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창덕궁(덤 창경궁) 답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7)

Que sais 2021. 6. 28. 09:43

https://youtu.be/2ZvmAtr1U8U

 경훈각

대조전에서 서쪽으로 돌아 나오면 내부의 벽면을 타일로 마감한 이상야릇한 건물과 마주친다. 궁궐의 건물 양식과는 다른 이 건물은 1917년의 대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중건할 때 서양식으로 개조하여 수라간(水刺間), 주방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이곳을 지나 대조전 뒤, 서북쪽으로 돌아나가면 경훈각(景薰閣)이다. 세조 때 건물의 명칭을 바꾸면서 당시에는 아래층을 광세전(曠世殿), 위층을 징광루(澄光樓)로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이곳은 인조반정으로 소실되어 인조 25(1647)에 중건하였고, 순조 33(1833)에 화재로 사라진 것을 이듬해에 중건하였다. 경훈각은 선조명나라에서 받은 곤룡포와 비슷한 관복인 망의(妄衣)를 보관하던 곳이며, 이 건물에 대한 숙종의 어제시(御製詩)도 전해지고 있다.

순조 때의 화재 이전에 제작된 동궐도에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로 위층이 징광루, 아래층은 경훈각으로 표기돼 있으며 지붕은 청색 기와로 그려져 있다. 경훈각이 지금과 같이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건물로 바뀐 것은 1917년의 대화재로 소실된 내전 전각들을 복구할 때 경복궁의 자경전 북쪽에 있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 중건하였다. 건물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초익공계의 물익공 양식이며, 정면 오른쪽 두번째 칸에서 네 칸의 복도각이 이어져 대조전 서쪽 뒤로 연결되어 있다.

 

경훈각

온돌을 사용하던 이곳에는 동서에 각각 두 개씩의 아궁이가 보인다. 서쪽 아궁이 위의 모퉁이에는 작은 문이 하나 있다. 이 문 안에는 바퀴 달린 네모난 작은 수레가 있다. 이 수레는 문 위의 마루에서 볼 일을 보고난 변기를 담아 내의원으로 가져가곤 하던 것으로, 이는 왕의 건강을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화장실인 셈이다.

경훈각 뒤편은 대조전 일곽의 뒤뜰이다. 경훈각 굴뚝은 경복궁 교태전과 마찬가지로 대조전 뒤뜰을 장식하는 조형물로서의 아름다움과 기능적인 효용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굴뚝과 아울러 4단으로 구성된 화계, 화계를 둘러싼 꽃담, 꽃담의 동북편 모퉁이에 꽃벽돌(花磚)로 쌓아 만든 추양문(推讓門)과 가정당(嘉靖堂)으로 통하는 천장문(天章門) 등은 서로 어울리는데 추양문을 나서면 창덕궁의 후원에 이른다.

 

 낙선재(樂善齎, 보물 제1764)

낙선재는 원래 국상(國喪)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소복을 입고 은거하던 곳이자 헌종이 사랑하던 후궁 김씨의 처소이기도 했다. 승정원일기낙선재 상량문을 통해 헌종 13(1847)에 건립되었음이 확인되어 1830년대에 작성된 동궐도에 이 건물이 누락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후 고종 13(1876) 경복궁의 화재로 내전이 전소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중희당에서 정사를 보게 되었고 이때 낙선재를 편전으로 이용하였다. 고종은 1884갑신정변 직후부터 1894년 경복궁으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주로 이곳에서 집무를 보면서 일본 공사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낙선재(문화재청)

주택을 연상하는 연속된 3채 건물과 후원이 딸려 있으며 상중의 왕후소박한 건물에서 근신하는 법도에 따라 단청도 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의 주택 사랑채를 닮은 정면 6, 측면 2칸에 팔작지붕초익공 양식 자형의 조촐한 집으로 서쪽 옆 칸에 누마루를 한 칸 돌출시켰다. 누마루 뒤로 방 1칸이 있고 가운데 2칸이 대청, 동쪽으로 2칸이 방이다. 서쪽 방에서 작은 마루방인 내루를 연결하는 문이 둥근 만월문으로 흔치 않은 구조다.

