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창덕궁(덤 창경궁) 답사

한국의 궁궐 : 창경궁(1)

Que sais 2021. 6. 2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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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서울의 동쪽 응봉 자락에 위치하면서, 인접한 창덕궁(昌德宮)과 함께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현존하는 국내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세종이 1419년에 지었고,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에 거처하던 궁인 수강궁(壽康宮) 터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그 쓰임새가 더욱 커진 이궁(離宮)이다.

성종13(1482) 창덕궁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성종은 수강궁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성종 당시의 세 대비, 곧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부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처소로 삼으려는 뜻이다.

이는 성종 10년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자신이 수강궁으로 이어하겠다고 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제까지 창덕궁의 내정전에는 대왕대비가 머물렀고 왕은 다른 (殿)에 있었는데 왕이 경복궁으로 이어해야 하나 여의치 않았다. 또 창덕궁에 있자니 내정전에 왕이 거처해야 하지만 대왕대비가 거처하고 있으므로 마땅치 않았다. 이에 대왕대비 자신이 수강궁으로 옮길 테니 왕을 상전으로 모시라고 하자 성종은 수강궁 옛터에 대비들을 모시기 위한 새 궁궐을 짓기로 하여 성종 15(1484)에 완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창경궁(昌慶宮)이다.

 

동궐도의 창경궁

이때 지은 전각들은 ()으로 명정전, 문정전, 수령전(壽寧展), 관경전(觀慶展), 경춘전(景春展), 인양전(仁陽展), 통명전이고 ()으로는 양화당,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이었고 이때 이미 창경궁이라는 새 이름이 지어졌다.

물론 그 당시에도 창경궁이 독립적인 궁궐로서 규모를 갖추고는 있지만 왕이 일정 기간을 기거하며 정사를 처리하는 궁궐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지만 창덕궁의 부족한 기능, 즉 창덕궁에서 미처 다 수용할 수 없는 왕비 가족 등 그에 딸인 인원을 수용하는 기능을 보완하는 궁궐로 인식된 것이다.

성종이 창경궁을 건설한 이후 임진왜란(1592)으로 창경궁을 비롯한 모든 궁궐이 불타게 되자 광해군 8(1616) 창경궁을 다시 중건한다. 광해군은 창경궁의 중건을 독촉하여 단 1년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광해군에 의해 창경궁이 모양을 갖추었지만 인조 2(1624)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의 많은 전각들이 불에 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인조정묘호란을 만나 강화도로 피신가는 등 곤욕을 치룬 후 인조 10(1632) 말에 창덕궁으로 돌아왔으나 당시에 창덕궁이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인조 11(1633)창경궁을 수리한다. 이때 새로 짓는 것보다는 인경궁의 전각을 헐어다 짓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에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그런데 인조가 창경궁에 기거하던 인조 14(1636)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인조는 다음해 1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창경궁 양화당을 거처로 삼았다. 이렇게 광해군에서 인조까지 연간 새로 모습을 갖추고 국왕이 거주함으로써 창경궁은 창덕궁을 보완하는 궁궐인 동시에 또 독자적인 하나의 궁궐로 자리 잡았다.

효종 때와 영조 때도 크고 작은 화재와 수리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순조 30(1830) 8월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함인정, 공묵각, 경춘전, 영춘헌, 5행각, 빈양문, 숭문당 등이 소실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곧장 공사가 진척되지 못하고 순조 33에 공사가 시작되어 다음해에 공사가 끝났다. 이때 환경전, 함인정, 경춘전, 양화당, 숭문당, 영춘헌, 연희당, 연경당 등과 정조 14에 소실되었던 통명전, 여휘당 등이 함께 중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내전의 건물들은 이때 건축된 것이다.

 

창경궁 식물원

창경궁은 조선 역사 중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숙종 때 장희빈과 그 일족을 처형한 사건을 비롯하여 영조 때 사도세자의 죽음 등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 또한 순종 3(1909), 1907년 고종에 이어 황제가 된 순종은 즉위와 더불어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다. 그런데 한일합방이 되자 1911,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이름을 고쳐, 그동안 창경궁이라기보다는 창경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내용은 어떻든 1970년대 후반까지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서울 시민의 최대의 낭만의 장소였다. 물론 1983 창경궁은 본 이름을 되찾았고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동물원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갔다.

