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창덕궁(덤 창경궁) 답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6)

Que sais 2021. 6. 28. 09:42

https://youtu.be/Mse8XVDoiTM

 희정당(熙政堂 : 보물 제815)

정면 11칸 측면 5칸의 55칸 건물인 희정당은 외전에 속하는 인정전과 선정전의 동편에 놓여 있으며 북쪽으로 대조전이 있다. 창덕궁 안에 있는 침전(沈澱)의 하나로 내전에 속하는 건물이었으나 순조 때부터 왕이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의 편전은 본래 선정전이었으며 희정당은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왕이 대대로 집무를 하는 통에 편전으로 바뀐 것이다. 순조 30 5월에는 후에 익종으로 추존되는 효명세자가 이곳에서 승하했으며, 고종이 경복궁 완공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희정당(문화재청)

경복궁 희정당의 명칭을 살펴보면 궁궐지에 순조가 지은 '희정당명(熙政堂名)'을 소개하면서 군주가 밝고 강하면 정사가 잘 다스려지고 덕이 닦이리니, 정사가 잘 다스려지고 덕이 닦이면 당명(堂名)을 생각하리라고 적고 있다.

또한 대제학 채유후가 지은 상량문에는 대학(大學) 서경(書經)에서 ()의 뜻 밝고, 넓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정사를 밝혀 백성을 접하니 백성이 충정을 다하고, 정사를 넓혀 백성을 구제하니 백성이 혜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다는 의미에서 희정(熙政)이라 이름하였다라고 적혀있다.

현재의 희정당은 연산 2(1496) 숭문당(崇文堂)을 고쳐 희정당(熙政堂)이라 칭하였으며, 화재로 인해 재건을 반복하다가 1917년 대화재 이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지었다. 지붕의 동서 합각벽에 새겨진 길상문 ’()자와 ’()는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뚜렷한 흔적이다. 그렇다고 희정당이 강녕전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강녕전에는 없었던 용마루가 첨가되었고 강녕전 앞에 펼쳐져 있던 월대를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으며, 건물의 구조 또한 변형되었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 속에 그려진 희정당의 옛 모습을 보면 현재의 건물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희정당은 본래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11칸 측면 5칸의 55칸 건물로 규모가 커지고 부분적인 변형이 이루어져 동궐도에 그려진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앞뒤의 중앙에 계단을 둔 5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선 건물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익공 구조. 고주 위에 팔각형 주두를 올리고 그 위에 사각형의 재주두를 두어 대들보를 받치게 한 점이나, 사래 끝에 토수를 끼운 점 따위가 눈에 띈다. 지붕에는 양성마루를 올리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하였다.

내부는 건물 사면의 퇴칸을 통로로 만들어 중궁전인 대조전의 행각과 앞쪽의 여러 전각으로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때문에 실제 사용되는 공간은 정면 9칸에 측면 3칸이며, 그중에서 가운데 3칸이 응접실로 꾸며졌고 서쪽의 3칸은 회의실, 동쪽의 3칸은 창고. 앞면과 뒷면 중앙의 3칸은 아자 분합문을 달고 그 위로는 교창을 설치하였다.

응접실의 천장은 소란반자이지만 회의실은 서양식 반자로 되어 있다. 더불어 1920년대 중건 당시 내부를 서양풍으로 꾸미면서 서양식 가구와 커튼, 전등을 들여왔으며, 마루 위는 붉은 카펫을 깔았다. 건물의 남행각 앞도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변형했는데 오얏무늬와 기둥의 낙양각 장식이 화려하다. 희정당 응접실 벽에는 1920년 가을 순종의 명을 받아 해강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가 동편과 서편에 각각 그려져 있다.

대청 좌우로 방이 있는데 왕의 침소다. 방은 앞퇴와 뒤편 골방과 집의 벽 바깥으로 조그맣게 달아내 칸살인 개흘레로 감싸여 있고 여기에 상궁과 나인이 지키면서 긴급사태를 대비했다. 침소 안에 큰 세간이 없는 것이 특이한데 이는 자객이 스며들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다. 왕의 의대나 침구도 방안에 두는 것이 아니므로 장이나 농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는 왕비전이나 왕이 거동 하는 비빈의 처소도 마찬가지다.