대청에 앉아 행각 쪽을 바라보면 살대무늬가 아름다운 분합문이 보이고, 건물 전체에 채택된 여러 종류의 창살무늬가 그 형태와 구성, 음양의 효과까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누마루 밑의 작은 화방벽무늬 역시 현대적 감각으로 장식되어 눈길을 끈다. 장락문 편액흥선대원군의 글씨. 모두 17칸 반의 소규모이지만 다양한 건축물이 있고 보존 상태가 좋아 왕조의 궁궐로서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낙선재

이곳은 서쪽에서부터 낙선재와 석복헌(錫福軒), 그 옆으로 수강재(壽康齋)가 배치되어 있고, 건물들의 전면과 측면에 행각이 둘러져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석복헌과 수강재의 행각 밖으로 중행각과 외행각이 늘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남쪽 전면이 휑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일곽은 여성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된 까닭에 건물뿐 아니라 후원의 조경에도 섬세한 솜씨가 담겨 있다. , 검박하고 격조 있는 건물들과 함께 높은 지형을 이용하여 가꾼 화계와 담장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취운정(翠雲亭)과 상량정(上凉亭), 별당으로 쓰였던 한정당(閒靜堂)이 후원에 배치되어 아취 어린 공간을 이루고 있다. 1997년 낙선재에 지어 놓았던 왜식 건물을 없애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낙선재의 정문장락문(長樂門)으로 장락이란 '오래도록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장락문 앞에 서서 낙선재 영역을 들여다보면 한 폭의 그림이 액자에 담겨 있는 듯하다. 한편 장락은 신선이 살던 월궁(月宮)을 뜻하기도 하니 이는 곧 선계에 들어섬을 의미한다. 장락문 현판은 '대원군장(大院君章)'의 낙관이 찍혀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 대원군이 썼음을 알 수 있다.

낙선재 뒤편은 아기자기하게 꾸민 화계를 가지고 있고 괴석을 비롯하여 석분(石盆), 연지(蓮池) 등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1917대조전 일곽의 대화재로 인해 순종이 잠시 낙선재에 머물기도 했으며, 1926년 대조전에서 순종이 승하하자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비(尹妃)가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낙선재 마당을 두른 동쪽 담장에 난 문을 들어서면 석복헌이다. 낙선재를 사랑채라고 한다면 석복헌은 안채인 셈이다. 석복헌은 정면 6칸 측면 2칸 집이지만 양쪽 끝에서 동서 행각과 연결되는  집인 관계로 정면에서는 4칸만 보인다. 홑처마로 구조도 간결하고 질박하며, 정면 4칸 앞에는 툇마루가 있고 남향한 안방, 안방 서쪽에는 부엌, 안방 동쪽이 대청이다. 이곳 역시 조촐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행랑채로 이어지는 쪽마루와 난간을 두른 모습들이 사랑스러운데 주로 낙선재의 부속 건물용으로 사용되었다.

 

낙선재후원상량정일원

석복헌 동쪽의 샛담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는 곳이 수강재. 정면 6칸 측면 2칸 집으로 역시 간결한 모습이다. 이 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석복헌과 수강재를 잇는 집과 문 사이에 생긴 좁은 공간으로, 이곳에는 포도무늬로 장식된 작은 꽃담이 있다. 아마도 다산의 의미로 장식했을 이 무늬는 작은 공간을 풍요롭고 격조 있게 꾸며주고 있으며, 여인네들의 소망을 함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수강재 뒤 후원에는 취운정과 한정당, 상량정이 있으며 서쪽에는 승화루가 앉아 있다. 이곳 후원에서 돋보이는 곳은 한정당 앞뜰로 괴석의 배치와 받침돌의 장식 문양이 볼 만하며, 상량정 서쪽의 만월문과 문 바깥쪽 좌우 담벽의 길상무늬꽃담도 고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낙선재 일곽은 궁궐에 조영된 주거 건축의 구조와 형식을 잘 보여주며 다양한 건축물의 보존 상태 또한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세부는 곱고 아리땁게 다듬어져 있되 결코 지나침이 없어 기품이 있으니 가까이서 보기에 좋다. 멀리서 보기에는 더욱 좋아서 맞배지붕, 팔작지붕, 사모지붕 등 갖가지 지붕이 높고 낮고, 크고 작게 어우러져 우리 건축의 참맛이 바로 이런 것이려니 하는 감동을 선사한다.

