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 (5) : 제1구역 동구릉(2)

Que sais 2021. 6. 28. 09:57

https://youtu.be/XPwBTRroyO4

<이성계의 두각>

고려말 이성계의 활약은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화려하다.

공민왕 10(1361),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박의(樸儀)의 반란을 평정하였는데 같은 달 압록강이 완전히 얼음으로 바뀌자 홍건적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었다.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기병으로 이성계의 군사력은 위력적이었는데 잘 알려진 이야기는 이성계가 팔준(八駿)이라 불리는 여덟 마리 애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명이다.

다음해에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왔을 때 고려에서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하여 이에 대처토록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공민왕 13(1364) 원나라 기황후 원의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었는데 최영 등과 함께 이를 막았다. 이후 공민왕 19(1370)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사흘에 걸쳐 도강한 후, 진군하여 요동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결정적으로 조선 건국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고려 충정왕 시기부터 우왕 시기까지 빈벌한 왜구의 침입 때문이다. 우왕 시기의 왜구는 규모도 커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는데 우왕 6(1380), 최무선 장군의 화포에 의한 진포 해전으로 왜선들이 모두 불타자 아지발도가 이끄는 20,000여 명의 왜구는 퇴로가 차단되 육지에 있던 왜구들과 합세하여 내륙을 칭공했다.

 

이성계의 운봉 황산 대첩비

이때 왜구들은 옥천, 금산, 상주, 선산, 성주, 함양 등을 점령하여 고려를 마비시키면서 지리산 운봉에서 진을 치고 북상을 준비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하였고 운봉에서 왜구를 대파한다. 이때 왜구의 아지발도는 이성계와 그의 의형제 이지란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당시 이성계는 이지란과 논의해 먼저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끈을 2차례 활로 쏘아 맞혔고 이후 이지란아지발도의 이마를 향해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위화도 회군>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직접적 기반을 만든 것은 우왕 14(1388)위화도 회군인데 이 당시의 정황은 다소 복잡하다. 당시 고려가 당면한 중요한 문제는 외교정책을 둘러싼 국론의 분열이다. 중국 대륙의 명 교체기를 맞아 공민왕은 친명 정책을 실시했으나 그의 사후 우왕은 친명정책을 배격하고 친원 정책을 수립했는데 이성계는 이를 극렬히 반대했다.

그러던 중 명나라사신 살해사건, 공민왕의 시역사건을 트집잡고 우왕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는가 하면 말의 공출을 강요했다. 급기야는 우왕 14(1388)쌍성총관부 지역철령위(鐵嶺衛) 설치문제로 명나라와 고려 간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는 신생국인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의 소유권을 주장했기때문이다. 이들 지역이 원나라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므로 원을 계승한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한 것이다.

최영은 명의 통고에 분개하면서 요동정벌을 꾀하고 우왕도 여기에 동조했다.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임명하고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威化島)를 거쳐 명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마침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자 진군을 중단하고 14일을 머물면서 조민수와 상의하여 아래와 같은 4불가론(四不可論)을 제기했다.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철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음.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음.

 온 나라의 병사를 동원해 원정을 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타서 침범할 염려가 있음.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음.

 

고려정부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철군 요청을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성계와 조민수회군을 결행한 후 최영과의 두 차례의 혈전 끝에 개경을 점령했다. 이후 회군 장수들의 요구였던 최영의 딸 영비 최씨 폐위를 끝까지 거부한 우왕을 폐위하고, 이후 이색과 조민수에 의해 옹립된 9세의 창왕을 옹립했다.

이성계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러나 1년 후 조준정몽주정도전 등은 흥국사에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조작된 논리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내세운다' 폐가입진론을 내세워 창왕을 폐위한 후 공양왕을 옹립했다.

