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창덕궁(덤 창경궁) 답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5)

Que sais 2021. 6. 2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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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전(宣政殿 : 보물 제814)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은 창덕궁에서 매우 큰 중요도를 갖고 있는 건물 중 하나다.

선정전은 외전(外殿)에 속하는 편전(便殿)으로 편전이란 왕이 신하들과 국가의 정치를 논하던 공식 집무실을 말한다. 그렇지만 대개의 궁궐 전각들과 같이 공식 집무실의 용도로만 국한되어 쓰인 것은 아닌 점에서 특징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궁궐지에 의하면 성종 2(1417) 가을에 왕비가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고 적혀있다. 또한 성종 8(1477) 3월에 왕비가 첫 친잠례를 행한 이후에 선정전에서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고 치사했으며, 문신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과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선정전은 명종 8(1533)에는 문정왕후수렴청정을 한 곳이기도 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단층 팔작지붕의 다포계 건물로 남쪽에는 행각이 있고 특이하게 정면 중앙에서 선정문으로 연결되는 길에 사방이 트인 천랑(穿廊)이 설치되어 인정전으로 이어진다.

 

선정전

이런 선정전 앞에 돌출된 전면 복도는 정조 사후 선정전이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사용된 것과 관련이 있다. 선정전은 순조 즉위년인 1800, 정조의 혼전으로 쓰인 이래 순조, 헌종, 철종 등 역대 왕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선정전에도 혼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전면에 정자각(丁字閣)을 세웠다. 순조 이후 선정전이 혼전으로 자주 사용되자 편전의 기능을 잃고 침전 권역에 있는 희정당편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내부는 전체가 탁 트인 하나의 공간으로 천장에는 소란반자로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가운데 뒷벽 천장에는 보개, 아래로는 벽을 만들고 일월오악병을 세웠으며 그 앞으로 용상을 놓았다.

또한 선정전 앞에 월대를 두었고, 월대 모서리에는 드므를 설치했다. 이는 선정전의 위상이 창덕궁 내에서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순조 이후에는 희정당이 편전의 역할로 주로 사용되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선정전 바로 앞에는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장방(長房)이 자리 잡고 있는 마당이 동서로 길게 붙어 있었다. 선전관청에 근무하는 선전관은 숙직을 하면서 왕을 측근에서 호위하고 왕이 긴급하게 군사 지휘관을 소집하거나 군사를 동원할 때 연락을 담당하였다. 장방은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내시를 일컫는 말로, 이들이 있던 곳도 장방이라 불렀다.

또한 선전관청 남쪽으로 인정전 동쪽 행각의 남북으로 나란히 마당이 두 개 있는데 선전관청 바로 아래 마당에는 우사(右史)와 당후(堂后), 문서고(文書庫)가 있다. 우사와 당후는 왕을 중심으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을 일컫는 말로, 사관이 머물던 곳이다.

 

선정전 회랑

사관은 왕 가까이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기록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를 남겼다. 사초는 기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사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위하여 비록 왕이라도 볼 수 없었다. 우사와 당후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날마다 기록하여 사초를 쓰는 곳이었으므로, 이들 사초를 보관하는 문서고를 옆에 두었다.

우사와 당후가 있는 마당의 바로 남쪽 마당을 중심으로 은대(銀臺)와 상서성(尙書省), 육선루와 악기고, 대청(臺廳)이 자리잡았다. 은대와 상서성은 도승지를 비롯하여 왕의 명령을 받드는 승정원의 다른 이름이다. 육선루는 승정원의 다락으로 육선루와 나란한 누마루에는 악기고가 있었다. 인정전 마당에서 많은 행사가 열리므로 행사가 있을 때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이 손쉽게 악기를 꺼내 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대청은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왕의 옳고 그름을 논할 때 모이던 곳이다. 그러므로 우사, 당후, 은대, 대청이 있는 마당 우측에는 장방, 궁방(弓房), 주원(廚院), 공상청(供上廳), 서리방(書吏房), 정청(政廳), 대은원(戴恩院), 등촉방(燈燭房), 사알방(司謁房), 소주방, 내반원(內班院) 등이 각자 작은 마당을 이루었다.

주원사옹원(司甕院)의 다른 이름인데 왕의 식사와 궐내 음식 공급 등을 담당하였다. 소주방은 왕의 식사를 비롯한 궐내의 더운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궁방은 활과 화살촉, 등촉방은 등불과 촛불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내시부(內侍府)에 속한다. 사알방액정서에 소속된 정6잡직 관원으로 항상 왕 곁에 있으면서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하들이 왕을 알현하는 것에 관한 일을 돕는 곳이다.

서리방은 궁궐내 각 기관의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가 머물던 곳으로, 이들은 문서 처리, 기록, 연락 등 행정 실무를 처리했다. 정청은 이조의 당상관 및 병조판서 등 문무관을 선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궁중에서 사무를 보던 곳이다. 내반원은 환관들의 관청인 내시부의 다른 이름으로, 궐내 음식물 감독, 명령 전달, 궁문 수직, 청소 등의 임무를 맡았다.

궁궐의 여러 일을 나누어 담당했던 이런 기관들이 왕의 집무 공간인 선정전에 조밀하게 모인 까닭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왕을 보호하는 동시에 왕의 편의를 위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선정전만 외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나마 선정전 앞의 정자각선정문 그리고 선정전을 홑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모두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선정전은 소규모의 단층 건물로 왕이 평소에 정사를 펴던 편전이지만 현재 궁궐에서 유일하게 청기와가 남아 있는 건물로 유명하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선정전 지붕이 초록색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청기와로 지붕을 올렸기 때문이다.