이름은 되찾았지만 어렸을 때 창경원을 들렸던 사람들은 아직도 창경궁보다는 창경원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창경궁의 창경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창덕궁 전경

<창경궁의 궁제와 배치>

궁궐을 구성하는 여러 공간 영역은 성격 면에서 정확하게 경계지어 나누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창경궁의 경우 크게 기능과 역할에 따라 몇 가지 영역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이 단원은 홍순민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우선 국왕이 국가적인 공식행사를 치르던 법전과 공식적인 정무업무를 보던 편전 등의 외전 영역과 왕과 왕비, 왕실 가족들의 일상 생활과 기타 생활주거공간으로 구성된 내전 영역, 그리고 세자가 머물면서 차기를 준비하며 국정수업을 쌓던 동궁 영역, 궁궐 안에 설치된 관서들로서 궐내각사 영역, 그리고 국정을 구상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원유 영역이 그것이다.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 법전은 명정전이다. 그러나 홍화문에서 명정전에 이르는 창경궁의 외전창덕궁에 비해서 그 규모나 격식 면에서 떨어진다. 홍화문에서 명정전에 이르는 거리가 짧은 것은 물론 금천교인 옥천교를 지나면 바로 법전의 문인 명정문이 나오고 그 문을 들어서면 명정전 조정이 된다.

편전인 문정전이 법전인 명정전과 내전 영역 사이가 아니라 명정전의 남쪽에 바로 붙어 남향을 하고 있는 점도 특이하며 그 기둥이 원기둥이 아니라 사각 기둥으로 되어 있다. 창경궁은 처음 대비들을 위한 대비전으로 만들어져 왕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였던 궁궐이다. 따라서 법궁의 역할을 주로 담당했던 경복궁과 창덕궁 등에 비해 그 규모가 작고 법식에 있어서 품격이 다소 낮게 건설되어 궐내각사가 매우 빈약하다. 물론 선원전은 없었지만 승정원을 비롯한 서연청(書筵廳), 빈청(賓廳), 홍문관, 사옹원, 사복시, 도총부 등의 건물들은 구비되어 왕이 거쳐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들 궐내각사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반면에 상대적으로 생활기거 공간인 내전이 매우 발달되어 있어 창경궁을 보면 당대 왕조의 내부생활을 자세히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창경궁의 특징은 원유 영역후원을 창덕궁과 함께 사용했다는 점이다. 창덕궁에서 설명한 부용지와 그 일대로 현재 부용지는 창덕궁 영역으로 묶여있다.

창경궁이 다른 궁궐과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궁궐의 배치.

다른 궁궐은 모두 좌향이 남향인데 반해서 창경궁은 동향을 하고 있다. 궁궐은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건립하고 남북 일직선상에 남으로부터 정문, 법전, 편전, 침전을 배치하는 것이 원칙인데 창경궁홍화문과 명정전궁의 좌향이 동향이다. 그리고 편전인 문정전남향을 하여 서로 대치되는 좌향으로 지어졌다. 창경궁을 남향으로 만들기 어려웠던 것은 동쪽에 이 흐르고 남서북으로 가깝게 구릉으로 둘러져 있어 배산임수로서의 입지와 조건이 동향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광해군 중건시기에 이것을 다시 남향으로 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선수도감(繕修都監)에서 당초 창경궁을 창건할 때 반드시 안식이 높은 사람들이 동향을 택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굳이 중건하면서 조종의 옛 제도를 경솔히 고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동향으로 고칠 경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의 내청룡의 맥을 끊게 된다며 향을 옮기는 것은 중단되었다. 그러자 거꾸로 문정전이 유탄을 맞는다. 문정전은 창덕궁 기본에 맞지 않게 남향이므로 아예 문정전도 동향으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도 곧바로 폐기된다. 문정전을 동향으로 하면 정전 옆에 나란히 또 다른 정전이 생기게 되는 것이므로 향을 고치지 않았다. 한마디로 창경궁은 정해진 궁궐의 법식보다는 자연 지세를 따라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창경궁이 다른 궁궐과 대비되는 또 다른 차이점은 정전까지의 문이 3문이 아닌 2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3문의 형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경복궁으로 광화문-흥례문-근정문이 근정전으로 이어지는 3문 형식이다. 반면에 창경궁의 경우 홍화문-명정문이 명정전으로 이어져 문의 영역 하나가 생략되었으며 그 도 약간 휘어져 있다. 말하자면 창경궁은 정해진 제도와 법식을 따르기보다는, 주변 지세와 주된 기능과 용도에 따라 독창적으로 배치되고 지어진 것이다.

창경궁에는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보물 384), 홍화문에서 옥천교를 건너 명전전으로 이르는 중문인 명정문(明政門, 보물 385), 창경궁의 법전(法殿)명전전(국보 226),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통명전(通明殿, 보물 818), 천문을 관측하던 관천대(觀天臺, 보물 851), 창경궁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層石塔, 보물 제1119) 등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이들을 함께 아울러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