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
이성계가 이방원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는 조선왕조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위야 어떻든 조선 개창은 이성계였지 이방원이 아니었으므로 이성계가 이방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 있는 빌미였다. 더구나 이성계는 태종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태종은 이성계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방법론은 단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흥에 은거해 있는 태조를 자신이 있는 수도로 모셔오는 길이다. 그러나 태상왕인 이성계를 강제로 납치해 올수는 없으므로 태조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들을 함흥으로 보내 설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유명한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생긴다.
태종은 함흥차사로 태조의 옛 친구인 성석린(成石璘)을 보냈다. 성석린을 만난 이성계는 단도직입적으로 태종의 명으로 자신을 달래려고 온 것이냐고 질문했다. 석린은 “만약 그런 목적으로 왔다면 자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대답을 듣고 이성계가 태종1년(1401) 4월 환궁했는데 그해 다시 서울을 떠났다. 태종은 다음해 1월 다시 성석린을 보내 환궁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태종에게 죽은 방석과 방번, 그리고 사위인 이제(李濟)를 추도하기 위해 환궁을 거절한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성석린이 두 번이나 함흥차사로 갔는데도 이성계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다.함흥차사로 살해되었다는 사람은 판승추부사 박순이다. 그런데 박순 역시 『태종실록』에 의하면 조사의(趙思義) 난이 일어났을 때 함주의 군중(軍中)에서 피살되었다고 적혀있다. 태종 2년(1402)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이기도 했던 안변부사 조사의가 신덕왕후와 왕세자 방석의 원수를 갚고 태조를 복위시킨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자 태종은 박순을 보내 이들을 무마하려 했다. 박순은 함흥에 도착해 주군(州郡) 수령들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라고 설득하다가 피살된다.
정작 함흥차사로 유명한 사람은 무학대사다. 무학대사와 태조는 수십 년 지기인데 무학이 이성계의 함흥 본궁에 머무르면서 자신이 온 이유를 밝히지 않다가 어느 날 태조에게 환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다음과 같은 요지를 이야기한다.
“방원이 진실로 죄가 있으나 이성계의 사랑하는 아들들은 모두 죽고 오로지 방원만이 남았습니다. 만약 이마저 끊어 버리면 이성계가 평생 애써 이룬 왕업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내 혈족에게 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무학대사의 말에 설득당한 이성계는 결국 서울로 환궁한다. 이성계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함흥차사라는 에피소드도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야사를 정사로 볼 수 없다는 증거로 자주 거론된다.
여하튼 태종은 부친이 잡아놓은 수릉 대신 도성 밖 동북방에 있는 양주의 검암산 아래에 태조릉을 조영했다. 도성 안의 수릉을 옮긴다는 명분을 앞세워 계모 신덕왕후의 능도 옮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후 태종은 도성 안에는 왕실이나 사가의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하고, 도성 10리 밖에 능역을 조성하도록 했다. 이 제도는 후에 『경국대전』에 법문화됐다. 그래서 지금도 도성 안에는 왕릉이나 무덤이 한 기도 없다. 서울의 사대문 안을 뜻한다.
<태조의 건원릉>
조선이 개국되자마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에도 불구하고 고려왕조로의 복귀가 아닌 조선왕조의 안정화로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왕실의 권위가 떨어진데다 조선 왕실이 신흥사대부 세력과 결합하여 그들의 이념인 성리학을 새로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표방하여 나갔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태종 이방원이 이성계의 뜻을 거스리고 형제를 살해한 후 왕위에 오르자,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재위한 기간은 다소 짧아 1392년부터 1398년까지로 햇수로는 7년, 만으로는 6년 2개월이다. 태조는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즉위한 태종에 대한 증오심으로 서울을 떠나 소요산,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佛道)에 정진하다가 태종 8년(1408) 74세의 나이로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別殿)에서 사망했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이후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삭제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다.
제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은 기본적으로 조선왕릉 제도의 정례(定例)가 된다. 건원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중앙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데 조선왕의 능호는 모두 외자인데 반해 건원릉만 두 자다. 태조의 비는 신의왕후 한씨, 계비는 신덕황후 강씨(1899년 신덕왕후에서 신덕황후로 추존)인데 신의왕후의 묘는 북한에 있고 신덕황후의 묘는 석관동 정릉에 있다.
원래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고자 여러 차례 수릉(壽陵, 생전에 미리 정해놓는 무덤) 자리를 물색했다.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한양 도성 안 경복궁 서남방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축조해 놓았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황후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현재의 자리에 조성했다. 태종이 태조의 유언을 지키지 않은 것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과의 골이 매우 깊었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의 교과서>
건원릉은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헌정릉 제도를 기본으로 조성되었으며 조선 왕릉의 교과서나 마찬가지다. 홍살문에서 직선으로 보물 1741호인 정자각이 보인다. 정자각은 태종 8년(1408)에 건원릉과 같이 건립되었고, 그 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지만 『국조오례의』길례 단묘도설과 비교해 볼 때 건립 시의 기본적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다 조선 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정자각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조선왕릉 조성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물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자각 뒤에 있는 능침의 봉분은 12각의 화강암 병풍석이 싸고 있으며 병풍석의 양쪽 가장자리 우석(隅石, 귀퉁이 돌)에는 중심에 태극이 그려진 방울, 방패 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 구름무늬 속에 서 있는 십이지신상의 모습이 보인다. 병풍석 밖으로 난간석이 돌고 난간석 밖으로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밖을 향해 배치되었다. 봉분 앞에 석상(혼유석, 상석)이 있는데 석상 밑으로 귀면이 새겨진 고석 5개가 보이며 그 양 옆에 망주석이 서있다.