희정당과 선정전 사이에 좁은 골목 같은 공간이 생겼는데 들어서면 좁다가 안으로 가면서 마당이 넓어진다. 선정전의 좌향과 희정당의 좌향이 다른 데서 온 결과로 건축 구도상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중국, 일본은 물론 대다수의 건물을 건축할 때 좌우대칭을 엄정하게 지킬 경우 집의 방향이 일정해서 어그러짐이 없다. 그런데도 왕이 거처하는 창덕궁에서 주요 두 건물이 서로 축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건축의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예로서 의미가 있다.

희정당은 1917 11 10, 순종이 기거하던 대조전 서온돌에 붙은 나인의 갱의실에서 불이 일어나 대조전 등과 함께 불에 탔다. 이 당시에 내전 일대의 주요 건물과 부속 건물들을 합하여 수백 간이 불에 탔다고 한다. 불이 난 4일 뒤에, 이왕직에서는 낙선재를 순종의 처소로 삼고 불타 없어진 내전 건물들을 다시 짓기로 했다. 그러나 재건하면서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그 나머지는 양식을 참고하기로 정했다. 그러면서 경복궁의 내전인 교태전, 강녕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과 그 부속 건물들의 구재(構材)를 창덕궁 전각을 중건하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원래는 1년 안에 공사를 마칠 계획이었으나 중간에 고종이 사망하고 31운동이 일어나는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20 10월에 완공되었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정면에서 가운데 3칸의 주칸은 좌우의 주칸보다 넓고 우물마루를 깔아 전체를 튼 통칸으로 서양식 접객실로 만들었고, 서쪽 3칸도 통칸으로 만들어 회의실로 꾸몄으며,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고, 동서쪽 양 옆칸 뒤쪽에 골방과 목욕탕 등을 설치했다.

학자들은 중건하면서 다소 한식과 양식을 가미하였으나 조선말기와 한말에 걸친 궁궐 편전의 건축형태를 남기고 있어 그 가치가 드높게 평가하여 보물 제815로 지정되었다. 순조 30(1830) 5월에 효명세자(익종)가 희정당에서 사망했으며 고종이 경복궁 완공 전까지 머물기도 했다.

 

 대조전(大造殿 : 보물 제816)

희정당 북쪽의 가파른 계단 위에 있는 선평문(宣平門)으로 들어서면 왕비의 침전이자 공식적인 활동 공간인 대조전(大造殿)이 보인다. 궁궐의 내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 중궁전(中宮殿) 즉 왕비의 정당(正堂)인데 창덕궁에서는 대조전이 여기에 해당된다. ‘대조큰 공() 또는 위대한 창조란 뜻이지만 실제로는 지혜롭고 현명한 왕자의 생산을 의미한다.

대조전 역시 임란 이후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희정당과 함께 1917년 화재로 불탄 뒤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지형이 다른 관계로 이때의 중건으로 대조전의 주위가 답답해지고 전각의 자리매김도 옹색해졌다.

대조전은 조선조 왕가 일족이 실제로 생활을 하던 공간인데다가, 특히 구한말 황실의 내실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중앙의 세 칸은 툇마루로 되어 있는데 그 앞에는 넓은 월대가 있다. 월대는 왕비를 위한 연회 등이 치러진 곳이다. 알려지기는 고종과 민비가 이동백, 송만갑 같은 당대의 명창을 불러다 월대 위에서 노래하게 했다고 한다. 대조전에서 특이한 것은 월대 앞에 앙부일구해시계가 있다는 점이다. 시각이 내전에서 중요함은 물론이다. 

 

월대를 지나 툇마루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그 마루 좌우로 9칸짜리 온돌방이 있다. 그 가운데 동쪽 온돌방이 주로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방이다.

현재는 많이 변했지만 그 방은 내부가 다시 우물 정()로 칸막이가 되어 아홉 개의 작은 방으로 나뉘는데 왕과 왕비는 가장 중앙 방을 쓰고 그 주위의 여덟 개 방에는 궁녀들이 두 명씩 들어가 시중을 들었다.

