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창덕궁(덤 창경궁) 답사

한국의 궁궐 : 창경궁(3)

Que sais 2021. 6. 2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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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전(文政殿)

명정전을 돌아보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잠시 난감해한다. 이유는 명정전을 등진 남향한 문정전과 그 옆 경사진 터에 동향한 숭문당의 전각이 작은 공간에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명정전 왼쪽으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물은 문정전이다.

왕의 집무실에 해당하는 문정전(文政殿) 창경궁의 편전으로 정면 4, 측면 3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창경궁의 외전 영역에서 유일하게 남향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명정전과 나란히 동향을 할 경우 한 궁궐에 정전이 둘이 되어 옛 제도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사각기둥을 사용해 정전과 격을 달리하였다. 1484, 성종이 창경궁을 크게 확장할 때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광해군 때 중건되었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문정전 앞으로 복도식 천랑이 이어져 있음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창경원으로 조성되면서 헐리는 수난을 겪기도 했는데 현재의 문정전 1986년 재건한 것이다.

 

 숭문당(崇文堂)

문정전을 돌아나오면 서쪽 경사진 곳에 숭문당(崇文堂)이 있다. 문정전과 함께 명정전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숭문당은 건물이 들어서 있는 자리가 모호하고 주변 건물에 비해 규모도 작지만 고풍스럽고 당당한 느낌의 전각이다. 숭문당은 정면 4, 측면 3칸의 익공계 양식팔작지붕으로 공포초익공으로 간소하다. 건물의 앞에는 툇마루가 개방되어 있으며 퇴칸의 기둥 2층 누각처럼 높은 주춧돌이 받쳐져 있다. 외전지역 안에 있는 건물임에도 격을 낮추어 서까래만 설치하고 부연을 달지 않은 간결한 홑처마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숭문당

숭문당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숭문당이란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볼 때 광해군 때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순조 30(1830)큰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그해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학문을 숭상한다는 편액의 의미대로 영조 때는 이곳에서 친히 성균관의 태학생을 불러 시험을 치르기도 하고 합격자를 만나보고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숭문당(崇文堂) 편액과 일감재자(日監在玆)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내전>

숭문당 밖으로 내전의 전각들이 전개된다.

숭문당의 서북쪽으로 함인정이 있고, 그 좌우로 담이 둘러져있다. 담 뒤편으로 환경전·경춘전 등의 침전이 있고, 그 북쪽으로 내전의 정전통명전이 있다. 환경전에서 통명전으로 이르는 일대는 왕과 왕비가 기거하던 곳으로, 다른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식이 높게 잘 다듬어져 있다.

 

 함인정

명정전 뒤의 행각 끝으로 빈양문(賓陽門)이 보이는데 이 문은 외전과 내전을 이어주고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보이는 전각이 함인정(含忍亭)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성종 15(1484)에 세운 인양전(仁陽殿)이 외전에서 복도로 연결되어 당시 이 일대에는 내전의 전각이 즐비했으며 연산군 때 이곳 인양전에서 연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창경궁의 전각이 대부분 불타버리자 인조 11(1633)에 인경궁에 있던 함인당을 이 자리에 옮겨 세우고 함인정이라 불렀다. 궁궐지에는 함인의 뜻을 해동(海東)의 만 가지가 인의(仁義)에 흠뻑 젖는다라고 기록돼 있다. 영조 때는 이곳에서 문무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등 크고 작은 접견 행사가 이루어졌다.

 

함인정

현재의 건물은 순조 30(1830)의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1834년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겹처마팔작지붕의 이익공 구조. 평면이 좁으므로 지붕의 규모가 작지만 팔작지붕의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제대로 살펴볼 수 있다. 마루와 천장단과 격을 달리하여 위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환경전

함인정 북쪽으로는 내전의 중요 전각인 환경전과 경춘전이 있다. 남향한 환경전이나 동향한 경춘전 모두 동떨어져 궁전 건물로는 다소 어색하게 보이는데 그 까닭은 이 건물들을 이어주던 부속건물이 모두 사라지고 지금처럼 본채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환경전(歡慶殿)은 성종 15(1484) 창경궁을 창건할 때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인조, 순조 때 중건 및 화재가 계속되어 현재의 건물은 순조 33(1833)에 중건한 것이다. 임금의 정침으로 시대에 따라 여러 왕과 세자가 머물렀는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요절했을 때에는 빈전(殯殿)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전형적인 이익공 구조의 팔작지붕집이며 용마루가 있어 통명전과 구분된다. 편액은 순조의 어필이다.

 

 경춘전(景春殿)

창경궁의 건물들 거의 전부가 그렇듯이 거의 공통운명을 갖고 있는데 환경전 서쪽의 동향 건물인 경춘전은 함경전과 거의 같은 경력을 갖고 있다. 순조 34(1834)년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정면 7, 측면 4칸의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에 대청이 있고 좌우의 방과 퇴칸으로 구성돼 있으며 왕실의 전형적인 생활공간이었다.

