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 (4) : 제1구역 동구릉(1)

Que sais 2021. 6. 28. 09:56

https://youtu.be/BMPyMc2DS8M

<동구릉(東九陵)>

1구역은 대체로 서울시 동북쪽에 있는 동구릉, 홍유릉, 사릉, 광릉을 포함하여 13개의 능이 있다. 이중 동구릉에는 9개의 능이 있어 조선왕조 42개의 릉의 거의 20퍼센트가 포함될 정도로 비중이 남다른 곳이다. 동구릉은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儉岩山)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데 9개의 능에 17위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조선 왕조의 가장 큰 가족묘로 총 면적 579,557평이나 된다.

1408,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자 태종의 명으로 능지가 정해진 곳이지만 이후 16명이나 되는 유택이 추가되었으므로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조성되었다 볼 수 있다. 동구릉의 자리에 대해서는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를 시켜 자신과 후손이 함께 묻힐 장소를 택정한 결과라는 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설명은 무학대사의 신통함을 접합시킨 것으로 추정한다. 사료를 보면 9기의 능들이 각각 여러 곳으로 길지를 물색하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동구릉이라는 이름 또한 문조(文祖)의 수릉이 아홉 번째로 들어앉은 이후이므로 이전에는 동오릉, 동칠릉으로 불렀다.

 

조선왕조 500년의 부침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인데다 교통이 편리하여 가족 단위의 소풍객은 물론 수학여행지로서 더 할 나위없는 적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동구릉 정문을 들어가면 곧바로 다른 왕릉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문에서 몇 걸음 걷지 않아도 홍살문이 보이기 때문이다. 홍살문(紅箭門)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건축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 때는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여기에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인데 동구릉에는 입구의 것 외에 아홉 개의 왕릉마다 약간 작은 규모의 홍살문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동구릉에는 아홉 개의 왕릉이 있지만 어떤 왕릉부터 답사해야 하는지는 별로 어렵지 않다. 홍살문을 지나 좌우로 두 길이 있는데 우측 길은 재실을 거쳐 수릉, 현릉, 건원릉, 목릉을 거쳐 휘릉, 원릉, 경릉, 혜릉, 숭릉을 거쳐 출구로 나오며 좌측 길은 이와 반대 코스다. 이곳에서는 우측 길을 차례로 답사하는 코스를 따르는데 아래의 왕릉의 설명답사로와는 달리 동구릉에 매장된 분의 연대순으로 한다. 9개의 왕릉이 답사로 순서로 조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원릉 :

조선왕릉에서 가장 중요한 왕릉은 태조 이성계(13351408)의 건원릉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지 않았다면 조선왕조가 태어나지 않았고 조선왕릉 자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 조인제 소장건원릉이 동구릉의 여러 왕릉 중에서 가장 묏자리가 좋다고 한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가 좋은 묏자리에 있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고 웃는다.

태조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이며 전주 이씨의 시조는 이한(李翰)이다. 이한은 이성계의 21대 조상으로 신라에서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고 부인은 태종무열왕 10세손인 김은의의 딸이다. 그의 아들 이자연은 시중 벼슬을 지냈고 손자 천상은 좌복야 벼슬을 지냈다. 이후 고려의 내시집주 이인에 이르렀고 이인은 대장군 이양무를 낳았고 이양무가 이안사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태조의 고조부 목조.

 

목조 이안사는 이한의 18세손이며 20세 초반까지 향촌인 전주에서 살았다.

혈기왕성한 이안사가 전주의 한 기생을 좋아했는데 기생을 놓고 산성별감과 싸움을 벌였고 이에 현감이 주장관인 안렴사에게 고발하는 바람에 하옥될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당시에 이안사가 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안렴사가 함부로 그를 잡지 못했지만 조정에 요청하여 그를 체포하려고 했다.

이를 눈치 챈 이안사는 가솔과 기병, 가족을 모두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 땅으로 피신했는데 이때 그와 함께 삼척으로 떠난 사람이 170여호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당시에 거느린 기병 200여명이나 되었다.

삼척에 도착한 이안사는 함선 15을 만들어 왜구와 싸웠는데 그곳에서 원나라의 군이 침입했다. 그가 원나라와 싸우기 위해 두타산성에 진을 쳤는데 마침 전주의 산성별감이 그지역 안념사로 발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휘하를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이 정착한 곳이 함길도 의주 용주리로 그곳에서 원나라와 싸워 공을 세우고 정식으로 의주병마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안사는 의주병마사가 되었을 때 원산에서 멀지 않은 쌍성(영흥)에 주둔한 원나라 산길왕이 그를 회유하자 이안사는 1,000여호를 거느리고 원나라에 귀순했고 원나라로부터 천 호의 벼슬을 받았다. 이때는 고려 고종 41(1252)으로 최씨 무신 정권 말기이며 고려 왕실이 강화도에서 나와 항복한 것은 7년 뒤인 1259년이다.