청기와에 대해 좀 더 설명한다.

청기와는 고려청기와라는 이름으로 중국을 비롯한 인근 국가에서 명성을 떨칠 정도로 고려청자의 맥을 이은 기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청기와는 자기를 굽는 것과 유사하므로 지붕을 덮을 정도의 청기와를 생산하려면 엄청난 공과 인력이 소요되었다. 한마디로 건물의 지붕으로 청기와를 덮는다는 것은 엄청난 청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기와로 지붕을 덮으면 건물의 위상이 다르므로 조선의 왕들의 애착은 남달랐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경복궁의 근정전과 사정전을 청기와로 지었는데 세종 15 근정전 취두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다. 취두망새라고 해서 용마루 끝에 얹은 장식 기와다. 세종은 당연히 청기와로 수리하려 했으나 청기와 제작비용 문제 때문에 아련와(牙鍊瓦)로 대체한다.

세종은 5년 뒤인 세종 20년 다시 근정전 수리를 위해서 청기와를 굽고자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청기와는 그 재료가 염초인데 염초는 화약을 만드는데 절대적인 군수물자이고 굽기가 어려운 것은 물론 비용이 많이 들어 신하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세종을 뒤이은 문종은 부왕인 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대자암을 새로 짓고 청기와를 얹고자 했는데 이 역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친다. 명분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혼을 모신 문소전종묘에도 청기와를 얹지 않았는데 불당을 청기와로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때도 청기와 제작비용을 문제 삼았다.

세조의 경우 회암사원각법회에서 석가여래가 나타나고 감로가 내리는 기이한 상서로움이 나타났다며 원각사 건설을 명한다. 원각사를 짓기 위해 민가 200여 채를 철거하고 군사 2,100명이 동원된 거대한 불사인데 이를 청기와로 덮으려고 했지만 법당을 덮는데 80,000개의 청기와가 필요하다고 하자 세조도 놀란다. 청기와 즉 청자로 된 도자기가 80,000개가 필요하다는 말에 결국 포기한다.

성종세조의 혼을 달래기 위해서 중창한 봉선사를 수리하면서 청기와를 얹는다. 이 역시 신하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성종의 효심을 꺾지는 못했다. 또한 즉위 초기에 경복궁의 광화문, 홍례문, 근정문도 청기와로 얹고자 했으나 역시 경비 문제로 포기했다.

연산군은 사찰에서 청기와를 얹은 곳이 많다며 적어도 왕의 정전(正殿)은 청기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기와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해마다 일정량을 구워서 창덕궁 인정전과 선정전을 청기와로 이을 것을 명했다. 그러므로 이 당시 선정전청기와를 얹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창덕궁이 임진왜란으로 불탔기 때문에 현재의 선정전 청기와는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건설한 것으로 추정한다.

청기와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임진왜란이 끝난 광해군 초기 2년 동안 구운 청기와는 3(),  3,000장에 불과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광해군은 청기와 생산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낭청과 감역을 설치하고 매일 감독해서 연간 35,000장까지 구어내기도 했지만 그만큼 제작비용의 부담이 크므로 광해군도 결국은 신하들의 건의로 궁궐의 일부에만 청기와를 얹기로 한다.

광해군 이후 조선왕조실록에 청기와 제작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한국의 궁궐에서 홀로 남아 있는 선정전 청기와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선정전 청기와

청기와에 제조 방법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에 청기와를 염초로 만든다는 기록이 있고 예종실록에도 청기와생산에 필요한 연철을 김성현에서 채취하여 보냈다라고 적었으며 연산군일기에는 함경도 단천에서 바친 연 6,900근에서 은을 제련해 낸 연스러그로 청기와를 만들게 했다고 적었다.

청기와의 기본원료인 찰흙의 크기는 0.01밀리미터 이하의 점토질, 재료가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팽창성과 수축성이 적어지면서 균열이 적어진다. 그러므로 청기와 생산에서는 될수록 미세한 찰흙원료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또한 청기와의 원료로 염초를 사용한다는 것은 현대의 질산칼륨을 말한다. 질산칼륨의 용융점 330도로 화합물의 용융점을 낮추는 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흡수성이 적어 녹여지는 화합물이 골고루 융합되게 함으로써 기와의 표면을 고르고 매끄럽게 만든다.

그런데 염초는 화약을 만드는 용도이므로 군사용으로 활용되는데다 상당 부분을 중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므로 염초의 가격과 공급이 들쑥날쑥하여 청기와를 계속적으로 생산하는데는 문제가 많았다. 낭청 한사성과 역관 방의남은 염초를 매우 싸게 사왔다고 해서 직급을 올려 받을 정도였다.

청기와에서 연스러그는 청기와의 색깔을 내는 원료다. 연스러그에는 납과 아연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는데 납은 푸른색이 흰색과 조화된 유연한 금속으로 용융점이 327400도에 불과하지만 알카리와 철산화물 등이 들어있는 고령토와 납가루를 섞어 만든 유약으로 기와표면에 발라 1,0001,150도에서 소성하면 청기와의 푸른색이 나타난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을 맞춰야 하므로 청기와의 대량생산이 어려워, 17세기부터 청기와 사용은 점차 줄어드는데 임진왜란이후 청기와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자조차 사라진다. 광해군이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서울의 궁전들을 복구할 때 청기와를 사용하려 했으나 그 제조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기술자들이 없어 실현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도 청기와 복원 작업은 계속 추진되었는데 결국 청기와가 아니라 노란색 기와 제조로 방향이 선회된다고 윤용이 박사는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