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창덕궁(덤 창경궁) 답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8)

Que sais 2021. 6. 28. 09:44

https://youtu.be/Rn-tVonB3PY

 궐내각사

대부분의 관청은 궁궐 바깥에 있는 것이 기본이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부른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궁궐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궐내각사 규장각

궐내각사담장과 담장이 이어지고 담장 너머로 여러 건물의 처마와 지붕선이 겹쳐지는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구중궁궐 속 미로와 같은 신비한 공간이다. 현재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궐내각사는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 않지만 2015년부터 전문해설사의 해설을 통해 '궐내각사 특별관람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단 미로와 같은 복잡한 궐내각사 공간에서의 관람안전해설 규모을 고려해 회당 20명으로 인원을 제한한다.

 

 어차고(빈청)

어차고(御車庫)는 숙장문 동쪽으로 작은 동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구한말 순종이 타던 신식 자동차를 보관하는 차고였다. 현재 어차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빈청(카페)

원래 이 건물은 비변사의 부속기관인 빈청(賓廳)으로, 건물의 이름은 비궁당(匪躬堂)이었는데 대신들과 비변사의 당상관 등 고위관리들이 왕을 만나기 전에 대기하던 곳으로 큰 틀에서 고위관료들의 회의 공간이라 볼 수 있다.

비궁당 뒤에 측간(厠間)이라 하여 화장실이 있었으며 동쪽과 남쪽에는 동산이 둘러싸고 서쪽과 북쪽에는 담장을 둘렀다. 그러나 한일병합 이후 어차고로 개조되었다가 현재는 카페로 변했다.

2010 <문화재청> 국정감사 현장의 뜨거운 감자는 '창덕궁 빈청 카페' 논란이었다.

본래 조선시대 고위관료들의 회의공간인 빈청을 일제가 차고로 전락시켰는데, <문화재청>이 이를 원형 복원하는 대신 카페로 개조한 것이 문제였다. 이후<문화재청>에서 카페를 철거한 후 원형대로 복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화두가 될 요인이다.

 

 측간(厠間)

프랑스의 루브르나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궁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사전에 볼일을 미리 보도록 되어 있었다. 방법은 유치하지만 아주 간단하다. 정원에 수많이 늘어서 있는 조각들은 소변을 보는 데 적합한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대체로 17세기까지 궁궐에 독립 건물이나 혹은 건물의 일부 시설물로 화장실을 설치하지 않았다. 당시 일반 가정에도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집집마다 병에 오물을 모아 아침이 되면 창에서 도로에 쏟았다. 이를 막기 위한 휴대품이 파라솔이고 길바닥의 똥들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해 개발된 신발이 하이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보다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는 우리나라 궁궐에도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곳에 화장실이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고위 신분들은 뒷간에 가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용변을 처리했을까. 홍순민 박사는 이들은 소위 이동식 변기를 사용했다고 적었다.

궁중에서는  매우라고 했고 한자로는 매화’(梅花)라고 썼으며, 왕이 쓰는 이동식 변기를 매우틀이라고 했다. 매우틀은 세 쪽은 막히고 한 쪽은 터져 있는 '자 모양의 나무로 된 의자식 좌변기. 이 매우틀은 요즈음 유아들이 사용하는 이동식 변기와 비슷하여 나무로 만든 틀에 빨간 우단을 덮었으며 아래에는 구리로 된 그릇이 놓였다. 보통 그릇에 매추(梅芻: 여물을 잘게 썬 것)를 뿌려오면 그 위에 용변을 보았고 다시 매추를 뿌려 그 위를 덮었다고 한다.

매우틀을 담당하는 복이내인(僕伊內人)이 미리 매우틀 속에 매추(梅篘)라는 여물을 잘게 썬 것을 뿌려서 가져오면 그 위에 용변을 본다. 왕이 용변을 다 보면 내인이 그 위에 다시 매추를 뿌리고 덮어서 가져간다. 필요한 경우에는 내의원(內醫院)으로 가져가 검사도 하여 왕의 건강을 살피기도 했다. 왕이나 왕비 등은 이동식 화장실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나머지 신하들이나 궁에 소속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을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들 모두 이동식 화장실을 들고 다니지는 않았다.

