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침의 상설제도(象設制度)>
능침까지 올라가는 능역은 기본적으로 잔디(왕릉에서는 사초(莎草)라고 함)로 조성한다. 정자각 뒤쪽으로 작은 동산 모양의 사초지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사초지 위에 오르면 장대석이라 부르는 긴 돌들이 단을 지어 놓여 있고 가장 높은 상계에 능의 주인이 영면한 봉분이 자리한다.
능의 높이는 10자〜15자, 광중(壙中) 깊이 10자. 너비 29자, 길이 25자5치이고 지름 20자〜30자이며 능상 모양은 반구형(半球形)을 이룬다. 반구형은 살림집의 지붕을 모방한 것이고 광중은 살림방을 모방한 것이라 하여 지하궁전을 의미한 현궁(玄宮)이라 부른다. 이에 반하여 일반인의 묘소는 음택(陰宅) 또는 유택(幽宅)이라 한다. 지석(誌石)은 사대석 남쪽에서 석상(石床) 북쪽 사이에 깊이 5자를 파서 3물(三物, 모래·황토·생석회)로 사방과 윗면에 굳게 다져 쌓은 다음 흙으로 메워 묻는다.
일반인은 분상, 봉분, 무덤, 산소라 하지만 왕릉은 능상(陵上) 또는 산릉(山陵)이라 한다. 산릉이란 고대 중국에서 제왕을 장사지낼 때 산을 인(因)하여 왕릉을 만들었으므로 산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진시황 때에는 천자의 무덤을 산(山)이라 하였고 한(漢)나라에서는 능이라 하였다.
봉분 주변 3면에 곡장이라는 낮은 돌담이 조성되어 있다. 궁궐에서의 담장(높이 21자1치)을 치는 것과 같다. 북면에 일직선으로 낮게 담을 쌓은 곳은 담장(垣墻)이라 하는데 이곳을 능침이라 한다. 곡장 안에는 석호와 석양들이 봉분을 호위하고 능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봉분을 병풍석(호석)이 둘러싸고 병풍석 외곽을 난간석이 둘러싼다. 이들 난간석과 병풍석이 초기 조선왕릉 양식의 특징이었으나 제7대 세조 때부터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두른 왕릉들이 전통 왕릉의 기본 양식이 된다. 한편 추존된 능은 대부분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는다.
난간석은 12각형을 이루고 석주는 사각기둥이고 죽석은 원주형을 이루고 있다. 능원 석물에 연꽃 조각이 많이 등장하는데 불교의 상징적 의미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며 왕실의 번영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연꽃이 물을 정화하는 생태적 특성과 군자를 상징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난간석 앞에 석양(石羊) 2좌(二座)와 석양사이에 석호(石虎)를 동․서쪽에 각각 1좌와 북쪽에 2좌씩 담장을 향하여 배치한다. 석호는 능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의미를 지니며,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하고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호랑이는 지상의 동물 가운데 가장 용맹하므로 지상의 모든 미물을 수호해달라는 뜻이며 석양은 지하의 미물을 지켜주는 영물로 지하세계 미물의 수호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석호는 중국과 베트남의 능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만이 갖는 수호 조각물이다.
상계단(上階段) 장대석 위 제1단 능상 정면에 장방형의 석상(石床, 혼유석(魂遊石) 또는 상석이라고도 함)을 두고 좌우에 석망주(石望柱, 또는 망주석(望柱石))를 세운다. 중계단(中階段) 장대석 위 제 2단 정면 중앙에는 장명등(長明燈, 또는 명등석(明燈石))을 세웠다.