원나라에 귀순한 그는 두만강변의 경흥부 알동에서 살았고 고려 원종 15(1274)에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경흥성 남쪽에 마련되었는데 조선 태종 10(1410)에 함흥 서북쪽 달단동 가평사로 이장되었으며 능호는 덕릉이다.

이안사의 부인 이씨는 친우위 장사를 지낸 이공숙의 딸로 본관은 평창이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후 효공왕후에 추존되었고 태종 대에 덕릉과 함께 이장되었으며 능호는 안릉이다.

이안사와 평창 이씨 사이에 태어난 익조 이행리는 이안사가 사망한 다음해인 1275천호 벼슬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당시 두만강 주변의 천호는 모두 여진족인데 그는 고려인이므로 그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그는 가솔과 병사들을 데리고 경흥에서 남쪽으로 40여리 떨어진 두만강 하류의 적도(赤島)에 우여곡절을 겪은 후 자리잡았다.

이후 자신의 출생지인 의주 즉 원산으로 갔는데 이곳은 아버지 이안사가 병마사로 있던 곳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행리는 이곳 의주에서 세력을 키웠고 원나라 일본 원정시 참가하기도 했다. 이때 행리고려 충렬왕을 만났는데 충렬왕은 그의 근본이 고려인이며 마음도 본국에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이행리는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익조에 추존되었고 능은 안변 서쪽 서곡현 봉릉역 뒤골에 위치하며 능호는 지릉이다. 그와 등주 호장 최기열의 딸 사이에 아들 을 낳았고 그녀는 익조의 정비로 추존된 후 시호를 정숙이라 했다.

이춘도조(度祖) 또는 탁조로도 읽는데 몽골식 이름은 발안첩목아이며 아버지 행리의 천호 벼슬을 물려받았다. 이춘은 알동 백호를 지낸 박광의 딸 박씨와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자흥, 둘째가 자춘이다. 자춘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박씨는 경순왕후에 추증되었고 무덤은 함흥 동쪽 동명사 인근에 있으며 능호는 순릉이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형 자흥이 일찍 죽자 어린 조카 교주가 성장하면 벼슬을 돌려주기로 약속하고 형의 지위를 이었지만 이자춘은 천호의 벼슬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실록에는 교주가 자진하여 이자춘에게 천호를 양보했다고 적혀있지만 실제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진다. 이자춘이 사망하자 자신이 적장자임을 내세워 이성계를 죽이고 지위와 재산을 찾으려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는 고려에 귀부하여 관직을 얻었는데 노비를 죽인 살인혐의를 받아 사형되었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인 침척을 주었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하였고, 이후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성계 또한 어릴 때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인 금척(金尺)을 주면서 금척으로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훗날 장성하여 진안 마이산에 들르게 된 이성계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산의 풍광이 어릴 적 꿈 속에서 신인이 나타나 금척을 주었던 곳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신인이 금척을 주었던 내용과 마이산의 풍광을 읊은 내용이 태조 2(1393) '몽금척(夢金尺)'이라는 악장과 '금척무(金尺舞)'라는 춤으로 만들어진다.

당시 원나라왕위 계승권을 두고 다툼이 계속되어 내정이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홍건적이 일어나 원의 몰락을 부채질하고 있었는데 원나라의 상황을 잘 아는 공민왕은 원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골격으로 삼아 일련의 개혁을 실시하면서 자주권과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고려 땅을 지배하고 있던 원나라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려야 했다.

당시 이자춘의 행보는 원나라와의 사이가 나빠져 매우 위험했으므로 고려 공민왕의 정책은 그에게 큰 기회가 되어 1355년 개성에서 은밀히 공민왕을 만나 고려 조정에 귀부했다.

당시 고려 권력은 원나라 기황후의 족속인 기씨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공민왕은 그들을 처단하고 유인우로 하여금 쌍성총관부를 공격하게 했다. 이때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소부윤 벼슬을 내리고 고려군의 공격에 내응을 요청했고 결국 공민왕 5(1356) 고려군이 쌍성총관부를 점령했다. 이때 이성계도 아버지를 도와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 지역은 고종 재위 시절에 원나라에 강점되어 무려 99년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다가 회복된 것이다.

이자춘은 쌍성 회복의 공으로 대중대부사복경이 되었고 공민왕이 내린 개성의 집으로 옮겼다. 그후 1360영록대부장작감파사삭받도만호겸병마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나이 46세인 4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자춘의 무덤은 함흥 동쪽 귀주동에 있으며 환조로 추존되었고 능호는 정릉이다.

이자춘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는데 첫째가 영흥의 천호였던 최한기의 딸로, 그녀의 소생은 태조와 정화공주가 있다. 그녀는 태조가 왕위에 오른 후 의혜왕후에 추증되고 무덤은 정릉과 같은 산에 마련되었고 능호는 화릉이다.

아버지 이자춘이 죽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이성계는 무예에 출중했으며 특히 활솜씨는 가히 신궁(神弓)으로 불렸다. 실록에는 신기에 가까운 태조의 활솜씨를 소개하는 기사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몽금척(夢金尺)

#금척무(金尺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