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 (1) : 들어가기(1)

Que sais 2021. 6. 28. 09:52

https://youtu.be/KT0gHNb9SE4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2009 6월 동구릉·광릉·태릉 등 조선시대 왕릉(王陵) 40가 일괄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한국의 조선왕릉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 왕릉은 무려 42기나 된다. 태조 이래 왕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은 사람은 27에 불과하지만 42릉이나 되는 것은 왕후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한 후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무덤도 왕릉이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근본적인 요인은 왕릉이 단순한 왕의 주검이 묻혀 있는 무덤이 아니라 조선시대(13921910) 519년의 역사를 포함해 당대의 건축 양식과 미의식,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조선 왕릉 40 전체를 실사한 후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어야 할 가치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유교사상과 토착신앙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반영된 장묘(葬墓) 문화 공간이다.

 자연경관을 적절하게 융합한 공간 배치와 빼어난 석물(石物) 조형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제례 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왕릉 조성이나 관리, 의례 방법 등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의궤(儀軌), 능지(陵誌) 등 고문서가 풍부하다.

 조선 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조선 왕릉을 실사한 유네스코 심사위원은 한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도 놀랍지만 재위한 모든 왕의 무덤이 남아있는 경우는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고 경탄했다. 일본의 경우 3세기 이래 7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능침이 조성되기는 했지만 이후 왕릉은 눈에 띄게 규모가 작아지고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왕릉 대신 석탑이 조성됐다. 베트남 경우엔 중국 왕릉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조선 왕릉에 비하면 독자성이 떨어지며 중국·청 시대의 황릉(皇陵)은 자연미를 엿볼 수 없는데다 더 이상 제례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 살아 숨 쉬게 만든 유산은 조선 왕릉뿐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서울시의 팽창에 따른 개발 압력을 견디고 녹지가 잘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세계유산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는데 수도권 일대 조선 왕릉의 녹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무려 19,353,067제곱미터에 이른다.

 

<체계적인 왕릉 조성>

519년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는 에 관련된 조선 왕조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에 이른다. 그중 27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능에 한하여 왕릉이라고 한다. 119기 중 능이 42, 원이 13기 그리고 묘가 64기로 분류된다. 능원은 왕족의 무덤을 말하는 것으로 로 묻히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한다.

왕릉은 기본적으로 왕으로 등극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왕이 즉위하는 해에 재궁(梓宮, 시신을 넣을 관)을 만들고, 1년에 한 번씩 옻칠을 한다. 그 뒤 왕이 죽으면 붉은 비단을 사방에 붙이고, 네 모퉁이에 녹색 비단을 붙인다. 재궁 바닥에는 쌀을 태운 재를 깔고, 그 위에 칠성판(북두칠성의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나무판)을 놓는다. 그 위에 붉은 비단 요를 깔고 시신을 모신다. 그 뒤 재궁을 찬궁(欑宮)에 모시게 되는데, 안에는 사방신이 각 방위에 따라 위치하고 있다. 머리가 남쪽으로 가도록 모신 후 도끼 모양이 그려진 붉은 비단으로 덮는다. 이후 병풍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린다.

이어서 왕이 묻힐 곳인 택지(擇地)를 정하는데 대부분은 지관이나 대신들이 정하지만, 왕이 직접 정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적으로 모든 왕릉이 풍수지리설을 기본으로 한다. 동쪽에 청룡(靑龍), 서쪽에 백호(白虎)라 부르는 산줄기가 서로 감싸고 안산(案山)이 능의 전방으로 우회하며 안수(案水)는 능 좌우 측에서 발원해서 연못과 도랑물이 능 앞의 명당(明堂)을 지나 안산으로 흘러 냇물에 임하는 형세를 최고로 본다.

중국 후한 때 중장통(仲長統, 179219)이 지은 낙지론(樂志論)에 의하면 명당이란 산을 등지고 냇물에 임하여 도랑과 연못이 이어있고 대나무가 둘러졌으며 앞에는 마당과 채소밭 뒤에는 과수원이 있다고 적었다. 선조들은 이러한 지형을 신라 말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시대에 길상지(吉祥地)라 했다. 참고적으로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훙서(薨逝) 또는 승하(昇遐)라고 하며 군자나 대부는 (, 수명을 다해서 늙어 죽는 것) 또는 (), 소인은 ()라 한다.

 

국상이 벌어지면 이조판서는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하여 임시기구인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고 다음과 같이 국장을 분담했다.

빈전도감은 겉과 안이 흰 비단옷을 9겹으로 입히는 (), (), 성빈(成殯), 빈전(殯殿)을 설치하며(세자나 왕세자빈은 빈궁(殯宮), 그 외 일반인은 빈소(殯所)라 한다), 재궁 설치, 상복을 입는 성복(成服), 장례가 끝난 후에 3년간 신위(神位, 지방)를 안치하는 혼전(魂殿)에 소용되는 물건을 준비하는 일 등을 맡는다. 소렴과 대렴으로 구분하여 소렴은 겹옷과 겹이불로 19을 입히고 대렴 때에는 겹옷과 겹이불 90을 입힌다.

장도감은 재궁, 견여(肩輿, 가마), 반우거(返虞車, 수레), 보여(寶輿, 금으로 만든 도장을 싣는 가마), 명기(明器, 생전에 쓰던 물건을 상징하지만 규모가 매우 작으며 왕후 릉에는 넣지 않음), 책보(冊寶, 옥책(玉冊), 금보(金寶), 금인(金印)을 말함), 복완(服玩), 청석으로 만드는 지석(誌石), 제기(祭器) 등을 만드는 일을 맡는다. 옥책이란 왕이나 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드리는 글로 재질은 이다.

