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엽산 자락에 있는 광릉(사적 197호)은 조선 제7대 세조(1417〜1468)와 정희왕후(1418〜1483)의 능으로 면적만 무려 249만 4,800제곱미터나 달한다. 풍수가들은 광릉을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한다. 광릉 자리가 좋아서 이후 400여 년간 세조의 후손이 조선을 통치했다는 설명도 있다.
광릉 숲은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는데 식물 865종, 곤충 3,925종, 조류 175종 등 모두 5,710종의 생물이 산다. 여기엔 흰진달래 등 광릉 숲 특산식물과 장수하늘소 등이 포함돼 있다. 단위 면적당 식물 종 수는 광릉 숲이 헥타르(㏊)당 38.6종으로 설악산 3.2종, 북한산 8.9종을 크게 웃돈다. 곤충도 광릉이 175.2종으로 설악산 4.2종, 주왕산 12.3종보다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만 살고 있는 크낙새(천연기념물 제11호)도 이곳에 있다.
이처럼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데는 무엇보다 인간 활동이 집중되는 온대 중부지역에서 이례적으로 장기간 숲이 보전됐기 때문이다. 조선 7대 왕 세조의 왕릉인 광릉의 부속림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일제강점기에도 임업 시험림 구실을 해 왔으므로 개발과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세조는 세종 17년(1417)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무예에 능하고 병서에 밝았으며, 세종 27년(1445)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단종)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 무인세력을 거느리고 야망의 기회를 엿보다가, 단종 1년(1453)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주륙(誅戮)하였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上奏)하였으며, 곧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계획에 따라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을 궐문에서 죽였다. 이를 계유정란이라 한다. 이후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趙遂良)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이후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1455년 단종으로 하여금 선위(禪位)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단종이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세조의 처신에 반대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룡포로 귀향간다. 세조가 왕위에 올랐음에도 왕권을 강제로 빼앗다고 생각하는 신하들은 세조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는데 그 중에서도 세조를 제거하려는 거사에 실패하여 체포된 사육신들의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은 현대인들이 보아도 놀랄 정도다.
박팽년은 충청감사에 있을 때부터 공문에 ‘신(臣)’이란 단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세조를 왕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성삼문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백성에겐 두 왕이 없다’고 하며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유응부는 가혹한 고문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며 이개, 하위지도 마찬가지로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갖은 고문에도 늠름한 태도를 보였다.
결론적으로 거사 주동자인 사육신과 그외 연루자 70여 명이 모두 처형되면서 단종 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들이 단종을 향한 충성심을 꺾지 않자 세조가 이들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잔인하게 처형하여 두고두고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냉혈한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세조에 대한 후대인들의 역사적 평가는 팽팽하다.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죽여 버린 냉혹한 야심가라고 혹평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반면에 그의 치적에 괄목할 만한 것이 많다고 인정하는 학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우선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의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세조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국방력 강화로 호적·호패제를 강화했고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을 5위(五衛) 제도로 개편하였으며 건주(建州)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 각도에 둔전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리는 등 조선왕조가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고 평가한다.
세조가 야망과 무술이 뛰어 났다는 말은 많이 있으나 음악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아버지 세종은 세조의 능력에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세조가 일찍이 가야금을 타니 세종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진평대군(세조)의 기상으로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중략) 세조가 또 일찍이 피리를 부니 자리에 있던 모든 종친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학이 날아와 뜰 가운데서 춤을 추니 금성대군 이유의 나이가 바야흐로 어렸는데도 이를 보고 홀연히 일어나 학과 마주서서 춤을 추었다. (중략) 세종이 또 문종에게 이르기를 악(樂)을 아는 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대군뿐이니 이는 전후에도 있지 아니할 것이다.’
음악에 탁월한 재주를 보인 세조의 또 다른 한 면은 어느 왕보다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많이 베푼 왕이라는 점이다. 실록에 의하면 세조의 술자리 베품(설작(設酌))을 수없이 기록하고 있다. 신하와 함께 거나하게 취한 인간적인 모습이 배어있지만 세조의 술자리는 공신들을 결속하기 위한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세조가 술자리 이상의 무절제를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으며 이는 세자를 향한 절제의 가르침으로도 나타난다. 『세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내가 본래 색(色)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술을 마시고 싶으면 너(예종)와 여러 장상(장군과 재상) 등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절대로 궁첩(宮妾)과 더불어 술을 마시지 아니했다. 이는 네가 보는 바이다.’