역대 왕 중 정조(1752)와 헌종(1827)이 이곳에서 탄생하였으며,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1504) 숙종 때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수모를 겪은 계비 인현왕후 민(1701),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1815)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정조와 그의 아들 순조의 경우 이곳 경춘전에 대한 애정과 공경이 매우 각별했다.

궁궐지에 의하면 정조는 '탄생전'이란 현판을 경춘전 남문에 직접 써서 걸었다고 하며, 이곳에서 자신을 낳을 때 겪었을 어머니의 고통과 훗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경춘전기' 341를 써서 바치면서 이를 북문에 걸었다.

또한 정조 '자신을 낳기 전날 밤 꿈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왔다' 하여 이를 기념해 직접 용을 그려 경춘전 동쪽 벽에 붙이기도 했다. 훗날 이에 더욱 감동한 순조 역시 경춘전기를 또다시 써서 바치며 공경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경춘전은 정조와 순조대에 걸쳐 효와 공경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경춘전이란 전각 명칭은 창건당시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이 지었으며 경춘전 현판의 글씨는 환경전과 마찬가지로 순조의 어필이다. 환경전과 경춘전은 원래 온돌 시설이 있는 건물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전시관으로 쓰이면서 내부에 온통 통마루를 깔아놓았다.

 

 통명전(通明殿, 보물 818)

보물 제818통명전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창경궁 침전의 대표적인 중심 건물로 '내전의 법전'으로 인식될 만큼 중요한 의식과 생활의 공간이었다. 창경궁 창건과 더불어 건립되었으며 통명전의 전각명칭 역시 좌찬성 서거정이 지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소실되기도 했는데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1834)에 재건된 것으로 편액은 순조의 어필이다.

 

통명전

선조 8(1575) 정월에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가 이곳 통명전에서 사망했고, 영조가 정순왕후를 맞이할 당시 연회가 베풀어지기도 했다.

건물 규모는 정면 7, 축면 4칸으로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왕비의 침전으로 쓰이던 통명전 역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남쪽 정면에는 월대를 만들었고 청동제 드므를 놓았다. 월대에서는 정월에 왕비에게 하례를 드리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여성들의 생활공간답게 건물 주위 역시 화계와 지당(池塘) 등을 설치하여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특히 통명전 뒤편에 솟아나는 샘물을 돌로 수로를 만들어 그 물을 끌어들여 돌난간을 두른 지당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지당 안에는 석분과 괴석을 심어 놓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지당의 가운데는 작은 돌다리도 놓았다. 이외에도 통명전 바로 뒤편에는 '열천'이 있어 항시 맑은 샘물이 솟아나도록 하였지만, 현재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숙종 27(1701) 창경궁 취선당(지금의 낙선재 부근)에 머물던 장희빈이 그 서쪽에 신당을 꾸며놓고 숙종의 처소인 창덕궁의 대조전과 인현왕후의 처소인 이곳 통명전 아래에 흉물을 묻은 다음 밤마다 무당을 불러들여 재앙을 빌은 것이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왕비가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하자 이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장희빈사약을 받았다. 이를 단순히 궁정 여성들의 암투로 부각시키기도 하지만 사실은 노론과 소론의 권력 투쟁에서 파생된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곳이야말로 조선왕실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의 현장이다. 동궐도에는 건물이 보이지 않고 터만 남은 것으로 보아 순조33년 이전에 불에 탄 것으로 생각한다.

 

 

관천대

 관천대(觀天臺, 보물 851)

창경궁에 특별한 과학시설이 있는데 바로 관천대이다. 숙종 14(1688)에 조성된 것으로, 본래는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현재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높이 2.2m 가로 2.4m 세로 2.3m이며 주위로 돌난간을 돌렸다. 관천대는 보물 제851. 관천대에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는데 사용했다.

현대인으로 볼 때 천문대라면 거대한 망원경을 설치해야하고 우주에서도 천체망원경을 설치하는 것을 감안하면 너무 규모가 작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대에는 대단한 과학기구였다. 그것은 조선왕조실록의 천체관측 기록이 세계적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양화당

양화당(養和堂)은 통명전 동쪽 건물로 창경궁 창건 때 세워져 다른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순조 30년의 대화재를 겪으면서 불탄 것을 그때마다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순조 33(1833)에 중건한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통명전에 버금가는 건물이다. 궁궐지에는 명종 20(1565) 임금이 양화당에 임어하여 친히 독서당 문신들의 시험을 치렀으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 양화당을 거처로 삼았다고 전한다. 또한 이곳에서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가 고종 15(1878)에 승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