 

대조전 

대조전의 높은 축대에는 양쪽으로 가마솥 같은 드므가 놓여 있다. 드므는 벽사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경복궁 근정전 월대에도 드므가 있다. 이 건물에서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 효종사망했으며 순조의 세자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했다. 대조전은 인조 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36칸으로 축소되었다.

내외벽을 지나면 동편에 큰 건물이 경훈각이 있고, 북쪽엔 산기슭을 화강석으로 쌓아 정리한 화계가 있다. 화계에 벽돌로 쌓은 굴뚝이 있는데 이는 경훈각 댓돌의 아궁이와 연결되어 있다. 굴뚝은 건물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다 매우 작으므로 그 구조와 연료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명종실록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대조전 앞 앙부일구

명종이 예정보다 일찍 침전에 들자 대전 내시가 급히 서둘다 내화벽돌 덮는 일을 잊어버려 과열되어 침전이 불탄 화재사건이 있었다. 왕의 침전 구들은 중앙에 화로를 넣을 개자리를 파고 그곳으로부터 사방으로 방사선형 고래를 켠다. 청동화로 백탄을 담아 중앙 개자리에 넣으면 그 불기가 고래를 타고 방바닥 전체에 퍼져 따뜻하게 되는데 화로 바로 위에 내화전돌을 얹고 구들장을 덮은 뒤에 장판을 원래대로 깐다. 그런데 대전내시가 내화전돌을 덮지 않는 바람에 과열로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왕은 방바닥에 자리를 펴는 것이 아니라 다리 달린 앉은뱅이 침상에 자리를 깔고 그 위에서 잠을 잔다. 창덕궁처럼 화구가 적어도 좋은 것은 공기의 주입구로 사용되기 때문이고 굴뚝이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도 괜찮은 것은 숯의 배기가스만 배출하면 되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궁궐의 굴뚝과 아궁이가 매우 기능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때 왕궁은 수난을 당하는데 대조전도 예외가 아니다. 1917년 화재가 일어나 희정당과 함께 대조전을 포함한 창덕궁 내전의 대부분이 크게 소실된다. 이 화재는 단순한 실수로 일어난 화재라기보다는 일본인들의 고의적인 방화로 추정되는데 1920년 대조전을 비롯한 창덕궁 내전의 복구, 결국 경복궁의 강녕전, 교태전 등 수많은 내전 건물을 헐어낸데다 예전의 모습보다 축소되는 등 그 모습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대조전일원 화계와 굴뚝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순조 33(1833) 대조전 일대의 화재가 있기 전까지의 모습은 현재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를 통해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의 대조전 일곽을 동궐도에 나타난 모습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대조전은 1920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서 재건하였다. 정면 9칸에 측면 4칸의 운공이 있는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이고, 지붕 위의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건물이지만 동궐도에는 가운데 지붕이 양옆의 지붕보다 높은 솟을지붕으로 묘사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과 차이를 보인다.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대조전의 지붕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으로 되어 있다.

평면 구조는 전면 9칸을 퇴칸으로 하여 마루를 깔았는데 가운데 3칸은 개방하였으며, 그 안쪽 9칸이 대청이고 대청 좌우로 4칸짜리 온돌방이 하나씩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 방을 한 칸짜리 방 다섯 개가 각각 감싸고 있다. 거실로 꾸민 대청에는 서양식 마루가 깔렸으며 중국풍이 물씬 풍기는 가구들이 놓였다. 대청 좌우의 방이 왕과 왕비의 침실인데 왕비의 침실에 놓인 침대가 눈길을 끈다. 거실과 침실 사이에는 8짝의 불발기문을 달았으며, 그 위로 천장까지 이어진 벽면에는 오일도(吳一道), 김은호(金殷鎬) 등이 그린 봉황도(鳳凰圖) 군학도(群鶴圖)가 장식되어 있다.

대조전은 훗날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1809)가 이곳에서 탄생했지만, 대조전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많은 왕이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성종(1494), 인조(1649), 효종(1659), 철종(1863),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926)도 이곳 대조전에서 사망했다. 헌종 연간에 발간된 궁궐지에 의하면 당시 대조전 현판 글씨순조의 어필이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 1910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20년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보물 제816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