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창덕궁(덤 창경궁) 답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4)

Que sais 2021. 6. 28. 09:38

https://youtu.be/aT-TuD-qyLs

 인정전(仁政殿 : 국보 제225)

인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정전이 보이며 정전 앞 마당을 좌우로 동서 행각(行閣)을 감싸고 있다. 이 마당이 만조백관이라고 할 때의 ()’로, 백관들이 모여서 왕에게 조회를 하던 뜰 곧 조정(朝廷)이다. 당연히 품계석이 두 줄로 늘어서 있다. 인정문 쪽에서 9품이라 쓴 글씨부터 인정문 쪽으로 정1, 1품까지 써 있다. 왕이 참석하는 조회 때 문관과 무관들이 열을 이루며 정렬하던 곳이다. 동쪽이 문관, 서쪽에 무관들이 열을 이루며 마주 본다. 물론 조정에서 조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회과거 시험 등도 이곳에서 치렀다.

 

인정전 조정 품계석

인정전은 태종 5(1405) 창덕궁 창건 때 세운 건물로, 태종 18(1418)에 다시 고쳐 짓기 시작해 그해 8월 세종이 즉위한 뒤에 준공되었고 단종 때 해체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진되어 광해군 원년(1609)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순조 3(1803)에 다시 소실되었고 이듬해에 중건된 후 철종 7(1856) 또 한 번의 해체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이 두벌의 월대 위에 놓여 있는데 경복궁의 월대와는 달리 돌난간과 사방신, 십이지신상이 없으며 중앙의 어도(御道)는 의식을 거행할 때 외에는 왕도 통행하지 않았다. 물론 인정전의 상하 월대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주술적 상징물인 '드므'는 설치되어 있다.

의식을 거행할 때 왕은 어도를 따라 조정 마당을 지나 인정전 월대에 이르러 답도(踏道)를 통해 오르게 되어 있다. 답도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구름 속을 나는 두 마리의 봉황이 양각되어 있다. 봉황 '성군이 나타나거나, 성군이 다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정을 베풀겠다는 왕의 의지를 드러낸 상징물로 볼 수 있다.

일단 왕이 된 후부터 왕은 선정전 정면에 설치되었던 천랑(穿廊)을 통해 걸어와 인정전 동월랑을 통해 월대를 거쳐 인정전의 동쪽 문을 통하여 옥좌에 올라 용상에 앉았다. 왕이 옥좌에 앉으면 앞 기둥에 말아 올려 진 발이 드리워지면서 왕의 얼굴을 가리게 된다. 또한 왕이 있는 곳은 바깥보다 어두워 밖에서는 왕이 보이지 않지만 왕은 밝은 마당을 내다보게 되면서 군왕의 위엄을 높였다.

인정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다른 궁궐과 차이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층과 2층이 트여 넓고 높은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통층구조인데, 이 공간을 지탱해주는 원기둥들이 우뚝하고 장대하다. 개화바람의 영향으로 서양식 커튼과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다. 다른 궁궐의 법전이 전돌로 바닥을 만들었지만 이곳은 서양식 쪽나무로 만들었는데 이는 예전에 없었던 건축기법이다. 이런 양식풍으로 인정전이 단장된 것은 대한제국 마지막인 순종대인데 이를 모두 제거하고 원래 모습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일제강점기를 통해 커튼과 샹들리에 같은 서양식 실내장식과 가구, 그리고 대개 법전의 바닥에 깔려 있게 마련인 전돌 대신 마루가 놓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부자연스럽지만 이 역시 세월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라는 설명도 있다.

인정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팔작지붕의 다포식 구조로 면적은 139.50평이나 되며 화려한 단청이 돋보인다. 공포는 외부3출목7포작, 내부4출목9포작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유사하지만 전체적으로 실내의 공간적 깊이감이 약하며 장식적인 면이 오히려 품격을 어지럽게 만든다. 내부의 네 모퉁이 약간 안쪽에 세운 고주윗층의 귀기둥으로도 부르며 평주(平柱)의 외곽 기둥열 중에서 네 귀퉁이에 위치하는 우주(隅柱)가 되며 이는 윗층의 변주(邊柱)를 퇴보 위에 걸어야 하는 구조적 모험을 피할 수 있는 안전 위주의 구조법이다.

 

인정전 야경(문화재청)

반면에 지붕의 합각 부분은 말기적인 구조로 무늬를 만드는 벽돌을 사용하지 않고 널빤지로 막아 다소 급이 퇴보된 것은 사실이다. 외관상 하층의 창호는 사면에 고창을 두고 전후의 중앙칸에만 문이 네 짝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이다. 나머지는 모두 삼분합문이며 2층에는 교살창만 사면에 설치되었다. 현재 하층문을 여닫는 방법으로 모두 밖으로 여는 형식이지만 이는 일제강점기 때 개수된 것으로 정면 양단부의 협칸은 문 상단부에 정첩과 같은 기능을 가지는 삼배목을 설치하여 아래를 밀어 밖으로 열게 하거나 뗄 수 있었고 나머지 문들은 모두 안쪽으로 열 수 있었다.

