점, 보물 11점, 천연기념물 4개, 근대문화우산 6점이 있다. 그러므로 창덕궁의 수많은 건물을 일일이 소개하는 것이 만만치 않으므로 중요 건물을 위주로 설명하되 한국의 간판 정원으로 알려진 후원을 별도로 설명한다.
① 돈화문(보물 제383호)
돈화문은 2층으로 된 창덕궁의 정문이다.
과거에는 지금의 종로3가에서 돈화문로로 걸어 올라오는 것이 주경로였으므로 종로에서보면 돈화문 뒤에 자리한 응봉 줄기와 그 너머 주산인 북한산 보현봉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북한산 줄기에 안겨 있는 창덕궁 돈화문은 궁궐의 위용을 갖추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태종12년(1412) 5월에 건설되어 2층 문루에서 큰 북을 걸고 조석으로 인경을 쳤으며 문종 즉위년(1450) 6월에 돈화문를 재축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1608)에 재건되었음이 1976년 돈화문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굴된 상량문을 통해서 밝혀져 창덕궁에 현존하는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진다.
현재 돈화문을 창덕궁의 정문으로 여기지만 과거에는 돈화문을 설명할 때 인정전의 가장 바깥문이라고 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창덕궁에 들어가기 위한 정문이지만 과거에는 왕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문 앞의 널찍한 터를 월대(月臺)라고 한다. 지면에서 일차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고, 다시 2층 기단을 쌓아 그곳에 돈화문은 쌓고 시각적, 심리적으로 우러러 보게 만들었는데 이 월대가 한동안 사라지게 된 적이 있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순종과 총독부 고관들이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출입의 편리를 위해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땅에 묻힌 채 90여 년이 흐르다 1997년에 이르러 월대를 되살리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아주지 못하고 지금과 같이 도로면보다 낮게 노출된 채 어색하게 복원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런 세월의 변화를 탓할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세월의 변화도 역사의 한 장이기 때문이다.
돈화문은 다른 궁궐의 정문보다 규모가 큰 정면 5칸 측면 2칸에 2층 구조인데, 중앙에 4개의 고주와 앞뒤와 옆면에 14개의 평주(平柱)를 세워 그것을 받치고 있다. 지붕은 우진각이며, 공포는 외2출목, 내3삼출목의 다포계 건물이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 세 개의 홍예문을 놓은 석축 위에 2층의 문루를 세운 것과는 다른 구조인데 특이한 점은 정면 5칸 가운데 좌우로 한 칸씩이 벽으로 마감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다분히 중국을 의식한 구조다. 중국의 황제가 아닌 제후국의 군주는 대문을 3칸으로 해야 한다는 과거 동아시아에 통용되던 원칙을 수용한 결과다.
여하튼 좌우 협칸의 안쪽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고 2층 입구에는 판문을 달았다. 안쪽 기둥 없이 탁 트인 공간에는 장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서까래와 종도리가 올려다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사면 벽에 널빤지의 판문을 설치하여 적이 공격하면 얼른 몸을 숨겨 방어할 수 있게 했다. 거북선에도 이런 판문이 설치되어 있다.
건립 당시에는 이곳에 큰 종과 북을 걸어놓고 시각을 알려주거나 비상시에 위급을 전하는 등 군사용으로 설계되었지만 영조가 2층에서 신료들로부터 생일 하례잔치를 받기도 하여 전투 장소의 개념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원래 평상시에 궁궐의 정문을 이용하는 것은 왕이나 외국 사신들이었는데, 돈화문 역시 왕의 전용문인 가운데 어칸을 좌우보다 조금 넓게 하여 위계를 두고 있다. 신료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들던 문은 동쪽에 있는 1칸짜리 단봉문(丹鳳門)이다.
돈화문 양쪽으로는 문을 지키던 수문장이 근무하는 수문장청이 있었으나 지금은 담으로 변해 있다. 돈화문과 관련해 특이한 점은 돈화문의 지붕양식이다.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돈화문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우진각지붕이다. 또한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문이 모두 우진각지붕인데 돈화문 지붕이 팔작지붕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은 의문이 남는 부분이다. 돈화문은 1996년 12월 돈화문 앞 석계 공사를 마무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보물 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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