또한 승하한 왕이나 왕비에게 시호(諡號), 능호(陵號), 묘호(廟號, 왕후에게는 없다), 존중해서 부르는 존호(尊號)를 내려준다. 일반적으로 는 왕조를 처음 열거나 그에 준하는 공로가 있을 경우에만 붙였으며 은 그 뒤를 이은 왕에게 붙였다. 철종순종을 순조로 바꾸어 정하면서 묘호를 높이는 풍조가 생겼고 대한제국이 되자 묘호를 대대적으로 격상했으므로 현재 알고 있는 왕의 명칭은 후대에 고친 것이다. 조선조의 왕 중 묘호가 ()인 경우는 추존된 사도세자 장조(莊祖)와 문조(文祖)를 제외하고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이다. 참고적으로 2품 이상의 재상이 죽어도 시호를 내려주었다.

능호는 왕이나 왕후 또는 추존된 왕이나 왕후에게 내려주는데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웠으므로 건원(健元)이란 두 글자를 사용하고 그 외는 모두 외자다. 왕세자나 왕세자빈 그리고 후궁 소생으로서 왕위에 올랐을 때 그 생모에게 원호(園號)를 내려주는 경우가 있고 그 외에 대군(大君)이나 군()은 모두 ()라 한다. 묘호(廟號)는 왕이 승하한 뒤에 이름을 피하여 종묘에 봉안하는 호칭으로 태조, 세조, 태종, 세종 등이다.

산릉도감은 금정(金井, 광중(壙中)을 파는 일), 현궁(玄宮), 석인(石人), 석수(石獸), 비각, 정자각, 재방(齋房, 제관이 목욕재계하는 처소로 지은 재실(齋室)과 제기고(祭器庫)), 제수제복 등 제사일체를 관장하는 전사청(典祀廳),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香大廳) 그리고 수릉군(守陵軍) 70명이 능을 지키기 위해 지은 수복방(守僕房, 제기를 보관하거나 능을 지키는 관리가 있던 방), 부엌인 수라깐(水刺間) 등을 준비한다. 장례기간은 죽은 지 5개월 만에 장례를 지내는데 이는 중국으로 볼 때 제후국이기 때문이다(중국 황제는 7개월).

 

능 자리는 왕궁에서 100리 거리 안에 정한다. 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기는 서울 경기 일대에 모여 있는 이유다.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0리 이내로 조성한 것은 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능의 관리를 위해 기본적으로  1, 참봉 1을 두었으며, 참봉은 종친부(宗親府)에서 대군이나 왕자군의 봉사손(奉祀孫 : 제사를 받들 수 있는 후손)을 자유로이 임용하도록 하였다.

조선왕릉의 초기에는 분묘를 석실과 석곽으로 만들고 상부에 봉분을 만들었다. 국조오례의에는 두 명을 안장하는 합장릉 형식의 석실 구조가 기록되어 있다. 석실을 조립하고, 안에 재궁을 넣은 다음, 석실을 삼물(석회와 세사 황토를 석은 것)과 숯으로 감싸서 땅에 묻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했다. 15세기 전반까지 대부분의 왕릉 내부에는 석실로 조성되었는데 이와 같은 왕릉 조성에 엄청난 인원과 예산이 필요하므로 세조왕릉을 간소화하라고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을 쓰지 말라.”

 

석실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돌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뜻이므로 대안으로 회격(灰隔, 관을 봉분 속 광중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회로 메워서 다지는 일) 채택했다. 세조의 유언으로 광릉이 조선왕릉 중 최초로 회격을 이용한 방식으로 조성되었는데, 회격을 이용한 방식은 석실을 만드는 대신 재궁 위에 덮을 외재궁을 따로 만들고 그 위에 삼물을 채우고, 남쪽으로 퇴광을 만들어 그 밑으로 재궁을 넣는 방식이다.

회격으로 만들면 무덤 자체가 견고한 것은 물론 공사기간 및 인원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왕릉을 만드는 것이 워낙 큰 역사이므로 각종 부작용이 일어나자 세조가 이를 우려하여 간소화를 명령한 것인데 회격으로 만든 왕릉은 예상보다도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문정왕후 태릉을 도굴하려고 100명이나 동원했음에도 워낙 견고하여 도굴을 포기하고 철수했을 정도다.

조선 왕릉은 기본적으로 봉분의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왕비나 왕비의 봉분을 별도로 조성한 단독의 형태를 단릉이라고 하는데 조선 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건원릉(태조)과 정릉(중종)뿐이다. 쌍릉은 한 언덕에 나란하게 왕과 왕비의 봉분을 마련한 형태로 태종의 헌릉이 가장 돋보인다. 삼연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마련한 형태를 말하는데 경릉(헌종효현왕후효정왕후) 유일하다. 동원이강형(同原異岡形)은 하나의 정자각 뒤로 한 언덕의 다른 줄기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을 배치한 형태로 세조의 광릉이 효시를 이룬다. 동원상하봉은 왕과 왕비의 능이 같은 언덕의 위아래에 걸쳐 각각 조성된 형태를 말한다. 합장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형태로 조선 왕실의 기본 능제다. 그리고 순종의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으로 유일한 동봉삼실의 삼합장릉이다.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회격(灰隔)

#동원이강형(同原異岡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