북궐도형, 동궐도형에 의하면 경복궁에는 뒷간 28군데 있었고 그 규모를 모두 합치면 51.5간이 된다. 뒷간은 대개 1간 크기였으나 큰 것은 7간에 달한다. 물론 이들 뒷간들은 왕과 왕비가 기거하는 내전이나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는 외전, 왕실 가족이 기거하는 주거공간 등 궁궐의 중심부에는 설치하지 않았다. 이들은 매우틀이나 요강이동식 변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뒷간은 주로 외곽에 설치했다. 다시 말하자면 관료, 군인, 궁녀, 내시, 노비 등 궁궐에서 기거하거나 오래 머물면서 업무를 보는 사람들의 활동 공간에 설치되었고 이를 해우소(解憂所)라고도 불렀다. 창덕궁에는 대조전 뒤쪽에 있는 경훈각(景薰閣)에서 뒷간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천연기념물

서울에는 모두 12곳에 식물 천연기념물이 있으며 궁궐 안에는 모두 4에 식물 천연기념물이 있는데 그 4개는 모두 창덕궁 안에 있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편 행각 건물에서 금호문 앞까지 행각 앞 세 그루와 금호문 앞 한 그루, 그리고 금천 서쪽 둑의 한 그루와 금천 너머 동남쪽의 세 그루까지 합쳐 모두 여덟 그루의 회화나무 '천연기념물 제472'로 지정되어 있다.

금호문 앞에 몸통만 남은 고목이 철제 받침대에 의지해 있는 한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는데 천연기념물 회화나무군 중에 하나다. 2014년 장마 때 폭우와 강풍에 뿌리가 들린 채 쓰러진 것을 다시 일으켜세워 치료와 보호를 받고 있는데 놀랍게도 여린 가지와 새잎이 돋아나고 있다.

 

돈화문 회화나무(천연기념물)

회화나무를 궁궐 초입에 심는 데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외조(外朝)의 공간이므로 중국에서 궁궐 건축의 기준이 되는 주례(周禮)에 따른 것이다. 주례(周禮)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인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심고 그 아래서 삼공(三公)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글이 나온다. 물론 궁궐 외에 학식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흔히 심었으므로 학자나무(학자수) 또는 선비나무라고도 했다. 학자들은 동궐도에도 거목으로 표시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심은 것으로 추정한다.

창덕궁에는 회화나무 말고도 천연기념물 나무 셋이 더 있다.

한국의 궁궐의 여러 나무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가 있는데 창덕궁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94' 향나무. 2000년부터 2004년까지 4년에 걸쳐 새로 복원한 궐내각사의 규장각뒤 봉모당 뜰 앞에 서 있다.  750의 세월을 살아온 것으로 짐작한다.

2010년 태풍의 피해로 인해 손상은 되었지만, 뿌리부분 둘레 5.9m. 가지는 동서남북으로 1개씩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잘라졌고, 북쪽 가지는 죽었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한 기형으로 자랐다.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도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 많이 심는다.

조선의 왕비들이 아끼고 가꾸던 궁궐의 수많은 뽕나무 중에 창덕궁 후원의 가장 큰 나무 한 그루도 '천연기념물 제 471'. 관람지 입구에 있는데 예부터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일은 농업과 함께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창덕궁 곳곳에 뽕나무를 심고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를 거행했다는 증거로 동궐도에도 뽕나무가 보인다.

후원에는 우리나라 다래나무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굵다는 명성과 함께 당당히 '천연기념물 제251'로 지정되어 있는 다래나무도 자란다. 대보단 터 옆 작은 개울가에 있는데 나이는 600살쯤으로 추정한다. 창덕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다고 생각하여 계산한 나이다.

 

참고문헌 :

문제된 창덕궁 빈청 '카페', 이제와 복원 어렵다?, 금준경, 오마이뉴스, 2014.06.17.

왕현철의 궁궐이야기(48)창덕궁의 편전, 선정전(宣政殿), 왕현철, 이슈게이트, 2019.12.14.

창덕궁, 위키백과

낙선재 마지막 황실 가족 이야기, 궁궐소개, 창덕궁 자료실

궐내각사, 세계유산 창덕궁,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https://blog.naver.com/wooweoll/221570933647

https://blog.naver.com/charles0516/221831228685

창덕궁, 장순용, 대원사, 1999

우리 옛 도자기, 윤용이, 대원사, 2000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서울,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2002

우리 궁궐 이야기, 홍순민, 청년사, 2002

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세계유산, 국립제주박물관, 2005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1), (2), 북카라반,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