실제로 세조는 1명의 후궁만 두었으며 술자리에는 조강지처인 정희왕후와 함께 했던 경우가 많았다. 말년에 세조는 궁을 나서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옛 집을 찾았는데 이때도 정희왕후와 술자리를 같이했다.
세조의 남다른 일면을 볼 수 있지만 만사가 세조의 뜻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권을 찬탈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이 자주 나타났고 어느 날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세조는 침을 피하려고 몸을 돌렸으나 등에 맞고 말았다. 그 뒤로 세조는 침을 맞은 부위에 등창이 나, 평생 고생했다. 등창을 고치려고 강원도 상원사를 찾았는데 이 당시의 일화는 그야말로 전설적이다.
세조가 오대산의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다가 계곡에서 잠시 쉬면서 몸에 난 종기를 보이지 않으려고 따르던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때 동자중 한 명이 가까운 숲속에서 놀고 있자 세조는 동자를 불러 등을 좀 씻어 달라고 했다. 목욕을 마친 세조가 ‘어디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 주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당시의 법도로 왕의 몸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으므로 동자가 여하튼 이를 어긴 셈이 된 것이다.
그러자 동자도 ‘대왕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한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조는 깜짝 놀라서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제서야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아 있음을 알았다. 세조는 기억을 더듬어 화공에게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이것이 현재 상원사의 법당인 청량선원에 보관된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이다.
상원사에서 병을 고친 세조는 다음 해에도 상원사를 찾아 법당으로 올라가 예배를 드리려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상하게 생각한 세조가 밖으로 나와 법당 안을 샅샅이 뒤지도록 하니 불상 밑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숨어 있었다. 고양이 때문에 목숨을 건진 세조는 상원사에 ‘고양이밭’이라는 뜻의 묘전을 내렸으며 현재 입구에 고양이 상이 있다. 이후 세조는 서울 인근 여러 군데에 묘전을 마련하여 고양이를 키웠는데 강남구의 봉은사의 밭을 얼마 전까지도 묘전이라 불렸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상원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동종(국보 제36호)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에밀레종보다 45년이 앞선다. 이 종이 상원사에 오게 된 것도 세조와 관련이 있다. 세조가 상원사에 바치려고 전국을 수소문하여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선정했는데 그것이 바로 안동 누문에 있던 종이었다. 이것을 1469년 현재의 상원사로 옮겼는데 신기한 일은 안동 누문에 걸려 있던 종이 꼼짝하지 않아 종유 하나를 떼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전설을 입증하듯 지금도 유곽 안에 종유 하나가 없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 세조는 1468년에 원상제(院相制)를 설치했는데 원상은 왕명의 출납 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三重臣, 신숙주·한명회·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세조가 말년에 격증하는 정무의 처결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물론 후사의 장래 문제도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9월 7일 왕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 그 이튿날에 사망했다.
그런데 『실록』에는 매우 흥미 있는 기록이 있다. 세조 사망하기 직전 천문이 이상하게 돌아간 것이다. 혜성의 출현이다. 9월 2일과 3일, 4일까지 사흘 동안 연속해서 혜성이 나타나고 또 9월 6일에도 나타났다. 당대에 혜성은 매우 큰 변괴를 의미하므로 한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세조가 혜성의 등장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는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
정희왕후는 파평윤씨 윤번의 딸의 딸로 세종 10년(1428) 수양대군과 가례를 올려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봉해지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정희왕후는 세조가 왕이 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세조가 정권을 잡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거사를 위한 용병이 누설되었다며 신하들이 만류하자 중문에 이른 수양대군에게 손수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을 결행하게 했다는 일화를 갖고 있다. 1468년 예종이 19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며, 성종 즉위 후에도 계속 7년 동안 섭정하였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사망하자 맏아들인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즉일로 즉위케 했다. 이는 전례가 없던 일로 정희왕후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7년 동안 섭정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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