장명등은 능침의 능침 공간의 중심시설로 일반적으로 멀리 조산 또는 안산에 축을 맞춘다. 장명등에는 대부분 모란, 연꽃 문양인데 영지, 국화 등이 새겨지기도 한다. 장명등은 일반적으로 왕릉과 일품(一品) 이상 사대부 묘에만 사용하는데 장명등의 화사석(火舍石, 등불을 밝히도록 된 부분)에는 사각의 창을 뚫고, 옥개석을 올린 뒤 그 위에 보주가 달린 상륜을 얹었다. 태조에서 순조까지는 사각창으로 만들었으나 사도세자의 융릉(隆陵)과 정조의 건릉(健陵)은 원형(圓形)이다.
장명등(長明燈) 좌우에 관복을 입은 문인석(文人石, 또는 문관석인(文官石人)) 1쌍 또는 2쌍을 대립케 하고 문인석의 뒤나 옆에는 각각 석마(石馬) 1좌를 세우며 하계단(下階段)인 제3단 좌우 문인석 앞에는 무인석 1쌍 또는 2쌍과 석마를 각각 1좌씩 세운다.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조선 왕조 특성상 문인석을 무인석보다 한 단 더 높은 중계에 설치했다.
문인석은 관대를 착용하고 홀(笏, 길이1尺, 폭2寸)을 쥐고 있는 형상이다. 홀은 관원들이 조복·제복·공복을 입고 두 손에 쥐는 작은판으로서 옥이나 상아(象牙), 괴목으로 만들어 왕의 교명(敎命)이나 전할 말을 써서 잊지 않게 하려는 기구였으나 후세에는 단순한 의례용 장식으로 제도화되었다. 무인석은 대체로 사람 키보다 훨씬 크므로 무인이라는 것을 한 눈에도 알 수 있는데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는데 3미터 이상이다. 비교적 조선 후대인 철종의 릉의 석물이 크게 만들어진 것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민 것으로 추정한다. 석인을 설치하는 습속은 전한(前漢, 기원전206〜기원24)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당(唐)나라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 초기부터 시작되었고 고려초기부터는 더욱 활발하게 세워졌다.
석상의 좌우에 각각 1좌씩 설치하는 망주석은 상단에 둥근머리를 만들고 운두(雲頭)를 새기고 아래에는 염의(簾衣)를 새긴다. 그 아래에 8각형으로 만들고 상층과 하층을 만들며 그 중간에 허리를 만든다. 망주석의 생김새는 남성의 심볼을 모방하여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추정하며 일반인의 묘소에도 세우는데 대체로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용도로 생각한다.
왕릉의 좌향(坐向)을 동·서·남·북으로 구분하여 볼 때 북향으로 쓴 능은 전혀 없으며 동향 10기, 서향 10기, 남향 33기 등 모두 53기다. 중국의 황릉의 경우 능원의 문에서 정전까지 이르는 신도의 양측에 석수를 마주보게 일렬로 세우는데 조선에서는 능침 공간에 수호 형식으로 외향시켜 놓았다. 이는 중국의 묘제 중 제후의 제도를 따르면서도 조선의 독특한 능제 모습이다. 물론 고종과 순종은 대한제국 황제로 칭했으므로 중국 황제의 능제를 따라 이들 석수들이 능침이 아니라 신도 양측에 배치되었다.
왕릉의 내부를 어떻게 만들었느냐와 무덤 안에 벽화를 그리느냐도 큰 관심사다.
내부를 어떻게 만들었느냐를 실록의 내용을 토대로 내부를 추정해보면 현궁은 북쪽으로 머리를 하고 가운데에 있으며 애책(哀冊, 죽음을 애도해 쓴 글)을 서쪽, 증옥(贈玉,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묻던 옥돌)과 증백함(贈帛函, 비단 선물함)을 남쪽에 두고 그 옆에 명기(明器, 그릇 등 도기)와 복완(服玩, 일상 집기와 애장품)을 나열했다. 이외의 것은 문비석(門扉石, 남문의 문짝) 밖의 편방(便方)에 넣었다. 지석(誌石)은 남쪽 봉분과 석상 사이 북쪽에 묻었다고 한다.