봉분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돌상 같은 것을 혼유석, 석상 또는 상석이라고 한다. 묘제(墓祭) 지낼 때 제물을 올려놓는 상으로 ‘네티즌 나무’는 산소 주인의 영혼께 올리는 진짓상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했다.
엄밀하게 보면 석상과 혼유석은 다른 것으로 석상이 밥상이라면 혼유석은 깔고 앉는 방석이다. 얼핏 보면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혼유석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이다. 혼유석 밑에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숨어 있으므로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혼유석은 봉분과 석상 사이에 위치한다.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이 문고리를 물고 있는 것은 이런 연유다.
그런데 왕릉의 석상을 혼유석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왕릉 앞에 정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무덤에서는 석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지만, 왕릉에서는 봉분 밑에 있는 정자각이라는 건물에서 제사를 올린다. 왕릉의 석상에는 음식을 올리지 않기 때문에 왕릉의 석상을 혼유석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전기에는 석상(石床)이라는 표현을 주로 쓰다가 선조 때부터 혼유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건원릉은 병풍석의 문양이나 문인석, 무인석 등의 양식에서 고려 헌정릉의 영향이 보이지만 석호⋅석양의 배치, 장명등, 난간석주는 새로운 양식으로 일정한 변화를 주어 새 왕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양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석물의 조형은 중국 남송 말기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건원릉에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가 있다. 소전대는 태종까지만 있고 이후 예감으로 대치된다. 또한 정자각 남쪽에 비각과 수복방이 있다. 비각 안에는 능상 측에 신도비, 정자각 측에 능표(비문)이 있다. 신도비는 1409년에 세웠다. 비의 형식은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었는데 당대 최고의 조각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런 형식은 통일신라 이후에 계승된 전통이다. 비문 상부의 전액은 문신 정구(鄭矩)가 쓰고,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권근(權近)이 글을 짓고, 음기의 글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글씨는 고려 말·조선 초의 서예가 성석린(成石璘)이 썼다. 신도비 앞에는 조선 개국의 업적과 치적을 새기고, 뒤편에는 개국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했다. 사자의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신도비는 중국 진송 때 비롯된 것으로 현재 사대부가의 신도비는 수 없이 많지만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의 태조 신도비와 헌릉의 태종 신도비뿐이다. 능표는 500년 후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세운 것으로 고종이 친히 썼다.
건원릉은 특이하게도 봉분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심어져있다. 원래 태조는 고향 함경도 영흥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를 먼 이북 땅에 모실 수 없으므로 고향에서 흙과 억새풀을 갖고 와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봉분 위 억새풀은 특성상 자주 깎으면 죽게 되므로 4월 5일 한식 때만 한 차례 벌초한다. 각 왕릉의 제례 절차를 태릉에 있는 <조선왕릉 전시관>의 산릉제례를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왕이 소여를 타고 와서 홍살문 앞에 배위에 서서 능을 한 번 바라보고 어도를 따라 걸어 미리 설치해둔 소차로 들어가서 손을 씻고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예에 따라 정자각 동계에 오른다. 그리고 신을 맞이하기 위해 네 번 절을 한 뒤 제주 따르는 모습을 살펴본다. 세 번 향을 피우고, 왕이 먼저 첫 잔을 올린 다음 축문을 읽는다. 그 다음 영의정이 두 번째 잔을 올린다. 축문을 읽음으로써 조상의 위업을 다시 한 번 기리고, 향을 피우고 술잔을 바침으로써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다. 그 뒤 절을 네 번 하면서 신을 보내고 축문을 태움으로써 제례를 끝낸다.’
산릉 제례를 통해 왕의 존재가 단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고 먼 조상의 임금으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을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배릉(拜陵) 의식이라고 하여 건원릉의 능, 부왕과 모후의 산릉에 반드시 참배했다. 참고적으로 건원릉의 배위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홍살문 옆에 있지 않고 정자각 동계의 어도를 올라가자마자 옆에 있다. 이는 조선의 왕릉제도가 정비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건원릉을 만들면서 원찰(願刹)로 개경사(開慶寺)를 축조했다고 알려지나 지금은 건물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능의 관리를 위해 영 1인, 참봉 1인을 두었으며, 참봉은 종친부(宗親府)에서 대군이나 왕자군의 봉사손(奉祀孫,) 즉 제사를 받들 수 있는 후손을 자유로이 임용하도록 하였다. 이후 다른 왕릉도 같은 예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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