 

최영 장군

그런데 이성계는 공양왕이 정몽주와 더불어 자신을 축출하려하자 정몽주를 죽이고 공양왕을 폐위한 후 1392정도전, 남온 등 측근들의 추대를 받아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일부 학자들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은 위화도 회군이 분기점이며 위화도 회군의 직접적인 원인이 장마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조선은 장맛비 덕분에 건국된 나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성계가 위화도에 진입했을 때는 장마철이었는데 과연 이성계의 회군에 대한 명분이 사실인가이다. 이성계가 회군하여 결국은 고려왕조를 멸망시켰는데 그의 회군이 그의 말대로 장마 등에 의한 우발적이고 불가피한 결정이었느냐이다. 이는 이성계가 정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장마를 명분으로 삼았을 개연성이 있다는 설명인데 실제로 회군을 결정하기 전에 회군한다는 소문이 진중에 돌았다는 기록을 보면 이성계의 모반 징조는 보다 오래부터 준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대의 기상을 면밀히 검토한 학자들은 이성계의 주장 즉 기상이 나빴다는 자체도 동조한다. 첫째는 이성계가 처음부터 회군을 계획했다면 회군의 필요성을 여러 번 상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성계가 회군한다는 소문을 듣고 당시 군위계로 볼 때 대등한 관계였던 조민수가 이성계를 찾아갔다는 사실이다. 회군할 의도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대등한 군사력을 갖고 있는 조민수를 미리 포섭하거나 처단하는 것이 기본이다. 셋째는 출정하는 이성계가 그의 가족을 우왕 근처에 여전히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왕은 이성계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회군 소식을 듣고도 그 가족을 감금하지 않았고 그들이 도망간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즉 이성계가 처음부터 모반을 꾀할 생각이 있었다면 가족을 사전에 피신시켰을 터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위화도 회군돌발 상황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넷째 우왕을 급히 추격하자는 측근의 충동을 이성계가 거절했다는 점이다. 이성계가 우왕에 대한 적개심이 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위화도 회군 자체만 본다면 당시의 기상 여건 등을 볼 때 부득이 회군했다는 설명이다. 결과적으로 고려왕조는 장마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멸망했고 조선은 장마라는 기후에 힘입어 건국했다 볼 수 있다.

세계사적인 사건을 보면 에스파니아 무적함대의 패배, 미국의 독립과정,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 태평양 전쟁의 승패 등에서도 기후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과거부터 위정자들이 천문과 기상 상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방원의 쿠데타>

이성계의 신흥 조선왕조가 고려를 혁파하고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위화도 회군으로 전권을 장악한 이후 유력한 개혁세력인 신흥사대부에 대한 후원자가 됨으로써 이들의 개혁 구상을 자신의 통치기반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했다. 이성계는 국가를 개창하자마자 군사제도, 권력기구, 지방통치제제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였고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다. 신덕왕후 소생 두 왕자 중 장남 이방번은 고려 공양왕의 조카사위였으므로 이성계가 48살 때 낳은 차남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성계(고궁박물관)

그러자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신의왕후 소생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불만이 컸다. 우선 이성계가 이방원을 개국공신책록에서도 제외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죽쑤어 개를 준 것과 마찬가지의 정황이 되었는데 더욱 이방원을 화나게 만든 것은 태조가 즉위 이후 군권분장정책에 따라 왕자들과 종친을 절제사로 임명하고 군권을 분할했다.

더불어 태조는 정도전을 내세워 이들이 가진 사병을 혁파하고자 했다. 이성계 자신이 사병 2,000명을 이끌어 쿠데타로 조선을 건국한 실적이 있으므로 사병을 억제하는 정책을 수립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세자를 조종하여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 때 정도전을 비롯한 관료들과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 공주의 남편 흥안군을 살해하였다. 이를 1차 왕자의 난이라 하는데 방원의 행동은 아버지이자 왕인 이성계에게 반기를 든 것인데 태조의 분노가 대단하였지만 문제는 이성계가 방원을 응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못 볼 것을 보지 않겠다며 곧바로 방과(芳菓,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태종 이방원

이 상황을 저울질한 방원의 동복형제인 넷째 형 방간방원 제거를 목표로 소위 거사했으나 여기에서도 승자는 방원이었다. 이 당시 방간의 편에 섰던 박포가 주살되는 등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의 위세에 겁을 낸 정종은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방원이 왕이 되자마자 이성계는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함흥부 남쪽 15운전사(雲田社)에 있는 함흥 본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등 방원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