벽화에 대한 궁금증의 정답을 말한다면 벽화를 그린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석실 내부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벽화 및 내부 축조에 대해서 홍순민 교수의 설명을 인용한다.
‘석실을 덮는 개석(蓋石)의 내면, 곧 아랫면에 먹-유연묵(油烟墨)을 써서 하늘의 형상(天形)과 해와 달, 별들과 은하수 등을 그 운행의 순서에 따라서 그린다. 해는 붉은 색, 달과 별들과 은하수 등은 흰색 분(粉)으로 그린다. 개석의 그 천상(天象) 바깥 부분과 네 면의 벽을 이루는 방석(旁石)은 모두 분으로 바탕을 칠하고 그 위에 동편에는 청룡(靑龍), 서편에는 백호(白虎)를 그리되 이들은 모두 머리를 남쪽으로 바라보게 하고, 북쪽 벽에는 현무(玄武)를 그리되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남편은 문짝(門扉石)이 되는 두 돌이 서로 합쳐지는 곳에 주작(朱雀)을 그린다. 두 문짝돌에 나누어 그리되 합쳐지면 하나의 형상을 이루게 하고, 머리는 서쪽을 향하게 한다. 네 동물 그림의 상단이 두 석실의 사이 벽에 뚫린 창 아래부터 시작되도록 그린다. 석체(石砌)에는 같은 크기의 황장목판(黃腸木板)을 놓고 그 위에 돗자리(地衣)와 요를 깔고 그 위에 재궁을 안치하고, 마지막으로 문 안에다 발을 드리운다.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가 석실을 만든 공인(作工)을 거느리고 현궁(玄宮)의 문짝돌을 닫고, 끝으로 문의석(門倚石)을 더 놓는다.’
위의 설명만 읽으면 다소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왕릉을 직접 답사하면서 위 설명을 되돌려 보면 서서히 이해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한 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법. 차례차례로 왕릉을 답사하면 왕릉의 기초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선왕릉의 규모가 만만치 않으므로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많이 들어온다. 자료에 의하면 왕릉을 건설하기 위해 많은 전문 장인들과 잡역부들이 동원되었는데 대략 연인원 20만 명에서 30만 명 가까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장례가 나가는 발인 절차에 필요한 인원도 6,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다. 바로 이런 거대한 역사를 거쳐 왕릉이 만들어지므로 왕릉 축조가 조선 왕조에서 가장 중요시한 사안 중의 하나이지만 동원되는 인원과 경비가 많이 소요되므로 조선왕조 내내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세조가 능역을 간소하게 만들라고 명령한 것도 이 때문이다.
참고문헌 :
「동구릉의 주인과 그 시대」, 연갑수, 2007
「500년 왕조(王朝)의 무덤이 모두 남아있다니… 세계가 놀랐다」, 허윤희, 조선일보, 2009.05.14.
「문화유산 보존 관리에 주력해야」, 연합뉴스, 2009.06.28.
「조선왕릉엔 ‘다빈치코드’ 뺨치는 ‘컬처코드’가…」, 윤완준, 동아일보, 2009.06.29.
「국태민안 기원하는 조선왕릉의 석물」, 이창환, 월간문화재, 2009.07월
「5개월의 국장(國葬) 기간 정성과 기술 총결집」, 이창환, 주간동아, 2010.03.30.
「왕실 피바람 지켜본 인수대비 우비좌왕의 특이한 형태」, 이창환, 주간동아, 2010.05.24
「4대 걸친 왕실 어른 노릇 두 차례 예송논쟁 촉발」, 이창환, 주간동아, 2010.10.04
「조선조의 왕릉문화 이해」, 목을수, www.boso.kr
『문화유산 왕릉』, 한국문원편집실, (주)한국문원, 1997
『우리역사 우리문화』, 한용근, 서경문화사, 2000
『조선왕릉 답사수첩』, 문화재청, 미술문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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