처마끝의 기와골엔 암수막새, 사래엔 토수를 끼었고 용마루 좌우 끝에 취두, 용마루 양성에 이화장(李花章)을 장식하고 합각의 내림마루엔 용두, 각각의 추녀마루에는 용두 9개의 잡상을 배열했다.

내부의 북쪽 중앙에는 단을 만들어 어좌(御座)를 놓고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둘렀다. 왕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용이므로 모두 황토색이다.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 그 뒤를 높이 두르고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처럼 시선이 한 단계 높이 관망되는 구조로 인해 내부는 장엄함이 극대화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더불어 천장에는 꽃구름 속에 노니는 목각 봉황 두 마리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왕실의 위엄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인정전의 용마루에 꽃무늬 이화(李花)가 있는 것은 고종이 중국의 제후국인 왕으로가 아니라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국가 상징인 문장을 조선왕조의 성씨인 이씨를 상징하는 이화(李花)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화는 인정문의 용마루에도 있다.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명필이었던 죽석 서영보가 썼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인정전 용마루가 마치 백시멘트를 바른 듯 하얗게 보인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백시멘트가 있었는가에 의아해하며 놀랄지 모르지만 한국에는 고대부터 백시멘트보다 더 견고하고 수명이 긴 삼화토가 있었다. 삼화토는 삼국시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오랜 역사를 지닌 건축 재료. 삼화토로 용마루를 하얗게 바르는 것은 날짐승이나 구렁이가 기와 틈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는 의도였다.

천장에는 두 마리의 봉황이 날고 있다. 이는 '봉황이 출현하는' 성군이 존재하고 있으며 백성이 평안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왕이 용상에 앉아 전내외(殿內外)를 바라다보면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다. 넓은 실내의 공간과 문짝 밖으로 보이는 월대와 어로(御路)와 인정문이 동시에 보인다.

속담에 이왕이면 창덕궁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 500여 년 동안 여러 가지 사건이 창덕궁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선 이곳 인정전에서 연산군(1494)과 현종(1659)이 즉위했다. 그러나 창덕궁에서 일어난 일은 대체로 비극적인 것이 많았다. 태조 이성계가 말년에 골육상쟁으로 인한 여파로 별전에서 쓸쓸히 사망했고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창덕궁에서 쫒겨 나왔고 연산군은 대궐을 유흥장소로 만들다 중종에게 밀려났고 광해군도 인조에게 폐위 당했다.

이뿐이 아니다. 인정전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씻을 수 없는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광무 1(1907), 순종이 즉위하고 1910년 소위 한일합방이 인정전에서 체결되어 순종이 창덕궁 전하(殿下)로 격하되면서 창덕궁은 500여 년의 조선왕조 마침표를 찍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 식민통치 36의 암흑 속에서 굴종의 삶을 겪어야 했다.

인정전 서쪽 행랑에는 향실(香室)과 내삼청(內三廳)이 있다. 향실은 궁중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담당하던 곳이다. 향실이 서쪽 행랑에 있는 것은 인정전 서쪽에 제례 공간인 선원전이 있기 때문이다.

내삼청은 금군삼청(禁軍三廳)이라고도 하며, 왕을 호위하고 궁궐을 수비하던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 삼청을 이른다.

북행랑에는 과거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추정되는 관광청(觀光廳)이 있었다. 이 곳에 관광청이 있는 것은 인정전 마당이 과거 시험을 보는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인정전 마당에서는 주로 문과의 전시(殿試)가 거행되었고, 무과의 전시는 후원에 있는 춘당대에서 시행되었다. 동행랑에는 악기고(樂器庫), 육선루(六仙樓), 서방색(書房色)이 있으나,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어 인정전 마당을 등지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90년대부터 일제 때의 피해를 가능한 한 줄이면서 복원을 진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창덕궁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당시의 건물들을 그대로 남겨 놓은 상태에서 조선시대 본래 창덕궁의 진면모를 살려내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인정전 어좌

건물들은 고증에 의해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하지만 창덕궁이 현대화로 인해 변모한 현 상황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 예로. 그동안 부단히 제기된 문제는 창덕궁 돌담 훼손이다.

사실 창덕궁 돌담은 옛부터 훼손상태가 심각했다. 서측 돌담 대부분이 인접한 민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민가가 돌담을 한쪽 벽으로 쓰면서 건물을 덧댔고 일부는 시멘트칠을 하거나 못질을 한 곳도 있었다.

물론 훼손되지 않은 돌담도 있지만 주민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실 그동안 문화재청 창덕궁 관리사무소는 창덕궁 돌담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하지만 사유재산권 문제로 매입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이런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갖고 있는 문제다. 이런 문제들은 앞으로 슬기롭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되지만 학자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라고 설명하는데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