낙선재는 한말 비운의 장소로도 유명하다. 1907년 황제에 오른 순종이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 머물렀으며, 순종의 계후(繼后)인 윤황후가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순정효황후 윤비는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는데 그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중전다운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일제강점기옥새를 감춰 두고 내놓지 않은 일이며, 한국전쟁 때 낙선재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에게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라며 호통쳐서 내쫓았다고 한다.

특히 공산치하에서 어느 누구 하나 황후라고 돌보아주는 이 없는 혹독한 피난살이에서도 황후로서의 자존심을 저 버리지 않고 끝내 낙선재를 되찾아 흩어진 왕족들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았다.

그녀는 왕조의 운명과 함께 침잠하는 자신의 운명을 불교에 의탁하여 성북동 흥천사 가까운 곳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매일 찾아가 왕가의 며느리로서 왕조를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를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이승만 정부와의 끈질긴 싸움 끝에, 창덕궁 낙선재를 도로 찾아 일본에 있던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를 불러들이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1966년 낙선재 석복헌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1963영왕 이은(英王 李垠), 영왕비 이방자 여사, 고종과 엄비의 소생인 덕혜옹주가 함께 귀국하여 이곳 낙선재에서 말년을 보냈다.

영왕 이은 1897년 생으로 고종의 3남이며 순종의 동생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서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후, 1920년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제로 일본 황족의 딸인 이방자 여사정략 결혼한다.

영왕의 귀국은 광복이 되었어도 여러 가지 문제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3 12, 가능하게 되었으나 이미 말을 못하고 게다가 기억상실의 상태였다. 그 후 7년간 병원치료를 거쳐 1970년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고 홍유릉에 안장되었다.

영왕비인 이방자 여사는 일본 동경 출생으로 황족의 장녀로 태어나 1918년 학습원을 졸업하고, 1920년 당시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과 결혼하였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조선과 일본의 융합이란 차원에서 계획된 경략결혼인데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에 지정된 신헌법에 의하여 왕족신분을 상실한 두 사람은 무국적 상태로 있었지만 1963년 비로소 한국적(韓國籍)을 취득하여 귀국할 수 있었다. 이방자 여사 1970년 남편 영왕과 사별한 후 한국에 남아 신체장애자를 위한 명휘원(明暉園)>과 정신지체아를 위한 <자혜학교(慈惠學敎)>를 세워 사회복지활동을 하였다.

두 사람의 두 번째 아들인 이구는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단독으로 도미(渡美)하여 MIT공대를 졸업하였다. 직장 동료였던 줄리엣과 결혼하였는데 조선의 왕자가 외국인과 결혼하여 왕실의 품위를 그르쳤다는 질타 속에 파탄을 맞았다. 이방자여사가 사망한 후 한국을 떠났으나 1996년 영구 귀국하였지만 2005년 일본에서 사망했다.

덕혜옹주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이다. 고종이 나이 환갑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외동딸로 왕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지냈다. 그러나 1925 12세에 일본으로 끌려갔고 17세가 되던 1929년 어머니마져 사망하자 충격으로 정신병을 얻었다고 알려진다. 20세에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했는데 결혼생활 3년 만에 실어증까지 겹쳤다. 폐인이 된 몸으로 1962년에 환국하였지만 낙선재에서 1989년 운명하기까지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알려진다. 1989년에는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에서 차례로 타계하면서 낙선재는 주인 잃은 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